토요일에도 함께 밥을 먹기가 어려울 때가 많을 만큼 바쁘게 일을 하던 남편 매니저 씨는, 원래 평일엔 저희와 함께 밥을 먹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한국의 저녁식사처럼 하루의 메인 요리가 점심식사인 그리스에서는 이 점심이 참 중요한 밥인데, 매니저 씨가 만약 매일 점심을 사 먹는다면 정말 지겨운 일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평소엔 제가 요리를 해다가 갔다 주면 매니저 씨와 직원은 가게 일을 하며 밥을 먹고, 저는 마리아나와 집에 와서 밥을 먹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한달 전부터 마리아나가 사무실 근처의 영어학원에 다니게 되면서, 레벨테스트를 해서 배정받은 수업 시간이 하필이면 하교 후 1시간 후에 시작하는 수업이라 집에 와서 점심을 먹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무실에서 집까진 차로 20-30분이 소요되고, 그리스는 학원 역시 12세 미만의 어린이의 경우 부모가 동반되어 학원 교실 앞까지 데려다 주고 데려 오는 것을 법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결국 수업이 있는 일주일에 이틀은, 아침에 업무를 보고 집에 다시 들어와 저와 딸아이까지 모든 사람이 먹을 요리를 해서 가게로 출발하곤 하는데, 사람 수가 많다 보니 도시락 통은 양손 터지게 바리바리 들어야 할 만큼 많아져 버렸습니다.
얼마전 점심 도시락으로 만들었던 그리스식 까르보나라와 아마트리치아나입니다.
레시피는 다음에 따로 포스팅 하도록 할게요.
처음엔 양손 터지게 도시락을 만들어 허겁지겁 시간에 쫓겨 먹는 이런 상황이 힘들고 '이게 뭔가? 학원을 바꿔야 하나? 정말 심사숙고 골라 겨우 맘에 드는 학원을 찾았는데 어쩌지?' 싶었지만, 그래도 그리스에서는 모든 사람이 밥을 먹는 고요한 시간, 그 단 한끼 제대로 먹는 밥이라 (그리스 문화에서 파티가 있는 날을 제외하고 아침 저녁은 간단하게 먹는다고 말씀 드렸지요?) '그냥 내가 좀 수고하는 수밖에 없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세상의 모든 버거운 상황에 꼭 안 좋은 요소만 존재하는 게 아니란 것을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니 학원 시간 덕분에 저희 세 식구가 그렇게 일 주일에 두 번을 사무실 구석에 나란히 앉아 함께 밥을 먹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일요일에 점심을 같이 먹는 일은 허다하지만, 그건 세 사람이 밥을 먹는 게 아닌 늘 친척들과 함께 먹는 밥이라 심지어 한 테이블에서 밥을 먹어도 매니저 씨가 뭘 먹었는지 딸아이가 뭘 먹었는지 확인을 못할 만큼 멀리 떨어져 앉을 때도 많고, 워낙 많은 수가 함께 식사를 하다 보니 세 사람만 함께 밥을 먹는다는 오붓한 기분을 거의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엊그제 수요일 오후에도 가게에서 세 식구가 나란히 앉아 도시락 통들을 열어 점심을 먹는데, 마침 직원들이 출장을 나가고 우리 세 사람만 남았습니다. 회사라 심각한 얼굴로 일하던 매니저 씨는 오붓한 상황에 음식이 입에 들어가니, 갑자기 얼굴이 부드러워지며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늘어 놓았습니다.
"올리브나무, 너 기억하지? 한국에서 그 수제피자가게 아저씨. 그 아저씨 내 친구 같은 사람이었는데. 그 아저씨 터키에 와서 자기 식당을 여는 게 꿈이라고 했었던 거 기억나? 꼭 그 아저씨 다시 만나고 싶어.
아, 맞다. 새벽 네 시까지 하던 OO치킨 사장님 생각나? 그 아저씨 영어를 되게 잘했던 거. 새벽에 치킨 사러 가면, 언제나 스포츠 채널 틀어 놓고 자기가 자기네 생맥주 먹고 취해서 나한테 인생 하소연을 다 하곤 했었던 거. 자기가 연세대 졸업해서 잘 나가던 회사원이었는데, 명퇴 당해서 지금은 치킨집 하면서 잠도 못 잔다고. 그래서 내가 그랬지. 나도 연세대 한국어학당 나왔는데 지금은 이렇게 고생하면서 일한다고. 하하. 그 아저씨 내 농담에 엄청 웃으며 자꾸 생맥주를 공짜로 주겠다는 거야. 그래도 그 아저씨, 닭을 엄청 잘 튀기던 베트남인 아내를 정말 사랑했어."
"응. 기억나. 그 집 떡튀김에 치킨 양념 묻혀 주던 거, 진짜 맛있었는데. 그리고 그 사장님 아내 분 정말 예쁘고 싹싹했어. 한국어도 잘 했고. 이런 타국생활의 어려움을 진작 알았다면 좀 잘해줄 걸 그랬다 싶어..."
"그래! 그랬어! 하하. 그 아저씨 보고 싶네. 나한테 서비스도 잘 주고 그랬는데. 난 거기 무, 진짜 맛있었거든. 어휴. 시원하고 새콤하고 끝내주는 맛!"
이쯤에서 딸아이도 고개를 갸우뚱하며 한마디 거듭니다.
"난 기억이 안 나는데...이상하다... 나 할머니 집에 갔을 때 먹었어? 정말 맛이 궁금한데..."
매니저 씨는 눈으로 저에게 찡긋 신호를 보내며 대답을 합니다.
"야. 너도 먹었어. 니가 그 때 어려서 기억이 안 나는 것뿐이야. 다음에 한국에 가면 사 줄게. 그땐 엄마는 놔두고 우리 둘이 가자. 알겠지?"
"아이. 좋아~~."
비록 빨리 먹고 양치질 하고 또 저희는 학원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지만, 또 집보다 불편하게 앉아 밥을 먹어야 하고, 손님들에게 냄새 풍길까 봐 눈치 보며 부랴부랴 먹어야 하는 상황이지만,
'한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 하는 사람'을 식구食口 라고 정의 하듯,
우리는 그렇게 잠시나마 긴장을 풀고 밥을 나누어 먹으며,
한국을 함께 그리워하는
그런 식구임을 상기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행복한 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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