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온 첫 해, 어느 마켓에 무엇이 파는지, 그리스 가정식 요리를 어떻게 만드는지도 잘 몰라 쩔쩔 매던 저에게, 매일 당신의 집밥을 가져다 주시며 시어머님이 던진 말이 있습니다.
"넌 왜 매일 제대로 된 가정식 요리를 만들지 않는 거니??"
저도 그러고 싶었지만, 이민 절차 때문에 관공서로 뛰어다니기도 바빴고 그리스 생활에 적응도 안된 저였기에 한식을 제외하고는 간단한 그리스식 샌드위치나 스파게티 정도만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자주 언급했듯, 지금은 그리스 가정식 요리들까지도 척척 만들어 매일 제대로 된 집밥을 사무실로 배달까지 해가며 가족들과 직원들까지 해서 먹이고 있는데요.
이것은 비단 요리법을 배운다고 되는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요리를 할 줄 안다고 해서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집밥을 성실하게 가족들에게 먹이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집밥이 좋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여성의 입장에서 집밥 만을 고수하기에는 시간이 허락되지 않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 현실일 것입니다. 특히 육아에 많이 지쳤거나 직장생활을 하는 여성의 경우엔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제가 이렇게 집밥을 사수하며 아무리 바빠도 열심히 요리하는 사람이 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 친척, 친구들인 여성들을 관찰하다 보니, 노후에 연금혜택을 누리기 위해 맞벌이 비율이 상당히 높은 그리스 여성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집밥을 사수하는 특별한 방법과 노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그 방법과 노력들을 공유해 봅니다.
1. 전날 저녁, 다음날 먹을 요리를 미리 해 놓습니다.
찌거나 끓이거나 튀기는 요리도 있지만 오븐요리 종류가 더 많은 그리스의 가정식은, 한식에 비해 만드는 시간이 길게 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밑반찬을 기본으로 두고 밥 국 메인 요리 등을 해서 먹는 한식과 달리 밑반찬이라는 게 없이 그날 그날 요리를 해서 먹어야 하는 형태라, 냉장고에 많이 해 두고 저장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여름이 긴 그리스에서는 메시메리에 늦은 점심(오후2시반 ~5시)을 먹고 시간적 여유가 있는 이 식사를 하루의 메인 요리로 여기기 때문에, 직장을 다니는 여성의 경우 오전 근무를 하고 퇴근을 하는 경우이든 혹은 메시메리에만 쉬는 경우이든, 긴 시간이 걸리는 가정식 요리를 할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보통 직장 생활을 하지 않는 은퇴한 여성, 육아휴직 중인 여성들의 경우 이 메인 요리를 아침부터 준비해야 점심 전에 요리가 끝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전날 저녁, 다음날 먹을 요리를 미리 해 놓고, 퇴근 후에는 데우기만 해서 가족과 함께 먹는 것입니다.
2. 장을 자주 봅니다.
밑반찬 등의 저장식 종류가 적어, 마트를 자주 가지 않고서는 이렇게 신선한 요리를 만들어 내기가 어려운데요.
학원차가 도는 시스템이 아니라 부모가 자녀들을 학원에 등하원 시켜야 하는 시스템의 그리스 엄마들은, 자녀가 학원에서 뭔가 배우는 한 두 시간 사이에 장을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원 시간이 주로 몰려 있는 저녁 5시~8시 사이에 슈퍼마켓에서 엄마들과 마주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녁을 점심보다 간단하게 먹고 늦게 먹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업무가 더 늦게 끝나는 여성들은 점심시간에라도 짬을 내, 장을 자주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3. 늘 집밥에 대한 정보에 귀를 기울입니다.
기본적으로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입맛이 예민하고 맛있는 것을 좋아하는 그리스인들은 다른 나라에 이민을 가서도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그래서인지 그리스 공중파TV에는 (케이블이 아닌) 요리프로그램이 차고 넘치도록 많습니다.
프랑스에서도 비슷하게 방송하고 있는 요리 프로그램 형태인 '일반인 5인이 1주일 동안 각자의 집에서 요리를 해서 서로에게 점수를 주어 그 주의 우승자를 뽑는' κάτι ψήνεται까띠 프시네떼 (뭔가 구워지고 있어요.) 라는 프로그램은 현재 그리스에서 매일 저녁 9시 황금 시간대에 배정되어 몇 년간 인기프로그램으로 자리잡고 있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그리스 여성들은 모였다 하면, 꼭 집밥에 대한 대화를 빠뜨리지 않고 나누는데요.
지난 주, 딸아이 반에 반장으로 선출된 친구의 엄마는 저를 포함한 다른 세 아이의 엄마들을 불러 차를 마시자고 했습니다.
저는 반장 엄마로서 학부모회를 운영하는 것을 의논하고 싶어서 그런 건가 싶어 만나기가 주저되었지만, (학교 일에 많이 나서는 엄마가 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질 않습니다.) 그 아이의 생일 파티에 다녀오거나 밖에서 차를 마신 적은 있지만, 그 집에 초대 받은 것은 처음이라 일단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저를 제외하고 집 주인 엄마까지 나머지 세 사람은 모두 그리스인이고, 저희 넷은 모두 일하는 엄마들인데요.
아테네에서 와서 일주일에 두 번 당직을 서는 종합병원 의사인 마리아, 그리스 북부에서 이사와 이곳 생활 십 년 차로 호텔에 근무하는 엘레니, 남편이 군인이라 전국을 몇 년씩 돌며 살아본 간호사인 까떼리나가 그날 모인 엄마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과 그날 나눈 이야기 주제는 학부모회 모임이 아닌, 아이들 학원 정보와 침대보까지 다렸다는 다림질 얘기를 제외하고는 온통 집밥 메뉴와 레시피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게다가 마리아의 여동생은 현재 아테네에서 신문기자로 근무 중인데, 바쁜 그녀 역시 저희 모임 중간에 우연히 전화를 해, 잠깐 짬을 내서 요리하러 집에 들어왔다며 언니에게 레시피를 물어보아서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상대적으로 업무 시간이 자유로는 저로서는, 도대체 그 엄마들이 어떻게 그런 근무환경에서 집밥을 매일 하고, 티셔츠에 속옷까지 다리며, 아이들 학원에 데려다 주는지 세상에 그런 미스터리가 없어 보였지만, 이런 광경을 처음 목격하는 것도 아니었기에(다른 지인들, 친척들 중에도 이런 수퍼우먼들이 참 많습니다.) 그들이 나누는 정보를 그냥 듣고 저도 배울 부분에 대해서는 기억하려 애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점은 그리스 여성들이 바쁜 중에 집밥을 만드는 등의 가사일을 하는 것에 대해 억울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에서 사회생활과 가사일을 겸하며 저와 여자동료들이 느꼈던 억울함이 있었기에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한국사회가 지금은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남존여비의 유교사상이 존재하고 있고, 부모세대에서 가졌던 시집살이의 억울한 마음이 은연중에 대물림되며 직장여성들이 가사일에 지나친 강요를 받는 것에 대해 억울함을 느끼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리스에 오니 이렇게 바쁜데 여자만 고생하는 것 같은 마음을, 그리스 여성들은 잘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유가 무얼까, 왜 그리스 여성들은 억울하게 여기지 않을까 관찰해보니, 그리스는 아무리 집착이 심한 시어머님들이 많은 가족중심 문화라고는 하나, 기본적으로는 모계 중심 사회이고 여성이 기득권자이기 때문에 그렇다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에 대해 다른 글에서도 밝힌 적이 있지요?)
그래서 마초 근성 강한 그리스 남자들, 집안일 손하나 까딱 안하는 그리스 남자들에 대해서 억울해 하지 않는 마음이기 때문에, 피곤해도 자발적으로 집밥을 사수하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가족 모임이 많아 집밥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리스인들의 전체적인 개념 때문에, 그리스 여성들이 이 집밥 문화를 사수하려고 힘든 상황에서도 당연한 듯 노력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스에 다른 특별식 식당보다 가정식을 요리하는 식당의 수요가 한국에 비해 현저히 적은 것 또한(인구 비율을 감안하더라도) 그 증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한국에서도 사회생활과 집안일을 동시에 했었는데 그때는 그래도 자주 간단한 외식을 하더니, 그리스에 온 후 전화할 때마다 요리하고 있어, 청소하고 있어 라는 말을 자주 해서 이상하다는 제 미국 동생의 전화를 받으며, 어느새 저도 그리스인들 속에서 집밥을 사수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음식 까지도 그리스에 와서 더 빨리 만들게 되어버렸습니다.
어제 가족 파티에서 만든 머스터드 소스를 뿌린 훈재 소세지 김밥과 잡채입니다.
특이하게도 깨를 좋아하는 저희 그리스인 친척들을 위해 깨를 듬뿍!
요즘 한국에서도 집밥 탐방하는 예능프로가 일요일 황금 시간대를 차지할 만큼, 바빠진 현대인들이 집밥으로 회기 하려 하는 문화가 형성되고 있는 듯해서 국민 건강을 위해서라도 잘 된 일이란 생각이 들지만, 또 한편으로 이를 위해서라도 한국의 여성 근로 환경이 조금 더 개선되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져봅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저의 '허리케인 샌디 때 미국으로의 여행기 마지막 편'은, 내일 발행됩니다. 기다리시는 분들께 더욱 담백한 글로 찾아 뵐게요~
*독자님들께서 관심을 표하셔서, 그리스 가정식 수프에 관한 포스팅도 곧 찾아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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