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카레를 그렇게 좋아했던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카레나 인도 요리를 좋아하는 것은 막내 동생입니다.
하지만 한국에 사는 동안 한번씩 입맛이 없을 때 카레를 해 먹곤 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채소들을 작게 깍둑 썰어 고기든 햄이든 달달 볶다가 살짝 간을 하고 물에 잘 푼 카레가루를 부어 끓일 때 그 매캐한 향은 이상하게 안정감을 줄 때가 많았으니까요.
어릴 때, 참새처럼 입을 벌리고 밥상에서 기다리던 저희 세 자매의 밥 위에 엄마가 부랴부랴 국자로 카레를 부어 주던 그런 추억에서 오는 안정감인지도 모릅니다.
카레 마니아는 아니었지만 한번씩 먹고 싶을 때, 한국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동네 작은 슈퍼나 편의점을 가더라도 다양하게 골라 쉽게 살 수 있는, 제겐 그런 것이 카레였습니다.
그리스에 이민 와 한동안 한국음식이 먹고 싶어 고생했을 때 일입니다.
미국으로 이민간 모 연예인이 한국 예능 프로에 나와 "고국이 그리울 땐 어떻게 해소하냐?"는 MC의 질문에 "한식당을 찾아 순두부 찌개나 김치 찌개를 먹으며 향수를 달래요." 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정말 부럽다! 남이 해주는 한식을 먹고 향수를 달랠 수 있어서!'라고 생각했을 때였습니다.
그러길 몇 달,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한국 식 재료가 없으면 어떻게든 비슷하게 만들어 보기로 작정했습니다.
만두피, 떡볶이 떡, 두부, 백설기…사 먹기만 하던 것들을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 보는데 어떤 것은 완전 실패, 어떤 것은 그럭저럭 먹을 만 한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이민 후 첫 겨울이 왔고 비가 오기 시작하던 어떤 날, 저는 매캐하고 달콤한 향이 입안에 감도는 카레가 먹고 싶어졌습니다.
얼핏 이곳에서도 닭 요리엔 카레가루를 조금씩 쓰는 경우를 봤던 기억이 났고, 그렇다면 어딘가에 카레가루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카레가루를 넣은 그리스 요리들입니다. 주로 닭고기, 감자, 쌀요리에 사용합니다.
그런데 슈퍼마켓을 이곳 저곳 가보았지만 무슨 후추를 팔 듯 아주 작은 용량의 카레가루 밖에 팔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 정도 양으로 어떻게 한국식 카레를 만들어 먹는다고…' 싶었고, 수소문을 해 향채나 향신료만 전문으로 판다는 가게를 찾아갔습니다.
100년이 넘게 가업을 이어온 그 가게엔 커피를 비롯해 가지 각색의 향신료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큰 통에 담긴 많은 양의 카레가 반가워, 500g을 달라고 주문을 했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약간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카레가루를 많이 사가시다니, 분명 카레를 정말 좋아하는 분이신가 봐요?" 라며 포장을 해 주었습니다.
집에 와 채소들과 고기를 깍둑 썰어 달달 볶으면서 콧노래가 절로 나왔습니다.
"드디어 카레를 먹는구나! 그래 뭐, 어떻게든 비슷하게 해서 먹으면 되는 게 아니겠어?" 라며 신나게 나무 주걱으로 재료들을 볶았습니다.
물을 조금 부어 재료를 잠깐 익히려고 끓이는 동안, 아차! 너무 흥분해서 카레를 따로 안 풀었 두었네 싶어 부랴부랴 사온 카레 가루를 볼에 담아 물에 풀기 시작했는데요.
'카레 잘 먹는 매니저 씨도 있으니까 많이 만들어서 두고 먹어야지' 싶어, 한국에서 파는 카레가루 두 봉지 양인 200g 을 넣어 풀었습니다.
드디어 냄비에 물에 잘 푼 카레가루를 투하했고…온 집안은 매캐하고 알싸한 카레 냄새로 진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드디어 카레를 먹는구나. 이게 얼마만이야! 1년 만인가? 우와~ 행복하다!"
주걱으로 한참 저으며 감자나 당근을 눌러 보니 아주 잘 익었고, 카레는 모양새만으로 이미 완성단계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 한 입 맛만 보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흥분된 마음으로 새 숟가락을 꺼내 내용물을 골고루 얹어 한 입 입에 베어 무는 순간!
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닐거야 그럴리가 없어, 확인이라도 하듯 급하게 내용물을 씹어 삼켜 봤습니다.
그것은….
입 안부터 목구멍, 위장까지. 카레가 지나가는 나의 부드러운 점막들은 타 들어가듯 아파왔고 태어나 처음 맛본 이 강한 매캐함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며 급하게 물을 찾아 들이켜야 했습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왜! 냄새는 분명 카레가 맞는데 어째서 이런 걸까!
그래도 이 요리를 살려 보겠다고 아무리 물타기를 해도 그 강렬한 청양고추 열 개를 한꺼번에 먹은 것 같은 매캐함은 사라지지 않았고 급기야 계속 괜찮은지 맛을 보며 반복해 그 요리를 먹은 탓에 위장이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원래 많이 좋아하지도 않았던 요리 하나 먹어 보겠다고 그렇게 카레가루 파는 가게까지 찾아가 만든 건데, 그게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카레 하나 제대로 된 걸 못 먹나 싶었고, 이민 초기 그간 서러웠던 마음이 폭발해 저는 그만 소파에 주저 앉아 엉엉 큰 소리로 통곡하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하필이면 그 때 퇴근해 집에 왔던 매니저 씨, 저를 보더니 "무슨 일이야? 왜 그러는데?" 놀라 물었고, 꺼이 꺼이 울던 저는 "카레가…카레가…흑흑" 라고 밖에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매니저 씨는 소리 없이 부엌으로 가 냄비 뚜껑을 열고 살짝 카레 맛을 보았고, 다시 조용히 뚜껑을 덮고 물을 꺼내 폭풍 흡입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제게 와서 저를 측은하게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야. 그리스에서 파는 카레는 한국 카레와 달라.
한국에 파는 카레는 카레의 원재료인 강황에 여러 재료를 섞어 상품화 되어 파는 거잖아.
여기서 카레가루를 달라고 하면, 그냥 카레의 원재료인 강황가루를 주는 거야.
그러니 한국 카레가루를 넣을 때 보다 훨씬 적은 양을 넣어야 하고 그 외에도 간을 맞추기 위해
한국 카레가루에 들어간 다른 재료들을 첨가해야 그 비슷한 맛이 날 거야."
한국의 상품화 된 카레의 뒷면에 있는 혼합 재료 설명인데요.
카레분(강황) 10 % !!!
'그렇구나! 그래서 그렇게 슈퍼마켓에서 카레가루를 조금씩 밖에 안 팔았구나!'
'그 향신료 가게 아저씨! 강황가루를 500g이나 사는 내가 얼마나 우스웠을까!'
저는 '그리스에서 판매되는 카레는 순도 100%의 강황가루였다'는 실로 거대한 발견 앞에, 45도 각도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매니저 씨는 그런 제 눈치를 보더니, 다시 달래듯 말했습니다.
"아깝지만 저건 버리자.
저건 너무 매워서 웬만한 맛없는 요리도 먹는다는 배고픈 바깥 고양이나 강아지도 못 먹어…"
배고픈 바깥 고양이도 못 먹는다는 말이 갑자기 너무 웃기고, 제가 한 어이없는 실수나 그런다고 눈물을 흘린 제 꼴이 우스워서 그만 팍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고, 제가 웃기 시작하자 사실은 이 상황에 정말 웃고 싶었던 매니저 씨는 몸을 앞뒤로 흔들며 웃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저는 한국에서 소포를 받을 때 한국식 카레를 부탁해서 요리해서 먹거나, 아님 그리스 카레인 강황가루를 티스푼으로 소량을 넣어 다른 향신료로 간을 맞춰 제대로된 카레를 만들어 먹게 되었습니다.
참, 한국에서 카레를 받을 때는 꼭 순한 맛으로 보내달라는 말을 잊지 않는데요. 그 때의 매캐한 맛 때문에 매운맛 카레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긴 듯 하네요.^^
여러분 맛있는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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