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기막히게 하는
유럽인들의 다림질에 대한 집착
오래 전 인터넷에 다림질에 관련된 한 농담 같은 이야기가 올라와 한국 아줌마들을 후끈 달아오르게 했던 적이 있는데요.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요약하자면, 만약 오전에 갑자기 한 시간 정도가 빈다면 한국 아줌마들은 얼른
친구를 찾아가 커피를 마시고 오고, 독일 아줌마들은 얼른 다림질을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내용보다도 그 아래 댓글 때문에 한국 아줌마들이 열 받아 했었는데요.
철없는 어린 남자들이 쓴 "그래, 집에서 살림이나 하지 수다나 떠냐. 우리나라 커피숍은 아줌마들이 장악했다." 등의 한국 아줌마들을 비하하는 발언 때문이었습니다.
본론을 이야기 하기 전에, 저도 한국 아줌마였기 때문에 잠깐 짚고 넘어가자면, 한국 아줌마들이 짬이 나면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데는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자녀 교육에 대한 정보나 살림 정보는 거의 이런 자투리 시간의 대화를 통해 흘러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간에 수다로 스트레스 해소하면, 도리어 저녁에 가족에게 잔소리도 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든 위의 독일 아줌마가 짬 나면 다림질을 하는 이유가 반드시 '부지런함' 때문만은 아님을 그리스에 와서 살게 되면서야 겨우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른 이유는 바로 유럽인들이 다림질과 천의 주름 자체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신경을 쓰기 때문입니다.
일단 남자든 여자든 옷을 입는 사람들이 이것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그러니 당연히 다림질을 하는 사람들은 더욱 신경이 쓰입니다.
물론 유럽 안에서도 수 많은 나라가 있으므로, 나라마다 다림질에 대한 열정의 정도도 다르고, 개인의 성격마다 다르겠지만 한국에 비해 다림질에 큰 비중을 두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반면 정장을 좋아하고, 겨울이 추운 한국 사람들은 드라이 클리닝을 다른 나라보다 훨씬 더 열심히 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드라이클리닝 가격이 다른 나라에 비해 저렴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잦은 드라이 클리닝으로 수요와 공급이 잘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든 겉으로 봤을 때, 청바지를 즐겨 입고 정장보다는 캐주얼이나 편한 옷을 선호하는 유럽인들의 패션을 본다면
그들이 다림질에 그렇게 까지나 신경을 쓴다는 사실을 미쳐 깨닫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그리스에 수 차례 관광으로 왔을 때는 전혀 알 수 없었던 사실이었습니다.
이 다림질에 대한 예민함을 제일 처음 확인한 것은 제가 그리스로 이사 오고 한 달도 안 되어서였습니다.
시부모님과 매니저 씨, 딸아이와 함께 중세 성곽 쪽으로 산책을 나갔는데, 길이 좁아져 저와 딸아이가 제일 앞에 걷고 매니저 씨가 제 뒤에, 그 뒤에 시부모님이 걷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님께서 정말 작은 소리로 시아버님께 귓속말을 하셨는데, 제 귀는 왜 그럴 때만 소머즈가 되는지 그 말이 다 들려버린 것입니다. --;;(나는 미드 히어로즈에 출연했어야 하는 것인가. 런닝맨 개리처럼 뜬금 능력자인것인가)
"아휴. 올리브나무는 왜 매니저의 티셔츠를 다림질을 안 해서 입혔대? 접힌 자국이 있구만."
저는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게 그 티셔츠는 제가 매니저 씨에게 새로 선물한 초여름용 티셔츠로, 소재가 톡톡해서 주름이 잘 지지도 않을 뿐더러, 빨아서 입으래도 굳이 새 티셔츠를 입겠다고 매니저 씨가 우겨서 새로 산 걸 걸어 두었다가 그냥 입은 것이었습니다. 그 접힌 자국이라는 게, 티셔츠가 샀을 때 진열대에 곱게 접혀 있을 때 생긴 것으로, 티셔츠 등 쪽의 그 자국은 정말 살짝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와이셔츠도 아니고 여름 남방도 아닌, 막 입는 여름 티셔츠를, 그 것도 빨지도 않은 새 티셔츠에 살짝 접힌 자국이 있다고 다림질을 안 했냐는 시어머님의 반응에, 저는 어찌해야 할 줄을 몰랐습니다.
며칠 후 빨래를 해서 빨래 줄에 너는데,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는 빨래 줄에 빨래를 널어 햇볕에 꼭 말려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건조기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건조기를 주로 쓰는 미국에 사는 동생의 동네에도 빨래 줄에 빨래를 너는 집들이 간혹 있는데, 그리스인들과 이탈리아인 이웃이라고 합니다.)
시어머님께서 도와주신다고 같이 빨래를 너시면서, 구겨지지도 않은 딸아이의 여름 민소매 면 티의 프릴 부분을 손으로 자꾸만 쫙쫙 펴시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러시냐고 묻자 이래야 다림질을 안 해도 되지 않겠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그럼 집에서 막 입히는 민소매 면 티를 다려야 한다는거야?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저희 시어머님이 다림질에 유난스러운 거라고, 아이구 외국인 시어머니한테 시집살이 하는구나 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딸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딸아이 단짝 친구의 엄마인 마리아와 친구가 되어 자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전에도 소개했지만 마리아는 국립종합병원 의사입니다. 일주일에 두 번은 당직이라 밤새 일하고 아침에 들어오는 경우도 잦아, 그녀의 집에는 일주일에 한 번 청소를 도와주는 도우미 분께서 오십니다.
그렇게 집안일은 많이 신경 쓰지도 못 할 만큼 바쁜 그녀가 늘 스트레스 받아 하는 집안 일이 있는데, 그게 바로 다림질이었습니다.
교육열도 높아 그 와중에도 애들 학원으로 태우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으면서도 잠시 통화할 일이 생기면 늘 한다는 말이 "나 다림질 중이었어. 올리브나무. 아휴 너무 힘드네" 라든가, 어제 뭐했냐고 묻는 안부인사에 "다림질을 세 시간이나 했어."라는 대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그런 그녀가 너무 이상해서 도대체 무슨 다림질을 그렇게 열심히 하냐고 묻자,
돌아오는 그녀의 대답에 저는 뒤로 자빠질 뻔 했습니다.
"침대보도 다려야 하고, 여름 이불은 잘 구겨져서 다려야 해. 베개 커버도, 식탁보도,
아이들 옷도, 수영복도, 남편 청바지도…"
그리스는 여름엔 날씨가 더워서 평균적으로 침대보를 2~3일 에 한 번씩은 새 걸로 갈아야 합니다.
그걸 빨래만 하는 것도 일인데 그 침대보와 여름 이불을 매번 다려서 구겨지지 않게 접어 넣어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는 해가 워낙 강해서 빨래할 때 요령껏 잘만 말리면 침대보가 구김이 전혀 없이 마르는데,
그걸 또 다린다니...저 엄마가 왜 저러나, 집인데 가족에게 호텔 같은 이불 서비스를 하려는 건가 싶었습니다.
게다가 수영복은 왜 다린다는 건가...저는 정말 그 엄마가 진정 어느 별에서 온 사람인지 외계인의 촉수라도 갖고
있는지 유심히 살펴야했습니다.
저는 또 저 엄마가 다림질에 대한 집착이 유난스러운 거야.. 라고 믿고 싶었습니다.
아이랑 남편 막 티셔츠 다려 입히는 것까지도 힘든데, 저는 그 이상은 도저히 못 하겠다 싶었지요.
그.러.나.
그리스에서 몇 년을 살고 보니,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그리스인들이 다림질에 대해 엄청나게 집착하고 많은 시간을 여기에 투자한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린 것입니다.
심지어 한 가정에 다리미가 용도별로 여러개씩 있는 집도 흔합니다.
(저희 시어머님도 3개나...)
그리고 더 격식을 차리는 독일이나, 특별한 날 접시 무늬와 넵킨 무늬까지 맞춰서 테이블 세팅을 하는 오스트리아의 경우 이 다림질 집착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는 사실도 이곳에 사는 독일인 친구들과 오스트리아인 친척들을 통해 알아버린 것입니다.
(오스트리아 고모님은 저와 자주 매신저로 대화를 하시는데, 마지막 인사 멘트는 늘 이제 다림질을 하러 가야 한다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또 다른 지인의 오스트리아인 가정에서는 아버지와 딸이 싸우는 유일한 이유가 바로 딸이 다림질을 제대로 못해서입니다.--;)
피어싱과 타투를 흔하게 하는 그 자유분방해 보이는 유럽인들에게 이런 면이 있을 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엉엉엉...그냥 모르는 게 나았는데...
사실 한국에 살 때 다림질을 싫어했던 것도 아니고, 중 고등학교 때는 아버지께서 맞벌이로 바쁜 엄마대신 제게 와이셔츠 다림질을 시키셔서 한 번에 서른 장씩 다림질을 하기도 했었던 나름 다림질엔 일가견이 있던 저였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특별한 자리가 아니면, 청바지까지 다려 입고 나가지는 않는 게 보편적 문화인 것 같습니다. 무릎 튀어나온 트레이닝 복을 입고 바로 앞 구멍가게를 간다고 크게 눈치보게 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다림질에 집착증이 강한 그리스에서 무릎 나온 트레이닝 복을 입고 집 앞 가게에 가는 사람들은(특히 여성들은), 이런 문화를 잘 모르는 초기 이민자 이거나 오래 살았더라도 저소득국가에서 와 생활고를 겪는 이민자, 관광객, 혹은 몸이 불편하신 분 뿐입니다.
집 앞 가게를 가더라도 반드시 청바지라도 갈아입고 뭔가를 꾸미고 가는 게 그리스인들이어서, 만약 조금 엉망으로 하고 나가게 되면, 사람들의 눈총을 받거나, 잠옷을 입고 나왔냐는 식의 얘기를 듣게 되기도 합니다.
그냥 평범하고 쿨 해 보이는 그들의 캐쥬얼한 복장 뒤에는 이런 무시무시한 비밀이 숨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어떤 종류든 구겨진 옷을 입는 것도, 구겨진 천을 까는 것도 싫어하는 문화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림질을 덜 해도 되는 요령을 터득했습니다.
그 비밀은 위에도 살짝 밝혔듯이 빨래를 너는 방법에 있습니다.
긴 빨래 줄에 빨래를 어떻게 널어 말리느냐, 빨래 집게를 어떻게 꽂아야 하느냐에 따라 다림질을 덜 해도 되는
빳빳한 옷과 침대시트가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홍홍홍이런 노하우를 자랑하는 제가 정말 어색하군요--;
지금 며칠 전 빨아서 걷어놓은 커튼도 다시 못 달고 있는 이유가, 아직 바빠 다림질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원래 구김도 잘 안가는 소재의 커튼인데도 다림질을 안 하고 그냥 걸어 둘 경우, 그걸 자연스럽다고 여길 사람이 그리스에는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살짝 구겨진 테이블보 위에 컴퓨터를 놓고 글을 쓰고 있는데 이 테이블보가 계속 신경이 쓰이는 걸 보면,
저도 제 그리스인 친구들만큼은 아니어도 그리스인들의 다림질 집착 문화에 어쩔 수 없이 적응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보이는 게 좀 구겨지면 어떤가요.
마음이 맑고 쫙 펴져 즐겁게 살아야지요.
여러분도 오늘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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