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가! 전 세계 어디나
노인 분들의 막무가내 호기심은 똑같다니
최근 2주간 저는 폭풍 건강검진을 받는 중입니다.
한국에서 하던 일이 그러했던 만큼 몸 관리 하나는 철저했던 저였는데, 그리스에 온 이후로 몇 년 동안 변변한 건강검진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를 검사하니 심각한 질병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좋지 않은 소견이 있어, 그 다음 검사, 또 다른 검사를 반복 중에 있습니다.
이러다가 곧 그리스 일반 의사 시스템과 종합병원 시스템에 대해 포스팅을 하게 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떻든 그리스에 와서 모든 서류가 새롭게 만들어지고, 작년에 매니저 씨의 사업자번호가 바뀌면서 사업자 의료
보험을 새로 만들었는데, (그리스는 직장 의료보험과 사업자 의료보험, 두 종류의 의료보험만 존재합니다.) 건강검진을
받다 보니 의료보험증 외에도 AMKA(암카)라는 개인 의료보험 코드가 필요한데 제가 그걸 미처 만들지 못했던 것이지요.
어떻든 모든 구비서류를 챙겨 이 AMKA암카를 만드는 KEP캡이라는 기관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찾은 지점이 노인 분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던 모양입니다.
아침 8시 15분에 도착한 제 뒤로는 다섯 명쯤 되는 노인 분들이 연이어 들어와 대기석에 앉으셨는데,
대략 칠십 대에서 팔십 대 사이로 보이는 그 분들은 저와 서류 담당자의 업무를 3m 뒤에서도 엿들으며 참견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분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상황은 이렇습니다.
그리스에서는 모든 관공서 서류를 작성할 때, 은행 통장을 만들 때, 카드를 만들 때, 공과금 우편물까지도
부모님 성함을 반드시 같이 기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같은 이름이 많기 때문에 만약에 발생할 혼돈을 막기 위해서이지요.
(지난 글 참고: 2013/03/06 - [전체보기] - 100만 명의 ‘야니스’가 존재하는 희한한 그리스)
그런데 부모님 성함을 반드시 영어와 그리스어 두 가지로 적게 되어 있는데, 한국어 발음을 영어로 적을 때 약간의
모음 혼돈이 올 수 있듯이, 한국 이름을 그리스어로 적을 때에는 영어를 그대로 발음 나게 옮겨 적으면 안되고,
본래의 한국 이름의 발음을 기억하면서 적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이 처음이 아니어서 한글 받침도 많은 부모님 성함을 그리스어로 어떻게 기록하는지 늘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이 담당자가 제 말을 너무 못 알아 듣는 것입니다.
제가 아무리 제대로 된 그리스어 표기를 적어 주어도, 영어 표기와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딴 지를 거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그 맞지 않는다는 영어 표기를 읽을 때, 그 담당자는 여러 경우의 수를 두지 않고 자기 맘대로 읽어버렸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담당자에게 인내심을 발휘하며, 영어에서 이런 모음은 이렇게 읽힐 수 있는 사례에 대해 영어 단어를 들어
가며 설명해야 했습니다.
내가 왜! 그 사람 영어 발음 교육까지 시켜야 하냐고!!
그런데 그 담당자는 좀 무안 했던지 제 뒤에서 온 촉각을 곤두세우고 엿듣고 있던 노인 분들에게 동조를 구하며,
"아마 이 분이 그리스어를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라며 되려 제게 이 해프닝의 책임을 전가하려 들었습니다.
저는 발끈해서 "집에 가면 내가 제시한 표기대로 인쇄된 다른 공공기관 서류들이 있다. 필요하면 지금 가서
들고 오겠다." 라고 빠르게 말을 했고,
그녀는 "아니 뭐 그렇게까지 할 건 없고 그냥 이대로 쓰죠, 뭐."라며 입을 다물었습니다.
"진심이냐, 그렇게 의혹이 있으면서 그대로 써도 되겠냐" 라고 제가 되묻자,
"아, AMKA암카는 번호가 중요한 것이지 이 표기는 그렇게 크게 중요하진 않아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니 크게 중요한게 아니면 왜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데!?' 라고 혼자 생각했지만
아침부터 큰 소리 내긴 싫어 넘어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담당자가 맞장구를 쳐주자 호기심이 폭발한 제 뒤의 그리스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아이고, 뭐가 잘 못 된 건가 보네"
"그러게. 중국에서 와서 그리스어를 잘 모르나 봐."
"저봐 저봐, 젊은 여자가 커피 안 마시고 차를 마시고 있네. 저기 봐. 티백 끈 보이지??"
"그래그래. 역시 중국인이야. 건강을 엄청 챙기는 모양이야."
"사업자 의료보험을 갖고 있는 걸 보니, 분명히 중국식당을 하는거야. 어딘지 한번 물어볼까?"
라고 폭풍 수다를 떨기 시작했습니다.
으아…!!!!
최근 기관지가 좋지 않아 그 좋아하는 커피를 당분간 끊은 저는 집에서 녹차를 만들어 갖고 나왔는데, 그 티백 끈까지 유
심히도 보신 것이지요.
도대체 뭔 참견들 이실까, 열 받아 뒤 돌아보니 정말 머리가 새 하얀 호호백발 노인 분들이셔서 차마 뭐라 한 마디
못하고 집으로 그냥 돌아왔습니다.
집에 와서도 기분이 언짢은 게 사라지지 않아 매니저 씨에게 이날 있었던 일에 대해 하소연을 했습니다.
"글쎄 담당자야 그렇다 쳐. 원래 여기 공무원들 그렇잖아. 그런데 그 노인 분들은 뭐냐고. 왜 참견들이시냐고!!!"
그러자 매니저 씨는 편을 들어 주기는커녕 피식 웃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왜 웃어??"
"그게…한국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아주 똑같았거든."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지하철에서 노인 분들하고 마주앉거나, 관공서 같은 데서 마주치면, 늘 나보고 그랬지.
'아이 저 미국인 좀 봐.'
'수염이 많기도 하네. 수염 한번 만져봐도 돼요 총각?' '어머나 눈은 무슨 색이래? 갈색이래? 아닌가?'
'헬로우? 영어하슈?' '워매 팔에 문신도 있어. 무섭네 저 미국인. 무신 깡팬가벼.' 등 등 등."
"그랬어? 한국에 있을 때? 근데 왜 그런 얘기를 한 번도 나한테 안 했던 거야?"
"그게 정확하게 우리 할머니랑 똑같은데 뭘 신경을 써. 원래 나이 드시면 다 그렇잖아. 누가 얘기 들어주면
좋아하고, 관심 가져주길 바라고, 수다에 동참해주길 바라고… 다 그런 거 아니야? 우리도 그렇게 될 걸??"
<83 세이신 매니저 씨의 외할머님과 그 딸인 젊은 제 시어머님>
할머님은 연금을 아껴두셨다가, 증손녀인 딸아이를 볼 때마다 10유로씩 용돈을 주시고,
다 큰 손자손녀인 매니저 씨와 시누이에게도 여전히 명절이면 용돈을 주십니다.
매니저 씨의 정말 쿨한 반응에, 갑자기 저는 열 냈던 제 모습이 급 부끄러워져서 입을 꾹 다물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도 그러셨었고, 지금 저희 아버지도 한 말 또하고 그러신데 말이지요.
그냥 가족에 대해서나 가까운 지인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는 일들이, 남이라고 생각하니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나 보다 싶었습니다.
출장갈 때마다 미국에서도 늘 처음 보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장소불문 제게 많은 수다를 늘어 놓으셔서
아....나는 미국 노인 분들이 좋아하는 얼굴인 건가… 한 때 고민에 빠졌던 적이 있었는데
이제 보니 전 세계 노인 분들은 다들 비슷하구나 싶습니다.
늙어서도 서로 수다 떨며 이렇게 잘 지내자고, 매니저 씨와 급 훈훈하게 대화를 마무리 하면서
이제는 노인 분들의 이런 지나친 관심들로 기분 나빠하지는 말자고 다짐하게 되는 하루였답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호기심 만발한 수다스런 노인 분들과 만나게 될 때,
보통 어떤 반응을 보이시나요?
오늘도 건강하고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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