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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에서

살짝 정신 줄 놓게 했던 아테네에서의 사흘 - 미국 허리케인 Sandy로, 국제 떠돌이 가족이 되다.2

by 꿋꿋한올리브나무 2013. 10. 28.

 

 

아테네 베니젤로스 공항에서 셔틀 버스를 타고 40분을 달려 호텔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였습니다.

호텔 식당이 열리려면 두 시간이나 남은 상태였는데, 그러고 보니 우리는 공항에서 긴장상태로 대기하느라 새벽에 로도스 공항에서 파이를 먹은 뒤로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다행히 호텔 건너편 카페에서 샌드위치를 팔았고 따뜻한 커피와 함께 호텔방에 앉아 먹으며, 이 갑자기 주어진 2박 3일 동안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예정대로 미국에 도착했다면, 저희는 천천히 결혼식 준비를 돕기도 하고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과 밀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주어진 아테네에서의 2박3일은 당황스럽기 이를 데가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미국 행 때문에 딸아이는 학교를 2주간 결석처리 해야 했습니다.

저와 남편 매니저 씨는 2주간 일을 할 수 없기에 많은 일을 미리 처리해야 했습니다.

 

남들은 모두 학교를 가는 평일, 딸아이는 학교를 가지 않고 그렇다고 목적지인 미국에 있는 것도 아니니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 같았습니다.

갑자기 메고 왔던 가방에서, 미국 가서 사촌들 보여주겠다던 그리스어 교과서와 공책을 꺼내 막 공부를 하기 시작하는 게 아니겠어요!!

헉너...뭐하냐??? 괜찮은 거야? 어디 아픈 건 아니겠지???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은 남편도 마찬가지였는데요.

아직 그리스 내에 있으니 시아버님과 가게 직원들은 계속 업무를 묻는 전화를 해왔고, 전화로 상황을 대처하면서도 미국에 있는 것도 아닌데 정작 일을 할 수는 없는 상황에 놓이자, 불안한지 방안을 계속 서성거렸습니다.

저는?

한국에 살 때부터 그간 아테네를 관광으로 혹은 일 때문에 수십 번은 다녀 갔는데, 이렇게 할 일 없이 머물게 된 것은 처음이라서 멍하기만 했습니다.

 

갑자기 외부 업무와 가사노동에서 해방된 한가한 시간이 주어지니 얼마나 무료하고 뭘 해야 좋을지 몰랐던지, 침대에 누워 호텔방에 비치된 이런 책을 읽었답니다...

 

전국의 박물관에 대한 안내서였는데, 그리스어와 위주로 쓰여 있는 책이라 재미있을리 만무했어요... 

엉엉

 

어영부영 저녁 시간이 되었고, 식당에 내려간 딸아이는 갑자기 배고픔이 몰려왔는지, 포크로 음식을 먹다 말고 답답한지 손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요.

헉너... 왜 이래? 아테네 오더니 이상해졌어? 아까는 시키지도 않은 공부를 막 하더니,

이젠 손으로 음식을 먹는 거야?? 인간은 도구를 사용할 수 있도록 지음 받았다고!!

접시가 미어지게 담아 왔구만 이걸 다 손으로 먹으려는 거야???!!!

결국...배가 볼록할 만큼 밥을 먹은 딸아이와 매니저 씨는 호텔 주변을 산책하자며 밖을 나갔습니다.

해가진 아테네 외곽의 도로는 스산하기 그지 없었는데요.

그런데 딸아이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습니다!

"엄마! 방송국! 방송국이야! 방송국 A 알파야!"

정말 거기엔 그리스 방송국 A가 있었는데요.

 

딸아이는 한국에서 KBS견학을 할 때 흥분했던 것만큼, 갑자기 정신 줄을 놓고 방송국으로 가자고 제 팔을 이끌기 시작했습니다.

"가서 뭐 하려고!"

"엄마! 밤이어도 방송은 하잖아! 구경할 수 있을 거야!"

"누가…너를 구경 시켜 준대???? 정신 차려. 얘야…"

"…그런 거야? 아무 때나 갈 수 없는 거야?"

슬퍼2

 아...정말...내일 아침 맛있는 뷔페식이 또 기다리고 있으니 얼른 자러 가자고 아이를 겨우 달래 호텔방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그러나 뻔히 아는 아테네 구경을 하고 싶지는 않은 우리 가족이 더 정신 줄을 놓고 이상해진 것은 그 다음날이었습니다.

매니저 씨는 그 동안 못 잔 잠을 몰아 자려는 듯, 아침 밥을 먹자 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둘은 뭘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어차피 공짜이니 호텔 시설을 이용해 주기로 작정하고 수영장과 헬스클럽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이 사진들을 기억하시지요? 어쩐지 리듬체조를 하는 장소 같지 않다고 여긴 분 안 계시나요?

그렇습니다. 바로 여기는 그때 아테네의 호텔에 있던 헬스클럽입니다.

넓은 장소에 비수기라 아무도 이용객이 없던 헬스클럽에서 우와! 라고 감탄사를 내뱉은 딸아이는 저렇게 자신이 아는 모든 동작을 선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그냥 위에 보이는 트레드밀(런닝머신) 위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는데요.

맞은 편 천장에 붙은 TV에서는 연신 뉴욕과 뉴저지 허리케인 샌디 상황을 보고 하고 있었고, 잊고 있었던 미국 가족에 대한 걱정이 갑자기 몰려오며 저는 그저 TV를 멍하니 쳐다보며 걷기를 계속했습니다.

창문 밖으론 부슬부슬 비가 오기 시작했고…

저는 그냥 걸었습니다. 걷고, 또 걷고, 아무 의무도 책임도 주어지지 않은 이 하루, 뒷일을 걱정하지 않고 시계를 보지 않고 그냥 걸었습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착각이 들었고 몸의 감각이 다 무뎌져 제가 걷고 있다는 사실 조차 잊은 채 TV속 허리케인 피해 상황을 보도하는 앵커의 목소리만 남았습니다.

"엄마!"

꺅

깜짝 놀라도록 큰 소리로 저를 부르는 딸아이 목소리에 저는 급하게 멈추었고, 몸에 걸고 있던 집게 때문에 기계는 저절로 멈췄습니다.

뒷걸음질 치며 기계에서 내려오는데 저는 그만 휘청~하며 마루바닥에 주저 앉아 버렸는데요.

저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어보니, 목욕가운을 입은 연세 지긋한 여성이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괜찮은 거에요?" 라고 묻는 게 아니겠어요?

 "아…네. 근데 누구세요?"

그녀는 고개를 까딱 하며 눈으로 맞은 편을 가리키며 "수영하러 왔다가, 당신이 너무 오래 달리고 있어서 걱정이 돼서 쳐다봤어요." 라고 했습니다.

"제, 제가요?"

"그래요. 무슨 스토리가 있는지 모르지만, 당신은 두 시간 넘게 그 기계 위를 걷고 있었어요. 시계도 안 본 거에요? 다리가 아프지 않던가요?"

스토리…라는 단어를 들으며 그제서야 그녀가 영어로 제게 질문을 해 왔고 그리스인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습니다.

헉"두 시간이요?????!!!!!"

 

버젓이 TV옆에 바로 걸려 있던 벽 시계는 이미 한 낮을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황급히 딸아이를 보며, "미안해. 딸…근데 넌 그 동안 뭘 한 거야?"

"엄마….나도 스트레칭을 너무 많이 했나 봐. 몸이 막 아파…"

"어머, 미안해. 엄마가 제 정신이 아니었나 봐. 이렇게 아무 것도 안 해도 되고 아무도 우리 집에 찾아 오지 않는 느슨한 하루가 그리스에 이사온 후로는 처음이었나 봐. 순간 정신을 놓아 버렸어… 참, 아빠는 어떻게 되었을까? 얼른 올라가 보자."

딸아이를 챙겨 방으로 올라오니, 매니저 씨는 아직도 자고 있었습니다.

밥 먹고 자라고 아무리 깨워도 그는 마치 체체 파리에라도 물려 수면병에 걸린 사람처럼, 계속 잠에 빠져든다며 눈 조차 뜨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럴까 싶어 그냥 두고 저희끼리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딸아이와 저는 무엇을 했을까요?

저희는 뭐에 홀린 듯, 또 다시 헬스클럽을 찾았고, 또 다시 딸아이는 체조를 하고, 저는 트레드밀 위를 걷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평소에 이렇게 열심히 운동을 하거나 운동을 즐기는 성향도 아닌데, 게다가 한번 앉으면 몇 시간이고 앉아 있을 수 있는 무거운 엉덩이를 갖고 있는 편인데, 우리 모녀는 마치 모녀 체조단이라도 된 것처럼 체조와 걷기를 반복하며 그날 밤 헬스클럽이 문을 닫을 때까지 그 곳에 있었습니다.

 

 

거의 이런 모녀 모습이 될 뻔 했어요...

ㅋㅋㅋ

매니저 씨는? 다음 날 아침까지 거의 24시간을 계속 잤습니다.

그 동안 매니저 씨가 이렇게까지 잠을 길게 자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저로서는 중간 중간 일어나 숨을 잘 쉬고 있나 확인을 해야 할 지경이었는데요.

 결국 다음 날 아침 폭풍 식사를 하고 호랑이 기운이 넘친 매니저 씨는 갑자기 아테네에 살 때 알던 친구들, 거래처 친구들이란 친구들은 다 전화를 돌린 후 한 친구 부부와 약속을 잡았고 마지막 날 시내에서 그 부부를 만나 융숭한 대접을 받고 다시 공항으로 출발했습니다.

 

물론 정신 줄이 아직 잡히지 않은 저와 딸아이는 이 보통의 아테네 골목에서, 몇 번이나 이전에 가봤던 골목에서,

평소 인간 네비 라는 말을 듣는 제가.......길을 잃고... 나는 누구인가, 여긴 또 어디인가

두 시간을 뱅글뱅글 같은 곳을 도는, 이상한 짓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엉엉버뮤다 삼각 지대인줄 알았어요ㅠㅠ

 

매니저 씨는 말합니다. 성인이 된 이후로 평생 그렇게 뒷일을 걱정 안 하고 오래 자 본적은 처음이라고, 아마 앞으로도 그러긴 쉽지 않을 거라고. (휴일이어도 늘 가족 모임이 있는 그리스이니까요.)

딸아이는 오늘도 묻습니다. 다시 아테네에 가서 그렇게 하루 종일 체조만 하고 맛있는 거 먹을 수는 없는 거냐고.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수영복도 꼭 챙겨 수영장도 이용하고 싶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스에 사는 나에게 휴가란, 멋진 풍경이나 신나는 파티가 아닌 그저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가사 노동과 몰려드는 가족들에게서 벗어난 어떤 사흘이면 충분하다고.

 

아테네에서 우리 가족은 특별한 관광을 하거나 환상적으로 좋았던 것도 없었고, 갑자기 주어진 휴가에 몹시 긴장했다가 셋이 동시에 긴장의 끈과 정신 줄을 놓았고, 그래서 도리어 정말 행복했었다고 그 시간을 회고합니다.

왜냐하면, 아테네에서의 사흘은, 이후 몸과 정신이 혹사되었던 취리히와 런던에서의 고생스러웠던 나흘을 위한 태풍의 눈과 같았던 평화였으니까요.

길바닥에 쪼그려 앉아 눈물을 펑펑 쏟았다가, 또 미친 듯 웃으며 뛰어다니는 사건이 이어졌었던 그 나흘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는, 내일 다시 이어집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좋은하루

 

* 어제 부로 그리스와 한국은 일곱 시간의 시차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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