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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에서

하와이에서 물미역과 혼연일체가 되었던 나의 과거

by 꿋꿋한올리브나무 2013. 11. 23.

 

하와이에 계시는 독자님께서 고마운 댓글을 남기셔서 어제 답글을 쓰는데, 불현듯 오래 전 하와이에서의 일이 떠올랐습니다.

이제 애독자님들이시라면, 제가 웃픈(웃기고도 슬픈) 사건들을 다수 겪었다는 것을 아실 듯 한데요.

이때의 일도 그런 사건의 패턴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사건이었습니다.

 

때는 2002년 겨울, 제 일생에 기적처럼 하와이에 갈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어찌어찌 큰 돈 들이지 않고 갈 수 있었던 기회라 덥석 가기로 결정하긴 했는데, 당시의 제 모습이 사실 하와이에 휴양을 하기에 적합한 모습이 아니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당시 저는 하던 일에서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고, 가까운 인간관계에서 역시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땐 스트레스를 받으면 밥 종류의 탄수화물이나 매운 음식을 아무 생각 없이 입에 물고 있을 때가 많아, 아주 아줌마인 지금보다도 더 많이 나가는 인생 최대 몸무게를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건장함으로 하와이라는 좋은 휴양지를 가기엔 좀 창피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일에 몰입하겠다고 머리카락은 짧은 커트에 이상한 염색 상태였고, '내 인생에 다시 하와이를 갈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라면서도 예쁜 원피스 따위가 어울릴 리 없는 상태라 그저 짐 속에 반팔이란 반팔은 다 챙겨 넣었습니다.

 

 

호놀룰루 공항에 내려 여행사에서 나온 분들이 준 꽃 목걸이를 하고 드디어 호텔에 도착했고…

전용비치가 있던 그 멋진 호텔에서, 분명 단체일행도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루 이틀이 지나니 전 몹시 심각한 심리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다음 해 상반기까지 반드시 성공적으로 끝내야 하는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었고, 문제가 되었던 인간관계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음식은 왜 이렇게 맛있던지 먹긴 잘 먹었는데, 낮엔 일반 관광 일정을 따르고 싶은 의욕이 전혀 없어-나무 타는 묘기를 선보이는 원주민 아저씨를 보고 싶지도 않았고, 파인애플 농장 미로에서 길 찾기를 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해변에 남아 책을 읽거나 시내를 혼자 걸어 다녔고, 밤이 되면 이런 고민들로 잠을 이룰 수가 없어 뜬 눈으로 지새는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날, 오늘은 좀 멀리 나가 유명하다는 쇼핑몰에라도 가서 구경이라도 해서 하와이에서의 추억을 만들자 다짐하여 버스를 타고 홀로 쇼핑몰에 도착했는데, 한 커다란 가게를 구석구석 구경하던 중 일본인 가게 주인 부부가 저에게 다가와 일본어로 계속 상품 설명을 하는 게 아니겠어요?!

말을 어느 대목에서 끊어야 할지 몰라 멍하니 듣다가 간신히 영어로 "난 일본인이 아닌데요." 라고 말하자 그 부부는 깜짝 놀라며 미안하다고 금새 영어로 다시 설명을 했고, 나중에 작은 기념품을 계산하려는데 미안하다면서도 미심쩍은 듯, 정말 일본인이 아니냐고 거듭 물어서 아니라고 다시 말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쇼핑몰을 빠져 나오는데 유리창에 비친 커트에 동그란 얼굴 짧은 반바지에 튼실한 체구의 내 모습을 보는데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고 한번 든 의구심은 제 머리 속에서 빠져나가질 않았습니다.

  의구심은…

'혹시 그 일본인 부부가 나를 일본 헤비급 여자 유도 선수나 스모 선수로 본 건 아니겠지? 설마 내가 그렇게나 뚱뚱한 건 아니니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닐 거야. 그런데 여자 스모가 있던가? 아냐. 난 본 적 없어. 그렇지만 이 기분 나쁜 느낌은 뭐지. 뭐지?! 왜 나를 일본인으로 본 걸까.'

 

그러나...나중에 찾아보니 여자 스모선수도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스트레스를 받아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는데 이 일본인 부부를 통해 생긴 오해는 더 불길한 기분만 남겨주었고, 그날 밤 아무리 호텔에서 자려해도 잠을 잘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결국 새벽 세 시까지 뒤척이다 도저히 견디지 못해 호텔방을 빠져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고, 뭐에 이끌리듯 해변으로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늦은 밤이라 해변엔 아무도 없었는데요. 고운 모래가 발에 감기는데 어? 밤인데도 모래가 따뜻했습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바닷물에 발을 담그는데 낮 동안 따뜻했던 바닷물은 여전히 차갑지 않았습니다.

바닷물 속으로 한 발 두 발…자려고 입고 있었던 실내용 반바지와 곰돌이가 그려진 흰 티셔츠를 입은 채 허리 깊이까지 들어갔습니다.

물은 따뜻하게 저를 감싸주었고, 저는 주저 없이 몸에 힘을 빼고 바닷물 위에 누웠습니다.

귀가 물 속에 잠기고 몸은 둥실둥실 잔잔한 파도에 흔들렸고, 하늘엔 엄청난 별들이 제 얼굴로 쏟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눈물이 흘렀습니다… 힘들었던 일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가 바닷물과 별들 사이로 사라졌습니다.

눈을 감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했습니다….

그렇게 삼십 분쯤 시간이 흘렀을까요?

불현듯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지금 얼마나 깊은 곳에 누워있는 걸까. 아까는 허리 깊이였는데 지금은 얼마나 깊은 곳이지?' 도저히 가늠이 안 되었지만, 갑자기 물위에 떠있던 상태에서 몸을 일으켜 바다 속 바닥을 확인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고개를 살짝 돌려 호텔 불빛들을 보니 아주 깊이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 그렇게 '바다에 누운 채로' 좀 더 해변에 가까이 있어야겠다고 한 팔을 휘적거리며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요.

그렇게 하니 마음은 다시 안심이 되었고, 이 바다에 나의 모든 스트레스를 날려버리자 결심하며, 십 분 정도 더 여러 가지를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한결 마음이 가벼워져 기분이 좋아지기까지 한 그 순간!

갑자기 등에 어떤 것이 물컹 닫는 기분이 들어 소스라치게 놀라 꺅 하며 비명을 질렀는데요.

바다 속에 있던 뭔가가 불쑥 올라오는 그 불쾌한 기분 때문에 감히 무서워서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눈동자만 양 옆으로 왔다 갔다 재빠르게 굴리고 있는데, 바로 그떄!

다시 철썩이는 파도와 함께 몸이 오른쪽으로 밀리더니 이젠 오른 팔에 물컹한 뭔가 닿는 감촉이 느껴지는 게 아니겠어요?!

'어머나…이게 뭘까…고래인가? 아냐. 그럼 상어? 아니 아니 이렇게 물컹하진 않을 거야. 그렇다면 이게 뭐야? 바다사자라도 되나???'

?? 

다시 철썩이는 파도에 제 몸이 오른쪽으로 확 쏠리는데, 그때 저는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이 물컹한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말이지요.

그것은…

다름이 아닌…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알 수 없는 물미역 같은 해초였습니다.

그런데 그 해초가 제 몸에 닿은 이유가 더 가관이었는데요.

그것이…

제가 깊은 곳에서 벗어나려고 팔을 휘적거린 탓에 파도에 밀려 제 누워있던 몸이 그냥 모래 해변에 도달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누운 채로 해변 위에 있던 해초에 안착하게 된 것입니다....

얼음2창피해, 창피해, 창피해, 창피해, 창피해.....

 

그걸 깨닫는 순간 벌떡 일어날 수 없었던 것은, 주변에 혹시라도 누가 있을까 싶어서였는데 옷을 입은 채로 들어갔다 나온 덩치가 우람한 저를 구경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냅다 호텔 안으로 줄행랑을 칠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몸을 살짝 비틀어 재빨리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확인했고, 다행히 아무도 없어 LTE 속도로 호텔로 뛰어들어갔습니다.

물론 엘리베이터 안에서 낮에 잠깐 보았던 현지인 가이드와 마주쳐, 거의 그를 기절시킬 만큼 놀라게 했지만(다음날 그가 놀란 이유를 밝혔는데 웬 미친 여자가 자기에게 뛰어들어오는 줄 알았다고….ㅠㅠ) 아는 일행과 마주치지 않고 무사히 방으로 돌아와 샤워하고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었습니다.

 

다음 날 상쾌하고 날아갈 듯 좋은 기분으로 아침을 먹으러 갔는데, 조식뷔페에서 일행이었던 한 동료와 마주쳐 합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한국에 돌아가면 다이어트부터 해야겠다. 스트레스 받는다고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마음 속으로 룰루랄라 하며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던 저에게, 그 동료는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습니다.

 

"저기…올리브나무 씨, 어제 밤에 혹시 바다에서 수영했어요?"

 

헉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고 철썩 같이 믿었던 저는 너무 놀라서 순간 대답도 못하고 멍하니 그를 쳐다보기만 했는데요.

그의 다음 말이, 저를 엄청나게 좌절시키고야 말았습니다.

"…..사실 제가 어제 밤에 잠이 안 와 호텔 정원을 산책 중에 있었는데, 저 멀리 바닷가에서 하얗고 큰 물체가 검은 물미역을 뒤집어 쓰고 움직이는 게 아니겠어요? 너무 놀라 혹시 흰 바다사자인가? 그런 게 하와이에, 그것도 시내와 가까운 바다에 있다는 말을 가이드가 안 해줬는데 저게 뭘까 싶어 무서웠지만, 그냥 가까이 가보았어요…..

근데 바닷가에서 한 2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다다르자, 알겠더라고요. 흰 바다사자가 아니라 곰돌이 그려진 흰 티셔츠를 입은 올리브나무 씨가 물미역을 뒤집어 쓴 채 눈동자를 좌우로 막 굴리며 모래 위에 일시 정지 상태로 누워있는 거였다는 것을요... 도대체... 왜 그러고 있었던 거에요?"

 

대략 이런 느낌이었다고?!

<작가 양쿠라의 작품 '길을 걷다' - 도시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바다사자 이미지를 형상화했다네요.>

 

헉 

 

"그, 그, 그게…..그러니까…그게…..전, 이만 일어날게요."

 

 

저는 그렇게 그 동료를 그 자리에서 외면하였고, 한국으로 돌아와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 동료를 피해 다녀야 했습니다….

엉엉

결국…..1년 후 다이어트에 성공하였고…..겨우 흰 바다사자를 연상시키는 이미지에서 벗어난 후에야 그 동료와 인사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제가 하와이에서 찍은 사진 중 유일하게 현재까지 남아 있는 사진입니다.

 

예상대로 그 후 단 한번도 다시 하와이에 갈 기회가 없었지만, 저는 지금도 가끔 생각합니다.

비록 동료를 공포스럽게 했을 만큼 엄청난 비주얼을 선사한 밤이었지만, 제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준 감사한 하와이에서의 밤이었다고요.

 

여러분 행복한 토요일 되세요!

좋은하루

 

*저의 웃픈 이야기에 간혹 웃어서 미안하다고 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맘껏 웃으시라고 쓴 글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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