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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에서

그리스인 남편 덕에 엄청 특이해진 어느 크리스마스 휴가

by 꿋꿋한올리브나무 2013. 12. 24.

 

 

 

몇 년 전 크리스마스 때 오스트리아 고모님 댁으로 휴가를 갔을 때, 저는 나름 기대했던 일들이 있습니다. 

비엔나 벨베데레 갤러리 걸린 클림트의 대표작 '키스'를 보러 가고 싶었습니다. 클림트의 다른 대표작들은 볼 기회가 있었는데, 이 작품만은 직접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비엔나 벨베데레 겔러리에서 클림트의 키스를 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진출처-thecreativefeeling,com>

 

아니면 모차르트의 흔적을 따라가거나, 학생들이 하는 연주회라도 좋으니 음악의 도시에서 열리는 클래식 음악의 연주회를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스에도 전국적으로 클래식 연주회나 특별 작가 초대전이 큰 겔러리에서 열릴 때가 많지만, 그리스는 역사적 특성상 고대 유물에 관한 전시회나 다양한 극장 연을 볼 기회가 훨씬 더 많기에, 이왕 음악과 예술의 도시 비엔나로 휴가를 가는데 이런 문화적 혜택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언젠가 오스트리아를 여행하게 된다면 꼭 이루고 싶었던 저의 오랜 꿈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저는 그 짧은 크리스마스 휴가 1주일 동안 이 오랜 꿈 중 어느 하나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엉엉

이유는 바로, 매니저 씨에게 벌어진 일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하던 일 때문에 나름 다양한 질병에 대해 공부해 왔었는데요. 그리스에 와서 느낀 것은 나라마다 기후에 따라, 이 나라에는 없는 질병이 다른 나라에는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에 온 후 한국에서는 본 적이 별로 없는 질병 종류를 접하게 되었는데요.

그 중 하나가 바로 겨울 피부병입니다. 습한 겨울 날씨에 생기는 질병인 것입니다. 

(몹시 습하게 추운 겨울 날씨인 지중해성 기후는, 지병이 있던 사람들의 건강을 더 악화시키는 역할을 하곤 해, 겨울이면 여기 저기에서 장례식 소식이 들리곤 합니다.)

 태어나 처음 보는 종류의 피부병들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생기는 것을 보았는데, 그렇다고 심각한 정도는 아니라서 각 개인이 나름의 처방 또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분명 저희가 오스트리아로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매니저 씨에겐 아무 겨울 피부병에 대한 증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에 도착하고 하루가 지나자 갑자기 엉덩이에 엄지 손톱만한 종기가 난 것입니다.

그리스의 습한 겨울에 있다가 갑자기 오스트리아의 건조한 겨울로 옮겨왔으니, 이 달라진 날씨와 그간 과로가 겹쳐 이런 이상한 종기가 튀어나온 것입니다.

나중에 의사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런 류의 종기엔 술은 절대 피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당시엔 몰랐던 매니저 씨와 고모님은 오랜만에 만난 회포를 풀며, 매일 밤 둘이 앉아 옛 이야길 나누며 내내 와인을 마셨던 것입니다. 고모님 댁에서 가까운 곳에 좋은 와이너리가 있어 직접 사온 와인을 이 두 사람은 밤마다 좀 과하다 싶게 마셨고, 저는 옆에서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하느라 나중엔 4~5잔 이상의 커피를 마시게 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술을 마셔 대니, 매니저 씨 엉덩이의 종기는 오스트리아 방문 사흘 째가 되자 엄청난 크기로 부풀어 올랐고, 매니저 씨는 도저히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올리브나무, 나 어떻게 하지? 앉을 수도 설 수도 없어. 너무 아파..."

"어휴. 그러게 어쩌냐."

 

결국 고모님이 사다 주신 특수 연고를 바르며, 나아지길 바랄 수 밖에 없었는데요.

이 종기 때문에 긴 외출을 할 수는 없으니 근처 시내 구경만 잠깐씩 하고, 가까운 고모님 친구분 댁들을 순회하게 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 시내

 

 

그런데 그곳에서 조차 매니저 씨는 앉지도 서지도 못했기에, 어느 집에 가나 엉거주춤한 자세로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이 종기가 터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고모님 부부의 친구 중 쿠트 씨 댁에 갔을 때였는데요.

쿠트 씨는 로도스에 고모님 부부와 함께 여행 왔을 때 저희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한 적도 있었기에 특별히 저희를 잘 대접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게 눈이 휘둥그레 지도록 아름답게 꾸며진 집을 갖고 있었습니다.

 비엔나 근교의 쿠트 씨의 집

 

 

그런데 만찬을 대접 받은 후 지하를 구경시켜주겠다고 해서 내려간 곳엔, 일반 가게라고 해도 믿을 만한 각종 술과 조명, 음향 시설을 갖춘 바Bar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쿠트 씨와 고모님의 또 다른 친구 트루디 (어렸던 마리아나도 있네요.)

 

 

 

이를 본 매니저 씨는 엉덩이의 부풀어 오른 종기도 잠시 잊은 채, 쿠트 씨와 함께 춤을 추며 부어라 마셔라 이성을 잃기 시작했는데요.

저와 가족들이 아무리 말려도 이 둘을 말릴 수가 없을 만큼, 둘은 신이 나서 술을 마시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이런 바Bar엔 좀 어울리지 않은 음악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해 '빈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한 왈츠 곡이 흐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고모님은 여기까지 와서 남편의 종기 때문에 휴가를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는 제가 좀 안 돼 보인다며 특별히 이런 음악을 부탁하셨다고 했습니다.

엉엉 감사해요...

 

제가 음악 감상에 젖은 것도 잠시, 제 눈앞엔 더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는데요.

그 누가 봐도 바Bar인 곳에서, 아무리 클래식 왈츠 곡이 나온다고는 하나, 그 곳에 초대되었던 오스트리아인 부부나 커플들이 일제히 청바지 등 일상 옷차림으로, 멋지게 왈츠를 추기 시작하는 게 아니겠어요!!!

 

 
당시 제가 찍은 동영상인데, 실내 조명이 너무 어두워 왈츠를 추는 실루엣 밖에 안 보이지만,
분위기를 함께 느껴보았으면 해서 올렸습니다.
 
 
 

세상에나...그건 정말 대단한 장면이었습니다.

마치 그리스인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배워 어디에 가나 전통춤을 자연스럽게 출 수 있듯이, 오스트리아인들은 어디에서 어떤 복장으로도 왈츠를 추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크리스마스나 신년을 맞이하는 순간, 젊은이들끼리 파티를 벌이다가도 갑자기 왈츠를 추곤 하는데요. 저희 집에 놀러왔던 오스트리아인들이, 신년 파티 때 해피 뉴이어라고 말하자마자 음악도 없는데 왈츠를 추는 모습을 목격하고 저는 또 한번 깜짝 놀랐던 적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오스트리아인들의 때아닌 왈츠를 멋있게 추는 모습에 넋 놓고 있던 제 앞으로, 갑자기 딸아이를 안은 매니저 씨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춤을 추고 싶었던 매니저 씨는, 딸아이를 서커스처럼 돌려대며 나름의 왈츠를 딸아이와 추기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딸아이를 내려 놓고, 갑자기 집 주인 쿠트 씨를 데리고 와 함께 왈츠를 추기 시작했습니다.

덩치가 산만한 남자 둘이, 취할 대로 취해 추는 왈츠는...참으로 가관이었는데요.  

이 둘은 바의 술을 종류대로 마셔 보느라 정말 많이 취한 상태였고, 그러나 왈츠를 춰야겠다는 일념에 불타올랐던 것입니다.

ㅋㅋㅋ

그러다 출만큼 추었는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왈츠를 추다 바닥에 주저 앉아 서로의 우정을 다짐하며 30년 전 잃어버린 형제라도 만난 듯 애틋해했습니다.

 

 

서로 헤어지지 않겠다고 주정들을 너무 해서, 고모님이 거의 매니저 씨를 다섯 살 남자애 다루듯 야단쳐서야 이 둘을 떼어 놓을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날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 매니저 씨의 종기는 터졌고, 엄청난 양의 피를 쏟을 만큼 상처가 정말 커서 침대에 엎드려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저는 졸지에, 매니저 씨 덕에 남은 오스트리아에서의 크리스마스 휴가를 병수발로 다 보내야 했답니다.

OTL (김탄 버전으로) 나, 너 때려 주고 싶냐?  

 

며칠 전, 오스트리아 사촌 마사의 남자 친구인 스테르고스가 비엔나로 휴가를 보내러 떠났습니다.

그 편에 고모님 가족에게 작은 선물을 보내며 고모님께 문자를 했더니, 고모님은 저에게 이런 답장을 남기셨습니다.

"너네 세 가족이 여기에 다시 오는 게, 내겐 가장 큰 선물인데 말이야. 특히 올리브나무, 넌 꼭 와야 해. 물론 한국 음식도 먹고 싶지만, 그 보다는 니가 그 때 여기서 철 없는 매니저 병수발만 하다가 돌아간 게 너무 안타까워 꼭 좋은 곳을 다시 구경시켜주고 싶단 말이야. 도대체 언제 다시 올 건데?"

 

저는 언제 다시 갈 여건이 될지 전혀 알 수 없었고 당분간은 정말 어렵겠다 싶어, 그냥 하트와 웃는 이모티콘을 잔뜩 보내는 것으로 답했는데요.

 

사실 당시 고모님 댁에서의 크리스마스 휴가는 비록 병수발로 다 보냈었지만, 거기엔 고모님이 제게 주신 다른 큰 선물이 있었습니다. 

 

당시 고모님은 저희가 머무는 동안 별채처럼 되어 있는 2층 전체를 내주셨었는데, 2층에 따로 마련 된 부엌과 거실을 안내하시며 제게 혼자서 쉬며 시간을 좀 보내라고 하셨고, 당신 집임에도 불구하고 올라오실 때 2층 문 앞에서 노크를 하고 올라오실 만큼 제 공간과 시간을 배려해주셨습니다.

덕분에 갑자기 병수발로 집에만 있게 된 저는, 정원이 보이는 부엌에 앉아 이런 저런 생각도 하고 2층 거실에서 방해 받지 않고 피아노도 치며, 병수발 중간중간 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가족으로 늘 북적거리는 그리스에서 살다 정말 귀한 휴가를 얻은 것입니다. 고모님의 그런 배려로 얻은 저만의 시간과 공간은, 클림트의 작품이나 어떤 멋진 오케스트라를 보는 것보다도 더 값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매니저 씨의 그 이상한 종기가 터졌던 것에 대해, 도리어 감사하고 있습니다.

아마 당분간은 다시 오스트리아에 휴가를 갈 상황이 오지 않을 테고, 그렇게나 며칠 동안 혼자 조용한 시간을 갖긴 어려울 것 같으니까요.

 

 

여러분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세요!

좋은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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