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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에서

911테러 때 내가 미국에서 겪은 이상한 난민 생활 1

by 꿋꿋한올리브나무 2013. 9. 11.

 

 

 

2001년 9월 11일, 제 인생에는 또 하나의 기묘한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 날은 약 스물 다섯 명 정도의 동료들과 열흘 가까이 미국 여러 곳을 돌며 세미나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려던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버스가 시카고 오해어 공항(Chicago Ohare Airport)에 거의 도착했을 때쯤, 운전 기사는 갑자기 라디오 볼륨을 높였고 여성 앵커의 울먹이는 속보가 버스 전체에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비행기 납치, 뉴욕 세계 무역 센터, 빌딩 붕괴, 폭발 등의 단어가 끊어지듯 들렸고 버스는 공항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갓길에 주차되었습니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비행기를 타기 위해 출국 수속을 해야 할 시간에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가이드는 사건의 전말을 저희에게 전해 주며 공항이 2차 비행기 납치의 위험 때문에 잠정적으로 문을 닫았고 언제 열릴 지 알 수 없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공항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면 우리는 이제 어디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두려움이 앞섰던 저희는 일단 버스는 예약된 일정이 끝나 돌려 보내야 했으므로 근처의 호텔로 저희를 안내해 달라했고, 공항 인근 호텔에 모두 짐과 함께 일단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호텔 로비에 들어선 순간 눈 앞의 광경에 할 말을 잃고 말았는데요.

로비에 있는 의자는 물론 바닥에까지 조금의 틈도 없이 사람과 여행용 가방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카고 공항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공항인데 1초에 비행기 한 대가 뜨고 내린다는 공항이 예고도 없이 문을 닫아버렸으니, 이 날 아침 비행기를 타려던 전 세계로 향할 승객들이 갈 곳이 없이 인근 호텔들로 몰려 든 것입니다.

 

 

시카고 공항

 

어느 호텔로 전화해도 스물 다섯 명의 인원을 받아줄 수 있는 방이 남아 있지 않았고, 방이 하나라도 있으면 일단 짐만 보관하고 로비에서라도 대기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 단 하나의 방을 구하기조차 어려웠습니다.

가이드도 이동수단도 머물 곳도 없는 상황에서, 일단 인근의 식당으로 겨우 이동해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몇 시간을 여기 저기 전화를 하던 저희는 마침내, 감사하게도 시카고 시 외곽에 살고 계신 일행 중 한 분의 친구 분과 연락이 닿았고, 택시를 나누어 타고 일단 그 댁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남편과 사별하시고 자녀 둘을 다른 주에 있는 대학교로 보내고, 방이 세 개 있는 단층의 아름답고 정갈한 집에 홀로 살고 계셨습니다.

오랜 이민생활에, 또 혼자 사신 지 몇 년이 되었기에 사람이 그리우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스물 다섯 명의 한국 사람이 나타나자 그분은 엄청나게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넉넉한 형편이 아니신 것 같은데도 저희를 일단 집에 앉혀 놓고 잠시 마트에 가시더니 어마어마한 양의 옥수수, 고기, 야채 등을 장봐 오셨습니다.

한 명 두 명도 아니고 스물 다섯 명인데, 저희에게 일단 저녁을 해 먹이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저희는 너무 죄송해서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지만 일단 다른 방법이 없어 그분을 도와 바비큐를 굽고 옆집 뒷집에서 빌려온 테이블을 정원에 다 펼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미국행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태어나 처음 경험한 미국에 있는 가정집 정원에서 촛불을 켜 놓고 바비큐를 구워 먹으니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것과 상관없이 그날 저녁은 조금 들뜬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희 스물 다섯 명 일행은 그날은 두 개의 방과 거실 부엌 바닥까지 촘촘하게 몸을 붙이고 누워서, 이불은 부족했지만 짐과 옷들을 베개 삼아 일단 잠을 잘 수는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TV를 켜니 CNN에선 계속 속보를 내보내며 어제의 테러 상황을 보도했고, 비로소 처참한 광경을 목격한 저희 일행은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요.

 

 

 

이미 벌어진 상황도 무섭고 끔찍했지만, 각 테러 전문가들이 나와 앞으로의 상황을 예견하는 것 중 하나가 유독 제 귀에 들어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음 테러 목적지가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시카고의 존 핸콕 센터John Hancock Center가 될 것이다.'

헉여기? 시카고? 우리는 갈 곳도 없는데...

 

한국에 소식을 알려야 해서 로밍해 온 휴대폰들을 빌려 일단 각자의 회사에 전화를 하는데, 밀린 업무를 걱정하여 입국이 기약 없이 늦어지는 것에 대해 변명을 할 필요도 없이 회사로부터도 무사히 돌아만 와달라는 소리를 들었고, 가족들은 언제 돌아갈 지 알 수 없는 저희에 대해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공항은 여전히 언제 열릴지 알 수가 없었고, 저희 일행은 한국에 돌아가려던 길이었기 때문에 돈도 바닥이 났고 갈아입을 옷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렇다고 그 댁에서 그 많은 인원이 신세 지는 것도 죄송해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데 세탁기와 샤워 시설을 막 쓰기도 민망해서 이틀째가 되니 모두 꼬질꼬질하기 이를 때가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일단 돈을 구하고 공항이 언제 열릴지 상황을 알아보러 이동을 하든 무슨 수를 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금이 떨어진 상태였고 한국에서 송금을 받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카드가 있는 사람들은 일단 현금서비스라도 받아서 저희를 먹이고 재워 주시는 아주머님께 비용을 지불하고 이동할 경비를 마련하기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그렇게 그분 댁 인근 상가의 ATM 기계 앞에, 신용카드를 가진 열 댓 명이 줄을 섰는데, 자꾸만 지나가는 동네 백인들이 저희를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런지 모르고 일단 돈을 차례로 찾았는데, 훗날 당시 찍었던 사진을 보니 그 백인들이 저희를 쳐다보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희 그룹엔 당시의 저처럼 나이가 젊은 사람도 있었지만 고위관직의 잘나가는 지긋한 나이의 분들도 계셨는데, 그런 것과 상관없이 사진 속의 저희 모습은 젊은 남녀 거지들과 나이든 남녀 거지들이, 행색은 잘 씻지도 옷을 갈아입지도 못해 떡지고 눌린 머리에 옷이 꼬질꼬질한데, 이상하게 그 꼴로 ATM에서 달러를 막 차례로 인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위관직에 계시던 한 분께서는 이런 말을 남기셨습니다.

"내가 살다 살다, 현금서비스 받을 만큼 궁색한 적도 없었지만 달러로 현금서비스 받기는 태어나 처음이네."

그분의 한탄에 저희는 잠시 앞으로 어찌될 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상황을 잊고 모두 너털웃음을 웃었습니다.

옛다하하

집 주인 아주머님께 찾은 돈을 일부 모아 전해 드렸지만, 사람이 그리우셨다는 그분은 그 돈을 한사코 거절하셨고, 저희는 봉투에 돈을 담아 그분이 나중에 찾으실 수 있게 욕실 서랍에 숨겨 두었습니다.

 

공항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고 한국에 돌아갈 방법은 없었던 다음 날.

시카고 시내 한복판에서 지나가던 백인들이 거지 꼴의 저희를 모두 쳐다보며 박장대소했던, 더 기막힌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데요.

그 이야긴 내일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좋은하루

 

 

* image 출처는 Chicago Ohare 공항 싸이트와 구글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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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관련글을 소설로 오해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이것은 제게 일어난 100% 실화를 쓴 글입니다. 저는 아직 제 블로그에는 쓰고 있는 소설을 올린 적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