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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속의 한국

그리스에선 응답할 수 없을 줄 알았다 1994

by 꿋꿋한올리브나무 2013. 12. 28.

 

 

 

이제 단 한 회만을 남겨 놓은 드라마 '응답하라 1994'.

이 드라마가 시작되었을바쁜 중에도 굳이 찾아 보았던 것은, 드라마에 대한 기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 드라마가 1994년 신촌의 대학생들 이야기로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역사 드라마도 아닌데, 얼마나 역사적 고증을 잘 하나 보자 라는 말도 안 되는 시선으로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1994년의 저는 나정이, 칠봉이, 삼천포, 빙그레, 해태, 윤진이, 쓰레기 오빠 처럼, 거의 매일을 신촌에 있었던 대학생이었기 때문입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4'

 

당시 가장 친했던 친구가 연세대 학생이었고, 제가 다녔던 대학교에서 연세대까지는 버스로 30분 안에 갈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그렇게 저와 그 친구는 1994년, 1995년을 연대 도서관에서 거의 매일 만나 함께 공부를 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소설을 쓰며 작가의 꿈을 접어 본 적이 없었던 제가, 국어국문학을 전공하려다 당시 갑자기 바뀐 입시 제도로 어이 없게 식품영양학을 전공하게 되면서, 식품화학, 생화학, 일반화학으로 구성된 커리큘럼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고, 당시 연대에 다니던 타고난 이과생이었던 그 친구의 도움으로 근근히 학교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대신 저는 그 친구가 앉으면 졸았던 교양국어 수업을 같이 들어주고, 친구의 리포트 쓰기와 시험을 도왔습니다.

그렇게 1994년의 저는 '실험실에서 기르던 흰 쥐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부한 후 가운을 벗지도 않은채 학교식당에서 밥을 먹는 우리과 친구들'에게 적응할 수 없었고, 생화학 원서들을 읽어나가는 것보다는 학교 앞 오락실에서 테트리스를 계속 하거나 도서관에 파묻혀 근현대 국문학들을 읽어나가며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제겐 좀 특별한 방황이 있었던 1994년의 신촌을, 드라마는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신촌의 독수리다방, 여우사이, 만화방, 헌혈차, 홍대서적, 백화점의 우산가게, 연대 앞 두꺼운 떡볶이 포장마차.

드라마가 다룬 소재이든 아니든, 드라마를 보는 내내 1994년의 신촌의 기억들과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는 그때 그 친구가 떠올랐습니다.

드라마 속 시간이 흘러가면서, 제 기억도 1995년, 1996년, 1997년, 1998년...함께 흘러갔습니다.

IMF로 쉽지 않았던 취업, 쉽지 않았던 직장생활...저주 받은 학번이란 소리도 들었지만, 그냥 원래 사회생활은 다 그렇게 힘든 건가 보다 그러며 견뎠던 시간들에 대한 기억. 

 

그런데 드라마 하나로, 깊게 잠겨있던 추억이 통째로 수면 위로 올라와 나를 흔들어 놓았건만, 저는 누구와도 이에 대해 긴 이야길 나눌 수가 없었습니다.

"어제 응답하라 1994 봤어요?" 라며, 한국에 있었다면 하다못해 동네 문구점, 카페 주인과라도 나눌 수 있었을 법한 그 흔한 문장을 뱉을 대상이 없다는 것, 신촌하숙 친구들이 내 머릿속에서 길어 올린 그때 그 추억에 관한 이야기들을 이곳 에서는 그 누구와도 나눌 수가 없다는 것이 불현듯 외로운 마음이 들게 했습니다.

제가 사는 이곳엔 1994년의 신촌, 아니 서울, 아니 대한민국을 함께 추억할 수 있는 이가 없으니까요.

한국에 있는 지인들이나 친구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는 더더욱 없었습니다.

저와 비슷한 나이의 친구들은, 지금 한참 직장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헉헉거리며 매일을 살아나가는 것도 정신이 없는데, 그들이 이 드라마를 본다 하더라도, 저와 국제 전화로 서로의 시차를 확인해가며 이런 이야길 나눌 만큼의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것을 저는 정말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국의 친구들은 원한다면 퇴근 후 커피 한잔, 술 한잔을 하며 1994년을 함께 기억할 많은 주변인이 있을 테니 말이지요.

 

드라마는 나에게 "응답하라 1994" 라고 말을 걸어왔지만, 20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어제 일 같아 찔끔 눈물이 날만큼 그립다고 혼자 생각만 할 뿐, 정작 저는 응답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얼마 전 디미트라와 갈리오삐에게 한국어 수업을 하러 갔을 때, 그녀들이 이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제가 홍보한 것은 아니었고, 한국에서 인기가 있다는 드라마나 예능 프로는 이런 한류 팬들을 위한 영어 자막과 함께 인터넷에 떠돌게 되니, 구해서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그녀들이 아무리 한국을 좋아한대도 저와 나이도 10살 이상 차이가 나는데, 과연 1994년 한국의 정서를 공감할지, 그리고 그 다양한 사투리들을 이해할지, 고개가 갸우뚱 해질 수 밖에 없었는데요.

 

그녀들은 놀랍게도 2013년의 감성으로 드라마 속 1994년의 아날로그 감성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시대 배경이 20년 전이라 해도, 드라마 속 인물들의 미묘한 감정들까지 현재와 다르진 않다는 것을 읽어내며 공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드라마를 보며 그녀들은, 나름 1994년 그녀들이 초등학교를 다녔던 때의 그리스를 그리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테네에 있었고, 어렸고,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들었고, 유명인의 브로마이드를 모았고...

그리고 1994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디미트라의 아버지께서 심장마미로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그후 시간들은 참 많이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이 한국 드라마는 그리스인인 그녀들의 오래 전 많은 시간들을 한꺼번에 떠올리게 했습니다.

 

 

  연말 연휴였던 어제, 저는 이로 아주머님의 맛있는 식사에 초대를 받았고 그녀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로 아주머님의 맛있는 음식들입니다.

 

우린 서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기쁘게 교환했 밥을 먹으며 다시 이 드라마에 대한 이야길 하게 되었는데,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1994년 이후로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 원래 꿈은 무엇이었는데 지금은 무엇을 하고 사는지에 대한 각자의 역사로 옮겨 갔습니다.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미술과 사진을 전공한 후, 아테네 생활을 접고 로도스에 와서 사진작가로 자리잡아 가는 것이 힘들지만, 좋아하는 일이니 열심히 하고 있다는 갈리오삐 이야기.

메이크업 스쿨을 졸업하고 전문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려다가 지금의 대형서점에서 1년만 일해달라는 지인의 부탁으로 시작한 일이 이젠 7년 째라는 디미트라 이야기.

남편 없이 자녀들을 키우며, 치과 직원으로 오랜기간 근무하며 많은 고생을 했지만 이제는 자식들이 잘 커주어 기쁘다는 이로 아주머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저도 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1995년부터 겨우 전공에 맘을 붙여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고 그후 다시 편입해 국어국문학을 공부했지만, 결국 글쓰기와 상관 없는 행정업무와 식품영양학과 관련된 일들만 10년 넘게 했었던 한국에서의 시간들에 대해서요.

한국 생활을 정리하며, 이제껏 자주 없었던 글 쓸 기회가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아, 써두었던 습작들과 1,000권이 넘는 책을 다 버리고 그리스로 왔는데, 그렇게 글쓰기에 대한 집착을 마음에서 놓으니 도리어 지금은 블로그에 매일 글을 쓰고 있고 가끔 덮어 두었던 소설도 쓸 수 있는 감사한 이야기들도요. 

 

우리는 국적도 다르고 나이도 달랐지만, 각자의 1994년을 추억하고 그 이후의 삶을 공유하며 함께 과거에 응답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응답하라 1994' 드라마에도 함께 응답했습니다.

  

 

 

우리 넷 모두 나정이 남편으로 칠봉이를 응원했는데, 드라마 결말은 그게 아닐 것 같다는 속상함을 토로하면서요.^^

 

여러분 행복한 토요일 되세요!

 좋은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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