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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요 그리스 여행

그리스인 남편이 멋진 배에서 내 팔에 남긴 반전 낙서

by 꿋꿋한올리브나무 2013. 8. 14.

 

한국에서 막 그리스로 돌아왔을 때, 매니저 씨는 상당히 감격하여 공항에서 저희를 맞이했습니다.

'뭘 그렇게 감격까지 하고 저럴까?' 싶었고, 스물 여섯 시간이 걸린 여행으로 저는 빨리 씻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얼른 샤워를 하고 대충 짐을 풀고 부엌에서 물을 마시려다가 저는 완전 빵 터지고 말았는데요.

매니저 씨가 설거지를 해 놓은 모양새가 너무 웃겼기 때문입니다.

ㅎㅎㅎ

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형태로 설거지한 그릇이 쌓여 있었는데, 그 나마 지저분하게 설거지 한 것도 있어서, 왜 저를 그렇게나 감격해서 맞이했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매니저 씨의 집안일 해주는 아내가 돌아온 감격은 며칠 동안은 유지되었는데, 툭하면 일하다가도 전화해서 반갑게 안부를 묻곤 해서 '이 인간이 웬일이래?'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여지 없이 매니저 씨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구나 확인할 수 있었던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며칠 전, 오스트리아 고모님과 사촌 마사를 비롯해 여덟 명이 함께 씨미 섬에 가게 되었는데요.

사실 로도스 시는 열두 개의 섬으로 구성된 도데까니사 현의 수도가 되는 도시이기 때문에, 지중해와 남유럽을 도는 큰 크루즈 뿐만 아니라, 그리스 전체 섬들을 도는 크루즈와 인근 열두 개 섬으로 갈 수 있는 배들이 수시로 항구로 들어오는데요.

 

로도스 시에 자리한 항구에서 씨미 섬까지는 배로 두 시간 정도 걸리는데, 섬 반대편을 구경하기 위해 다시 한 시간 배를 타고 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세 시간 배를 타야 구경할 수 있는 섬이고, 돌아올 때 다시 세 시간 배를 타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비행기나 자동차에서는 멀미를 하지 않지만, 배만 타면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러워서 평소 바다 낚시도 따라 다닐 수가 없는데요.

씨미 섬을 그 동안 그토록 가 보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태 가보지 못한 이유도 바로 배를 탔을 때 울렁대는 속을 과연 진정시킬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서였습니다.

씨미 섬은 가운데 산이 솟은 듯 생긴 섬이기 때문에, 작지만 아름다운 섬이며, 특색 있는 목조 집들과 수영하는 고양이들이 있는 섬으로 유명한 장소라 정말 궁금하긴 했었습니다.

오스트리아 고모님께서 예고 없이 그리스에 들르시면서 특유의 그리스인들 성향대로 갑자기 결정된 씨미 행이었기에 저는 수영하는 고양이들을 드디어 사진 찍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에 부풀어 멀미약을 먹고 배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매니저 씨는 기대에 부푼 저에게 청천병력 같은 말을 남겼는데요.

"수영하는 고양이는 겨울에만 있어."

"아니! 왜?"

"씨미 섬 고양이들은 먹을 게 부족해서 겨울엔 바다로 들어가 물고기를 잡아 먹는 것이지."

헉

아니,그럼 수영하는 고양이도 볼 수 없는데, 손님 접대 하느라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이 울렁거림을 극복하며 왜 거기까지 가야 한단 말인가!!!

 

저는 속상한 마음에 배 기둥에 기대 얼른 배가 섬에 도착하길 바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섬은 예상했던 것 보다 더 아름다웠습니다...

그나마 정말 다행이었지요.

 

 

 여기까지도 세계 각 국의 깃발을 단 요트들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 고모님과 딸아이의 다정한 한 때.

 

 

그렇게 섬을 구경하고 커피를 마시고 밥을 먹고 하다 보니 다시 배를 타고 섬 반대편으로 가야 해서 또 멀미를 참고 섬 반대편에 다다르게 되었는데요.

육로가 없이 배로만 섬을 도는 것이 자연의 거대함을 느끼며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왼편이 제가 탔던 배인데, 자동차를 함께 싣고 승객을 500명 정도 태울 수 있는 배였습니다.

 

 

로도스도 섬이긴 하지만 제주도 면적에 도시가 발달한 섬이라, 도시 안에서 북적거리는 관광객에 치여 일상 생활을 하다보면 평소 섬이라는 인식을 크게 못 하고 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씨미 섬의 짧은 관광이 끝나고, 매니저 씨는 돌아오는 배에 타기 전에 멀미약 부터 먹으라고 저에게 재촉을 하였고 저는 얼른 알약을 꿀꺽 삼켰는데요.

아니, 이 약이 올 때는 별 효과가 없더니 갈 때가 되니 먹자 마자 졸리기 시작해서 배에 탄 후로부터는 계속 앉은 채로 머리를 기둥에 대고 깊은 잠을 잘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세 시간을 내리 잠을 자며 중간 중간 누군가 이야기하는 소리에 실눈을 떴다 또 잠을 자곤 했는데, 거의 도착할 때가 되었다고 친구 스테르고스가 저를 깨웠습니다.

겨우 일어나 보니 아니! 제 왼 팔에 웬 낙서가 되어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리스어로 쓰여진 낙서는 누가 봐도 매니저 씨 글씨였고, 오백 명이나 타고 있는 그 큰 배에서, 남들은 하늘하늘 바람에 타이타닉 흉내를 내는 갑판 쪽에 앉아 잠이 든 사이에 뭔가 써 놓은 것이었습니다.

매니저 씨가 저에게 로맨틱한 말이라도 남겼나 싶어, 거꾸로 쓰여진 글을 읽으려고 안 돌아가는 팔을 꺾어 내용을 읽었는데, 거기엔 뜻밖에도 이런 말이 쓰여 있었습니다.

 

 여기 술과 약(마약)에 잔뜩 취한 여자가 쓰러져 있음. 지나가는 사람들 조심하세요!

 

아니, 이 인간이!!!!! 복수

 

멀미약이 덜 깨 화를 내려고 팔을 휘젓는데 힘이 없어 잘 되지 않자, 매니저 씨와 스테르고스는 깔깔 거리고 웃기 시작했고, 매니저 씨는 쯧쯧거리며 제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휘적거리는팔의 낙서를 닦아 주며, 이런 말로 자신의 행동을 변명했습니다.

"어떻게 낙서를 이렇게 하는데 모르고 자니? 다음에 또 다른 섬 구경 가자고 하지마.

이런 큰 배도 못 타면서 어딜 또 갈 수나 있겠니?"

ㅋㅋㅋㅎㅎㅎ

그걸 변명이라고...

이미 수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며 이 낙서를 봤을 거라고!!!

술도 마실 줄 모르는 제가! 마약이라곤 입에 대 본 적도 없는 제가! 이런 낙서를 써 놓은 줄도 모르고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는데서 정신 없이 잤으니 이 무슨 망신인가 싶었습니다. 다행히 지난 번 비행기에서처럼 상모 돌리듯 잔 건 아니어서 머리카락은 멀쩡할 줄 알았는데, 나중에 거울을 보니 머리를 묶지 않고 잤더니 갑판 쪽이라 거센 바다 바람에 산발이 된 건 마찬가지였어요.ㅠㅠ

엉엉이번엔 정말 멀미약에 취해서 그런 거라고요. 엉..엉..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 이후로 잘 때 몰래 누군가 제 몸에 공개 낙서를 해 놓은 일은 처음이라, 어이가 없기도 하고 

이 무슨 동심의 세계인가 싶어 헛웃음만 웃고 말았답니다.

 

 

   

여러분 즐거운 하루 되세요!!!

좋은하루

  

   

* 씨미 섬에 고양이들이 수영하는 것을 취재하기 위해서, 저는 겨울에 또 용감하게 배를 타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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