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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그리스 문화

우리는 그리스 소녀의 귀도Guido가 되기로 했어요.

by 꿋꿋한올리브나무 2014. 6. 19.


 

 


"왜 엄마는 4일이나 집에 돌아 오지 않아?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잖아!"

계속 이런 질문을 했던 그리스 소녀 흐리스파Χρίσπα는 엄마의 장례식이 있던 날, 할아버지와 함께 집에 남아 있었습니다. 

관 뚜껑을 연 채 진행하는 그리스 장례식엔 좀처럼 어린이가 참석하는 경우는 잘 없기 때문인데다가, 아직 만 여덟 살인 이 아이가 어떻게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지 모든 사람은 걱정을 했었고 결국 아이에게 엄마가 떠났다는 사실을 아직은 알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엄마의 장례식이 있던 날부터 아이는 그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물었을 때 듣게 될 답이 두려워서 묻지 못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말 해주지 않았지만 느끼고 있는지도요.

 

장례식이 있던 월요일 저녁 5시는 늦은 시간이었지만 햇볕은 몹시 뜨거웠습니다. 정교회에서 장례식이 치러지고 그녀가 살던 지역인 파스티다 공립 묘지까지, 검은 옷을 입은 수백 명의 하객들은 아직 그녀의 갑작스런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듯, 커다란 선글라스들을 끼고 훌쩍이며 파스티다의 시골 길을 걸었습니다. (저는 아마 이 장면을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을 듯 합니다.) 


관이 땅으로 내려가고 묘지 관리원이 흙을 덮고 국화들이 한 가득 그 위에 놓이는 동안 훌쩍이는 사람들 속에 눈물을 눌러 참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마지막까지 병실을 지켰던 마리아의 남편과 시동생인 스테르고스였습니다.

 

막 금발로 염색을 한 듯한 머리 스타일에 좀 짙은 화장을 한 채 과장된 목소리로 흐느끼며 "잘 가라, 내 새끼. 좋은 여행 되거라!" 라던 마리아의 어머니 보다(이전 글에서 밝혔던 그녀는 마리아를 키우지 않았었지요.), 그 등 뒤에서 흑흑 숨죽여 울던 헝클어진 머리의 이모님이 더 슬퍼 보였고(마리아를 키워주신 분이십니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마치 누가 오래 숨을 참나 내기를 하는 사람들처럼 경직된 표정을 짓고 있는 마리아의 남편과 시동생 스테르고스가 제겐 그 이모님보다 더 슬퍼 보였습니다.

 

장례식이 끝난 뒤 대부분 조문객들은 묘지 인근에 차와 다과가 마련된 카페테리아로 이동했고, 묘지에는 직계 가족과 친인척, 가까운 이웃, 친구들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저는 시어머님과 함께 스테르고스에게 다가가 조용히 물었습니다.

"네 형은...좀 어때?"

스테르고스는 표정을 흐트러트리지 않은 채 대답했습니다.

"슬프지. 많이 사랑했었으니까. 하지만 형의 진짜 걱정은 이제부터야. 도대체 막내 딸 흐리스파에게 어떻게 엄마의 죽음을 알려야 할 지 모르겠대. 아동심리상담을 예약해 놓긴 했는데, 장례식 끝나고 지금 당장 집에 가서 아이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웃을 생각을 하니 그게 너무 힘든가 봐. 그건...나도 그렇고."

 

8시가 넘어 장례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저는, 제 딸에게 다시 한번 당부를 했습니다.

"마리아나. 절대 흐리스파에게 그 애 엄마 얘길 먼저 꺼내면 안 되는 거야. 아직 엄마가 어떻게 된 건지 정확하게 모르고 있어서 우리 모두 당분간은 알리지 않기로 했어. 넌 흐리스파보다는 조금 더 큰 아이이니 엄마 말 이해하지?"

"응. 걱정 마세요. 나는 친구 엄마인데도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게 믿어지지 않고 자꾸만 슬픈 생각이 드는데, 그 앤 알게 된다면 큰 충격일 거에요. 말 안 할게요."

"그래. 역시 우리 딸. 기특하네. 그리고 아마도 이웃들이나 흐리스파의 가족들이 모두 그 아이 앞에서 일부러 더 즐겁게 대하려고 노력할 거야. 너도 함께 그래줄 수 있지? 그 아이가 이 상황을 천천히 받아들이는 동안 우리는 모두 그러기로 했는데."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럼 지난 번에 내 팔찌를 흐리스파가 갖고 싶어했던 게 있는데 그걸 줄까요?"

"네가 주고 싶은 진심 어린 마음이 든다면 주렴. 하지만 동정을 하는 마음으로 주는 건 안 된단다. 그런 마음은 상대가 금새 눈치채거든. 진심으로 친구를 위하는 마음이 든다면 팔찌를 주렴. 그런 마음이 아니라면 주지 않는 게 나아."

"알았어요. 엄마. 그럼 잘 생각해보고 선택할게요."

 

이런 대화를 나누고 오늘까지 이틀이 지나는 동안 저는 바쁘게 일상을 살다가도 또 잠시라도 짬이 나면 그녀의 명랑한 웃음소리나 저를 다정하게 부르던 목소리가 생각이 났고, 차라리 더 평온해 보이던 장례식 때의 그녀 얼굴보다 고통스러워하던 병원에서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러던 중 어제 집 앞에 주차를 하는데, 이웃의 캣맘 흐리스티나Χριστίνα가 반대편에서 차를 몰고 어디론가 가려던 중에 일부러 제 차 옆에 잠시 차를 세우더니 몹시 슬픈 눈으로 말을 걸었습니다.

"우리 애들이 지금 흐리스파와 뒷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마리아나도 보내려면 보내든가. 일부러 먹을 것을 많이 만들어서 아빠와 함께 두고 왔으니 아마 잘 놀 거야. 우리 부부는 앞으로 흐리스파와 더 신경 써서 놀아주기로 했어. 어차피 우리 애들 돌볼 때 같이 돌보는 것인데 어려울 것도 없지 뭐. 이웃의 아나'Αννα 엄마도 앞으로 더 흐리스파를 신경쓰겠다고 했어."

"그래. 우리. 그러기로 해."

좀 차가워 보이는 인상과 뚝뚝한 말투를 가진 그녀지만, 따뜻한 마음 씀씀이가 있다는 것은 고양이나 강아지들을 돌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데다, 그녀의 딸 마띠나Ματίνα는 제 딸아이와 동갑으로 역시 흐리스파와 또래여서, 그녀 역시 자식을 두고 간 엄마의 심정을 깊이 이해하는 듯 장례식에서 섧게 울었었습니다.


백혈병 어린이 수술 기금마련 봉사활동 중인 이웃 흐리스티나


암 병동 어린이를 위한 도서 바자회 중인 흐리스티나

(*그녀가 이렇게 아픈 아이들을 위해 앞장 서는 이유는, 그녀의 딸 마띠나 역시 어릴 때부터 소아 당뇨를 앓아 와서 

현재는 엄마의 부단한 노력으로 건강해진 편이지만 한 땐 위험한 고비를 넘기기도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웃들은 마띠나에게 절대 단 것을 함부로 주면 안 된다 라는 사실을 이사 온 첫날 부터 고지 받게 됩니다.)

 



차를 주차하고 집에 들어와 뒷문을 여니, 저 멀리서 흐리스파와 마띠나와 마띠나의 동생 알렉산드라가 웃으며 노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원래도 아이들과 잘 놀아주는 마띠나의 아빠는 뭔가 재미있는 놀이를 해주는 듯 들렸고, 보이지 않아도 소리만으로도 얼마나 즐겁게 놀아주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때 문득 저는, 이탈리아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Life is beautiful : La vita e' bella)'가 떠올랐습니다.

아름다운 아내와 행복하게 살던 주인공 귀도Guido는 어느 날 갑자기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독일군에게 잡혀, 아들 죠슈아와 포로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고, 그의 아내는 유태인은 아니었지만 함께 여자 수용소에 갇히게 됩니다.

원래 특유의 유머로 늘 주변인을 행복하게 해주던 귀도는, 수용소에서도 아내를 위해 몰래 음악을 틀기도 하고 아들을 웃겨주며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 끔찍한 상황에서 어린 아들이 충격 받지 않도록 자신의 죽음까지 숨바꼭질로 가장하여 아이를 공포스럽지 않도록 돕습니다.

나중에 독일군이 철수하며 죠슈아는 엄마와 다시 만나게 되어 삶을 이어가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영화 트레일러입니다.


이 영화의 가장 마지막 장면으로 아빠 귀도가 아들이 두렵지 않도록 

끝까지 웃음을 주는 장면입니다.



그 영화처럼, 우리는...엄마 마리아의 장례식에서, 곧 만날 딸아이를 슬프게 할 수 없어 끝내 울지 못 했던 아빠나, 삼촌, 그리고 장례식에 다녀온 직후에도 아이 앞에서 방긋 웃어 보여야 했던 할머니, 이웃의 엄마들, 아빠들까지 모두 마리아의 딸 흐리스파의 귀도Guido가 되어주기로 한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웃 소녀 흐리스파를 위해 놀아주고, 누군가는 맛있는 요리를 해다 주고, 누군가는 필요한 물건을 챙겨 주며 며칠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서로 이런 일들이 일시적으로 그치지 않길 이웃끼리 눈이 마주칠 때마다 말 없이  서로를 응원했습니다.

저는 그 아이에게 지금 필요한 물건이 있을까 고민하다가 오늘 수영복을 하나 샀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아이들이라 작년 수영복이 분명 작을 테고 그리스에서 수영복은 꼭 있어야 하는 필수품이니까요.

수영복을 건네주러 이웃 흐리스파 할머니 집에 들렀는데, 다른 이웃 엄마도 무언가를 사서 그 아이에게 건네고 오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혹시라도 아이가 갑자기 이웃들이 과하게 베푸는 친절을 이상하게 여길까 봐 "지난 번 네 생일 때 아무래도 선물이 좀 작았던 것 같아서 추가로 산 거야." 라고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해야 했습니다.


동네 아이들은 오늘도 흐리스파와 신나게 놀았습니다.

장례식 때 그렇게 많이 울던 흐리스파의 오빠와 언니도, 슬픈 기색을 감춘 채 일부러 할머니 집에 와서 흐리스파와 신나게 축구를 하며 노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흐리스파의 오빠와 언니... 그리고 엄마 마리아.




내일은 아빠와 함께 아동심리 상담가를 찾아간다는 흐리스파.

분명 언젠가는 엄마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정확하게 인지할 날이 올 것이고 그 슬픔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클 테지만, 또 누구도 결코 엄마를 대신해줄 수는 없겠지만, 비록 그렇더라도 귀도Guido가 되어준 아빠와 삼촌, 할머니, 할아버지, 언니, 오빠, 친척들, 이웃들 덕분에, 힘 내서 인생을 살아나갈 수 있었으면 싶습니다.

 

흐리스파가 밖에서 노는 모습을 집안에서 지켜보며 그 강단 있는 삼촌 스테르고스가 참았던 눈물을 주루룩 흘리다가 또 조카가 볼 새라 얼른 눈물을 손으로 훔치는, 우리는 모두 그런 노력을 하고 있으니까요...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오늘 하루 고단한 누군가에게 한 줄기 웃음을 주는 귀도Guido가 되어주실 수 있을지도요.

많이 웃는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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