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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속의 한국

한국-그리스 축구, 우리 부부 어딜 응원했을까요?

by 꿋꿋한올리브나무 2014. 3. 6.

 

 

몇 주 전 한국 대사관으로부터 아테네에서 있을 한국-그리스 축구 경기에 대한 이메일이 왔습니다.

친절하게도 대사관에서 이곳 한인들에게 경기 입장권을 저렴하게 배포해 주니 관람을 원하는 한인들은 답신을 하라는 메일이었습니다. 그리스 전국 거주 한국인 수가 250명에서 350명을 사이를 오르내릴 만큼 적다 보니, 이렇게 한국대사관에서 특별한 배려도 해주는구나 싶어 감사할 때가 참 많습니다.

 

하지만 한국선수들을 응원하러 가야겠다는 마음이 선뜻 들지 않았던 것은 비단 제가 축구에 큰 관심이 없어서만은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아무리 평소 축구에 관심이 없더라도 월드컵을 코 앞에 둔 시점에서 중요한 국제 경기이고, 대한민국과 그리스 두 나라의 이름이 나란히 뉴스에 오르는 것은 참 드문 일인데 관심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이번 축구경기에 대해 적극적으로 응원할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은 바로 2010년의 좋지 않았던 경험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기억하듯 2010년 한국과 그리스는, 월드컵 본선에서 한 조에 배정되어 경기를 했었습니다. 당시엔 친선경기가 아닌 월드컵 본 경기였으니 한국과 그리스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뜨거운 분위기로 이 경기를 주목했었는데요.

당시 한국인인 저와 그리스인인 매니저 씨는 이 경기 결과를 나름 예상하며, 경기 전부터 즐거워하며 큰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 이전에 몇 번 소개한 대로, 그리스인들의 축구사랑은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조금은 더 뜨겁다고 할 수 있는데요.

 그리스인들은 축구 국제리그뿐만 아니라 평소 국내리그에 워낙 관심이 많다 보니, 집안 마다 응원하는 축구팀이 따로 정해져 있을 만큼 일상생활에서 축구 사랑이 대단한 국민들입니다.

 그리스 남자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당연히 축구교실에 보내져 추운 겨울에도 반바지 차림으로 경기를 하는 경우가 잦습니다. 동네마다 잔디 깔린 축구장이 여러 개 있어 이런 어린이들의 축구경기 모습을 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에는 축구만 전문으로 보는 스포츠 카페들도 있습니다.

60인치 이상의 TV 여러 대와 큰 스크린으로 영상을 쏴서 축구 중계를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카페인데, 주요 국내리그 경기가 있는 날은 이런 카페에 함께 경기를 보러 온 남성들로 가득 차서 동네가 떠나가라 단체 함성을 질러대는 곳입니다. 바로 저희 집에서도 걸어서 5분 거리에 축구관람 전문 카페가 있는데 경기가 없는 줄 알고 친구를 만나러 들렀다가 아주 낭패를 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국내리그 경기는 생각보다 자주 있더라고요.

 

저희 동네 축구관람 전용카페입니다.

 

이렇게 경기가 없는 낮엔 카페가 한가해서

가끔 조용히 글을 쓰러 가기도 한답니다.

 

또한 스포츠 뉴스에서도 언제나 <그리스 스포츠는 축구, 농구 그리고 다른 스포츠들이 있다.> 이런 식으로 분류될 만큼, 축구 국내리그 팀들의 경기를 줄기차게 소개하곤 합니다.

이런 국민들의 뜨거운 일상생활에서의 축구 사랑 때문인지, 그리스 축구는 현재 국제축구연맹 FIFA랭킹 12위에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61위이지만, 아마 이번 브라질 월드컵에서 랭킹이 많이 올리가지 않을까 예측되고 있습니다.)

 꿋꿋한올리브나무 

 

 

"어느 팀이 이길까? 각자 정정당당하게 즐겁게 응원하자고!!!"

이러며, 저와 매니저 씨는 서로 즐겁게 경기를 기대했었고, 마침내 2010년 월드컵 조별 경기가 있었는데요.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는 대로, 그 경기에서 한국이 그리스를 이겼습니다.

 

손에 땀을 쥐고 경기를 보았던 매니저 씨와 가족들은 모두 상당히 기분이 상해 우울한 분위기가 되었고, 그 앞에서 한국이 잘 한 것에 대해 맘 놓고 기뻐하기도 어색한 상황이 발생해버린 것입니다.

특히 한국에 살 때 평소 한국인들이 축구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리스인들만큼 축구사랑이 뜨겁지는 않다고 자부했던 매니저 씨는, 이 경기에 그런 그리스인들이 져버린 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화난 사람처럼 입을 꾹 닫아버리게 된 것입니다.

저도 만약 매니저 씨가 저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헤헤~ 그것 봐! 역시 한국이지? 한국 축구 대단하다니까!" 이렇게 흥분하며 좋아했을 텐데, 차마 축구경기 결과에 실망하고 우울해하는 매니저 씨 앞에서 그렇게 좋아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매니저 씨의 한국-그리스 축구경기 결과에 대한 우울모드는 며칠을 갔는데요.

그 후 저희는 서로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도, 서로의 국가의 축구에 대한 얘길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쩐지 말이 나오면 싸움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4년이 지난 2014년 3월 5일, 한국-그리스 경기에 대해서는?

결론적으로 저희 둘 다 경기를 관람하지 않았습니다.

참 씁쓸한 결과이지요?

물론 저는 시계를 보며 몰래 실시간으로 경기 상황을 인터넷으로 체크했고, 당연히 한국을 응원한다는 딸아이는 2층 자기 방에서 혼자 경기를 보는 것 같았지만, 매니저 씨와 저는 TV를 켜지 않았고 이 경기에 대해 지금까지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게다가 한국이 이겼으니, 저는 더더욱 이에 대해 말을 할 수 없어져버렸습니다.

 

잠깐! 사방 그리스인에 둘러 쌓여 사니, 육성으로 하지 못한 말을 블로그 지면을 빌어서라도 맘껏 하고 싶네요!

파이팅

"야호! 한국이 이겼다!!!!아흐! 신나!!"

 

 

하지만 국제결혼 여성을 물어 뜯기 좋아하는 몰상식한 악플러들은 이 글을 보며 또 한마디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스포츠에서 제 나라 응원도 제대로 못 할거면서 뭘 국제결혼을 하고 난리냐고요. (이보다 더 심한 소리도 들어봤으니 충분히 이렇게 말하고도 남겠지요.)

또한 매니저 씨가 저를 위해 그리스가 아닌 한국을 응원해줄 만큼 한국 사랑이 지대할 수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 저를 안된 시선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매니저 씨도 한국에서 살면서 좋은 기억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나름 외국인으로서 고생을 많이 했었기에, 한국을 그리워하고 좋아하면서도 한국을 무조건 지지할 수만은 없는 입장이란 면에서, 제가 그리스에 대해 생각하는 부분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번 축구경기 응원 때문에 여러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누군가는 국제결혼을 해야겠다 작정하고 국제결혼에 골인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엔 내게 온 인연이 하필 외국인이어서 어쩌다 보니 국제결혼을 하게 된 경우일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국제결혼을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고 말들 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국제결혼을 하는 부부들은 결혼 전에 이미 거대한 난관을 거치게 됩니다. 그건 민족주의가 강한 한국이나 그리스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느끼게 되었던 것이, 최근 그렇게 죽고 못 살던 오스트리아 사촌 마사와 매니저 씨 친구 스테르고스가 헤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얘긴 다시 자세히 다음에 할게요.)

국제결혼 부부는 이미 천송이와 도민준 만큼이나 살아온 환경과 각기 다른 정체성으로 결혼까지 큰 산을 넘었지만, 결혼 후에 더 큰 산들을 함께 넘어가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개인 인생에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닌, 축구 경기 응원 하나만 봐도 그렇지요.

그런데 이 두 사람이 계속 부부로 가정을 일구어가기 위해서는, '국제부부'라는 차원을 뛰어넘어 '서로가 다른 사람이다' 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부분에서부터 노력이 필요하단 생각이 듭니다.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비단 국제부부뿐만 아니라 사실 모든 부부가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세상에 나와 똑 같은 가정환경에서 똑 같은 문화에서 똑 같은 일들을 경험하며 자라서 결혼한 부부가 얼마나 될까요.

같은 나라 안에서도 나고 자란 지역만 달라도 결혼 후 서로 부대낄 때가 많은 것이 부부이니 말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축구 경기 응원 하나를 서로 포기하는 것이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일이라면 저는 그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주장하느라 격하게 싸울 만큼, 축구 경기 응원이 개인의 인생에 중요한 사안은 아니니까요.

또한 입 밖으로 드러내서 한국을 응원을 하지 않는다고, 내가 내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 일이 아니어도 우리 가정에 훨씬 중요한 사안들이나 서로 다른 생각 때문에 말다툼하며 의견을 조율해야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니까요.

 

어쩌면 우리는 외모도, 직업도, 출신지역도 드라마 같진 않지만, 결국 기혼자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송이와 도민준 같은 입장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서로 사랑해서 함께 살기로 했고, 함께 계속 살기 위해서는 서로의 다름을 극복하며 계속 지속적으로 노력해나가야 하는 그런 입장 말이지요.

 

 

비록 겉으론 응원하지 못했지만 한국축구가 이겨서 정말 좋네요!

여러분 신나는 하루 되세요!

좋은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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