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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속의 한국

한국인의 장점 성실한 이미지, 그러나?

by 꿋꿋한올리브나무 2013. 12. 9.

 

 

얼마 전 폭우의 번개로 저희 집 세탁기 전선이 타 들어갔습니다. 결국 새 세탁기를 사야 했습니다. 그리스 로도스 시 내의 어느 집은 컴퓨터가, 어느 집은 TV가 망가졌지요. 작년엔 인터넷 선이 타들어가서 사무실이나 카페에서만 글을 썼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리스는 피뢰침도 없어서 번개에 가전제품이 타 들어가는 어이 없는 상황이 발생하냐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리가요. 그리스에도 피뢰침은 잘 설치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곳 겨울의 번개와 천둥의 종류가 한국의 그것과는 다른 종류이기 때문입니다.

여름 내내 비가 오지 않아 건조할 대로 건조해진 땅 위에 갑작스레 내려 꽂히는 번개와 폭우는 아스팔트를 붕괴시키고, 보도블록을 망가뜨리고 가전제품을 타 들어가게 할 만큼 무시무시한 종류인 것입니다.

 

오늘은 원래, 그렇게 새로 구입한 한국 세탁기에 대한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번 딸아이 관련 글에 새롭게 달린 댓글을 확인하고 쓰던 글을 멈추었습니다. 그 중 하나를 공개하자면 이렇습니다.

 

 

 

저는 지난 번 막말 댓글이 있은 후, 그 글 아랫부분에 추가로 그리스 상황을 설명하는 글을 더 써 넣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일찍 준비해서 나갔다면 이런 글로 장시간의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등의 댓글을 보며 어이가 없어 그 아래 경고성 답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글을 제대로 읽으신 분이라면 이 글의 핵심이 지각, 자체가 아니란 것을 이해하실 텐데 말입니다. 

그리고 엄청난 폭우로 정전사태가 일어 피치 못해 지각을 한 것인데, 더 일찍 준비해서 나갔다면, 이라니요.

(사건 당일 발생한 사망자 수는 더 늘어서 시신이 터키까지 떠내려가 이양하는 경우도 생겨, 이런 국경지대 업무의 비용지불 문제와 훼손된 시신들의 DNA검사 등으로 요즘 로도스는 시끄럽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이해력이 딸리는 분들이 많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에 홀린듯 또 왜 그렇게나 열심히들 댓글을 쓸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013년 현재 외국인들에게 한국인의 이미지

 

그런데 문득, 폭우와 정전사태로 사망자가 발생했고 딸아이의 문제의 지각 사건이 있었던 그날 저녁, 제가 폭우를 뚫고 전복된 도로를 우회해 그리스인 친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러 갔을 때 들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디미트라와 갈리오삐, 이 두 친구는 그날 제가 제 시간에 도착하자 둘이 손뼉을 치며 막 웃었는데요.

왜 그러냐고 제가 묻자 갈리오삐는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이 도저히 수업을 하러 올 수 없는 날씨여서, 오늘 못 올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디미트라가 말했어요. 아니. 한국인은 그렇지 않아. 만약 올 수 없다면 반드시 미리 전화를 했을 거야. 근데 여태 전화가 없는 것을 보면 선생님은 제 시간에 도착할 거야. 라고 말이에요. 그런데 정말 제 시간에 도착했네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요 앞 도로가 전복되었는데?"

"아니..전복되지 않은 도로로 돌아 왔어요. 아침에 출근할 때 상태가 이런 것을 이미 봤는걸. 그래서 좀 일찍 나왔거든요."

"역시 선생님은 한국인이시네요."

 

한국인.

그렇습니다. 그리스인들 눈에 비친 한국인은 일과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상황과 환경에 구애 받지 않고 뚫고 나가는 성실의 대명사 같다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대장금'을 비롯해 역경을 뚫고 나가는 주인공의 스토리가 있는 한류 드라마의 영향도 분명 있고, LG나 삼성, 현대로 대표되는 기술력의 나라 라는 '뭔가 정확할 것 같은 이미지' 때문이기도 합니다.

 

  

저희 그리스인 시부모님도 제가 일을 하는 방식에 대해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드실 때가 있습니다.

굳이 오늘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바쁘게 마무리 한다고요. 저는 한국에서 일하던 방식대로 일을 한 것 뿐입니다.

그리스인들 눈에는 그런 제가 삶을 즐기는 여유가 없어 보이고, 어떤 땐 일이 최고 우선순위인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지요. 분명 저는 일에 있어서는 한국에서 보다 덜 바쁜데도 말이지요.

 

 

한국인의 장점인 성실함과 영리함의 역기능인가?

필요이상의 인신공격형의 비판과 모욕적인 악플이 현재 인터넷 여기저기에서 문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폭우와 정전에 의한 딸아이의 지각사건에 대해, 얼마전 그리스인인 이로 아주머님께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쭤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에서 사회생활 경험이 많으시고, 누구보다 딸아이를 잘 알고 계시면서도, 가족이 아닌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주머님은 물론 그리스인이기에 그리스 초등학교 상황도 잘 이해하고 있고, 지각 당일 어떤 날씨였는지 경험하셔서 잘 알고 있기에, 저보다 더 화를 내시며 당장 당신이 담임선생님을 찾아가서 따져줄 테니 가자고 막 성화셔서 겨우겨우 아니라고 괜찮다고 말려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똑 같은 상황에 대하여 일부 막말을 쓰신 분들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아무리 그리스 초등학교 상황을 경험하지 못 했기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국에 이렇게나 많다고는 하나, 그래도 추가로 설명까지 써 넣었는데도, 제가 더 일찍 준비해서 나갔다면 애초에 이렇게 글 쓰는 에너지 소모를 하지 않았을 거라는 댓글을 보며, 그분이 그리스의 폭우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글을 썼을 거라고 짐작은 하고, 글의 핵심이 지각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담임선생님이 아이를 데려다 준 부모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하면서 아이에게 비인격적으로 소리를 지른 데에 속이 상했고, '담임선생님을 이해하기 위해서 쓴 글' 이란 것을 인지하지 못한 댓글이었다는 것을 알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댓글 상황에 대해 지켜보면서, 그 모든 그리스 상황 이해부족에 의한 댓글을 쓰신 분들이 한국에 계신 분들임을 확인하면서, 제 가슴 한 구석에 찌릿한 아픔 같은 게 있었습니다.

 

도대체 그분들은 한국인으로 살아가면서 이제껏, 얼마나 성실함을 요구 받고 살아왔으면, 그렇게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지각, 이란 하나의 단어만 매직아이처럼 크게 보이는 사람들처럼, 그에 관련하여 저희 애를 이상한 애로 만들고

저를 이상한 엄마로 만드는 예민한 댓글을 써야 했던 걸까. 라는 마음 때문이었는데요.

 

이는 삼십오 년 이상 한국에 살며 제가 요구 받았던 한국인으로서의 성실함을 돌아 보았을 때 짐작이 가고도 남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나의 부끄러운 과거와 나아져가는 현재

 

저는 한국인 예의 성실함을 삶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던 부모님 아래서 자랐습니다.

사고로 팔다리에 깁스를 한 직후에도 학교를 가야 했고, 열이 40도로 끓어 온 몸에 열꽃이 올랐을 때에도 학교를 가야 했기에, 초중고12년, 개근상을 받았습니다.

제가 사회에 첫 발을 내딛고 다녔던 회사는 5분 지각할 경우 시말서를 쓰는 회사였기에, 지각 없이 회사생활을 하기 위해 늘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했습니다.

성실, 또 성실… 얼마나 성실함을 요구 받고 그에 부응하며 살았는지, 제가 회사를 그만 두었을 때, 제 자리엔 두 명의 직원이 들어와 업무를 인계해야 했을 만큼 많은 일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제 사업을 하면서도 충분히 잠을 자 본적은 별로 없습니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성실과 완벽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바쁘게 뛰었습니다.

그런데 서른을 훌쩍 넘기고서야, 이런 성실함이 최고인 줄 알았던 저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사업을 하고 있던 저는 중요한 고객과의 약속, 중요한 회의에 교통사고 등 뜻하지 못한 상황에 의해 1분이라도 늦을 경우, 상대는 도리어 이해하고 넘어갈 상황에 대해 저 자신을 스스로 괴롭히며 자학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일이 조금이라도 잘못될 경우, 그 모든 것이 내 탓인 것 같고 내가 뭘 더 고쳐야 하나 거기에 모든 신경이 곤두서서 잘못된 것을 고치기 위해서 분석하고 고치고를 반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문제인 지, 몰랐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 그런 성실에 대한 강박증과 일중독, 완벽주의가 결국 저를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또한 높은 성실함에 대한 기준은 나이가 들 수록 점점 심해져서, 나를 용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남도 용납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변했고 결국 심한 우울증을 동반했습니다.

결국 그 증상을 치료받기 위해 몇 년간의 심리치료와 온갖 종류의 심리상담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 후 심리상담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많은 부분의 변화가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일에 대한 강박이 튀어나올 때가 있고, 여전히 성실하지 못하면 안 된다는 완벽주의가 튀어나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런 부분이 치유가 되면서, 또 우울증이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사람은 제 아이입니다.

제 아이의 24개월 때의 동영상을 보면, 말도 잘 못하는 아이가 꼬박꼬박 존댓말에 정확한 인사, 경직된 표정을 갖고 있는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닌 척, 혼내지 않는 척 하면서, 저는 아이를 남들 보지 않는 곳에서 심하게 많이 야단쳤습니다.

성실과 완벽을, 아직 아기였던 아이에게 강요 또 강요했지요.

 

하지만 심리상담을 공부한 후로는 제가 그 부분에서 많이 자유로워지면서, 아이의 얼굴은 정말 편안해졌습니다.

도리어 남들 보는 앞에서 잔소리를 좀 해도 감정적으로 소리를 지르지는 않고 꼭 필요한 것에 대해서만 야단치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이가 사회의 가장 중요한 구성원으로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해서 세계적인 인물이 되는 것보다,(예전엔 이런 것을 바랬으나) 지금은 아이가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저 뭘 하고 살든 삶의 이유를 찾아가며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과거의 저처럼 자기를 용서하지 못해, 수시로 우울해 죽고 싶은 마음이 드는 그런 성인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가정과 사회에서의 책임'이란 것의 정의를 알고 배우되, 남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 않는 사소한 실수에 대해 자신을 용서할 수 있고, 그래서 남도 용서해 줄줄 아는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대외적으론 경제 강국에 반열에 오른 대한민국의 현재 한국인들

 

누군가는 전쟁세대를 거쳐 현재 무사히 밥을 먹고 사는 것 만으로도 감사하고, 누군가는 군사정권을 기억하며 여전히 한국을 이만큼 만든 데에는 성실과 규율이 최고의 덕목이었다고 목놓아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군사정권의 붕괴 후 20년이 흘렀는데도 아직도 진정한 민주화가 자리잡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에 투명하지 못한 정치상황을 밝혀달라고 의견을 피력하고, 누군가는 일선에서 현재 대한민국의 문제점을 밝히고 바로잡기 위해 발로 뛰고, 누군가는 오늘도 그냥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성실함을 무기로 버티고 있습니다.

우리는 참 많은 일을 겪어낸 국민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으로 일군 현재 대한민국의 한국인의 이미지인 성실함이, 나라를 더 부강하게 만들고 자신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도구가 아닌, 만약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남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기가 된다면, 그 칼끝을 여러 방법으로 휘둘러 나도 다치고 남도 다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부디 현재 한국인의 장점으로 이미지화된 성실함이, 남의 잘잘못을 판단하는 무기가 되지 않고, 때론 실수를 저지른 나에 대해서도 용서하지 못하는 무기가 되지 않는, 좋은 도구로만 자리매김해, 앞으로의 대한민국 발전에도 순기능을 하는 한국인의 능력으로 사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용서하고 계신가요?

 

좋은 하루 되세요!

좋은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