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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요 그리스 여행

낯선 그리스에서 난 무엇을 찾고 있었을까

by 꿋꿋한올리브나무 2014. 5. 11.

  




며칠 전 로디니Ροδίνι라는 지역에 일이 있어 가게 되었습니다.

로도스 시 끝에 위치한 곳으로, 바다 쪽 경치가 좋고 시 안쪽보다는 큰 집을 좀 더 싸게 지을 수 있는 곳이라, 덜 복잡하고 상당히 넓게 주거구역이 자리잡고 있는 지역입니다.

  


* 사진은 모두 며칠 전에 찍은 것들입니다. *












그런데 평소처럼 일만 딱 보고 돌아서 나오려다가, 제게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로디니에 있는, 그간 가려고 벼르던 장소에 가보자 싶었습니다.

그 장소에서는 오래 전 아주 특별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로도스를 두 번째 여행할 때 있었던 이상한 일


오래 전 그리스 로도스를 두 번째로 다시 찾게 된 것은, 첫 번째 그리스 여행이 내게 준 충격과 여운이 말 할 수 없이 컸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랫동안 집 벽에 그리스 사진을 붙여 둔 채 노후에는 지중해가 보이는 그리스에 작은 별장을 지어 놓고 한국과 왔다 갔다 하며 글을 쓰며 살고 싶다라고 생각해왔었지만, 단 한번도 그리스에 아예 이민 가서 살아야겠다 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여러 나라를 해외 출장 다니면서도 이민에 대해서는 현실적으로 회의적이었기에 내 인생에는 없는 단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어떻든 노후에 글을 쓰겠다고 꿈에 그리던 그리스여서인지, 그리스로 첫 여행을 다녀 온 후로 그리스의 바다, 그리스의 유적지, 그리스의 하늘, 그리스의 햇볕, 그리스의 음악, 그리스의 사람들…

그 모든 것이 한국에서 여전히 바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제 곁을 맴돌며, 마치 제가 꿈이라도 한 바탕 꾸고 돌아온 것처럼 저를 쫓아다녔습니다.

어쩌면 태어나 처음으로 한국인이 단 한 명도 없는 곳에서 며칠을 지내게 된 것이기에, 그리스와 로도스에 대한 인상을 더 강하게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싶었습니다.

 

저는 확인을 하고 싶었습니다. 도대체 그리스의 무엇이 내게 그렇게 강하게 각인되었고, 한국에서의 일상을 침범하여 그곳을 잊을 수 없도록 흔들고 있는지를요.

그렇게 몇 달의 시간이 흐르고 답을 찾기 위해 두 번째 그리스 여행길에 홀로 오르게 되었습니다.

   

로도스에 온 지 사흘째가 될 때까지도, 저는 첫 여행에서 처음 얼굴을 보았던 친구 매니저 씨나 그 가족들에게 연락을 하지 않은 채, 혼자 이곳 저곳을 다니며 내가 여기에 왜 다시 오고 싶어 했는지 왜 그렇게나 그리스의 여운이 한국까지 쫓아와 나를 따라다녔는지 이유를 찾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호텔에서 나오면, 걷고, 또 걷고, 또 걷고...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습니다. 

음악을 들으며 걷다 보면, 입고 나온 원피스와 긴 머리카락이 바닷바람에 흔들리며, 마치 내가 걷고 있는 게 아니라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만큼 햇볕과 바람은 충분히 독특했습니다.

발에 물집이 잡힐 만큼 걷던 여행 사흘째 날, 저는 호텔에서 차로도 족히 30분은 떨어진 일반 주택가인 로디니까지 걸어오게 되었습니다.

여기가 어디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 내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복잡한 시내를 통과해 걷고 또 걸으며 상점 주인들에게 길을 물어 "저 신호등에서 왼쪽으로 가면 큰 길이에요." 등의 대답을 듣다 보니 로디니 라는 동네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그냥 그리스 도시의 흔한 주택가. 유적지도 관광지도 아닌 그런 그리스인들의 일상인 동네.

적막한 오후 3시.

오르막과 내리막 골목을 걷다 보니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마시지도 않고 걸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목이 말랐고 햇볕이 너무 뜨거웠습니다.

그렇게 발길이 닿은 곳은 자판기만 가득 있는 어떤 가게였는데요.

가게 안엔 음료, 샌드위치, 커피, 초콜릿 등을 파는 다양한 자판기들이 있었고, 그 곳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테이블이 몇 개, TV도 틀어져 있었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차가운 녹차 맛 아이스티를 꺼내, 가게 앞에 비치된 긴 나무 벤치에 앉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음료를 한 모금 마시며 의자에 등을 기대니, 길 앞쪽으로 저 멀리 바다가 보였습니다.




적막하리만치 조용한 그곳에서, 그렇게 앉아 있자니 정신이 맑아지며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에서의 바쁜 것들을 뒤로하고, 혼자 17시간을 날아서 온 낯선 이 곳에서 난 뭘 찾고 있는 것인가 싶었습니다.

이상하게 막 슬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 인생이 큰 고비를 넘어가는 중이었는데,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현실들이 한꺼번에 떠올랐습니다.

어쩌면 난 그리스로 도망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싶었습니다.



햇볕도 바람도 바다도 유적지도... 고대로부터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이곳으로.



죽을 것 같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잠시라고 잊을 수 있을 것 같은 이곳으로.

 

 

그 때 어디선가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밝은 갈색 머리의 남자아이가 제게 다가 왔고, 저에게 뭐라고 그리스어로 말을 걸었지만,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제 오른 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갑자기 제 뺨에 손을 댔는데, 흠칫 놀라 얼굴을 손으로 만져보니, 저는 울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하며 눈물을 가만히 닦아주었습니다.

저는 당황했고,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눈물을 털어내며 아이에게 웃어 주었는데, 잠시 후 아이 부모로 보이는 남녀가 다가와서 그런 아이와 저를 보더니 그냥 한번 빙긋 웃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자판기를 열어 들고 온 물건들을 채워 넣고 돈을 수거하는 듯 했습니다. 그러다 여성분이 제게 영어로 말을 걸었습니다.


"어디서 왔어요? 관광객 같은데, 어떻게 동네로 들어오게 되었어요?"

"아, 한국, 한국에서 왔어요. 그냥 걷다 보니…"

 

그녀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곤 아이를 챙겨 다시 가게 밖으로 사라졌습니다.

 

다시 혼자가 되자, '아무리 괴로워도 도망치는 게 답이 아닌데, 난 지금 그리스로 도망 온 것인가' 싶어 제 자신에게 실망스럽고 너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흘러 넘친 마음을 주워 담아 수습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5분쯤 걸었을까. 큰 길이 나왔는데, 그 동네의 상가들이 모여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사진관, DVD 가게, 정육점, 수블라끼 식당, 청과물을 파는 미니 마켓…

미니 마켓??? 가게가 무척 낯이 익었습니다.

그리고 그 미니 마켓 옆에 있는 가게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발이 딱 붙어 버린 듯 서 버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가게는, 다름아닌 매니저 씨 가족이 운영하는 가게였던 것입니다! 

(현재는 로도스 시 안의 다른 지역에 있습니다.)

그리스 경제 위기 전이었던 당시엔, 페인트를 비롯한 다른 인테리어 사업까지 겸해서 하고 있었는데, 첫 번째 그리스에 왔을 때 매니저 씨가 제게 소개해서 가 본적이 있었던 그 가게가 틀림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 넓은 로도스에서 제가 여기로 걸어오게 되었는지 정말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렇게 멍하게 가게를 바라보다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니, 문에 달린 종소리에 매니저 씨가 컴퓨터를 보다가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보았고, 너무 놀라서 입을 딱 벌린 채 저를 쳐다 만 보고 있었습니다.


"너, 너, 너….언제 그리스에 온 거야??? 그리고 여긴 어떻게 찾아 온 거야???"

"…나도 모르겠어. 어떻게 여기로 오게 되었는지. 걷다 보니 발길이 닿은 곳이 여기였어."


"뭐? 한국에서부터 걷다 보니 여길 왔다고 지금 말하는 거야??? 뭐라는 거니??

그리고 지난 번엔 밤에 여길 들러서 이곳 지리를 전혀 모를 텐데, 정말 어떻게 찾아 온 거야? 

택시 타고 왔어? 너한테 여기 주소가 있었던가?

아니 그보다도, 어떻게 그리스에 다시 온 거야? 

며칠 전에 통화할 때만 해도 휴가가 안되어서 당분간 여행은 못 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리고 호텔은 어딘데?? 호텔 지역에서 여긴 많이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된 거야???"


"나도…모르겠어.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

 



그렇게 이상한 일이 있었던 그 여행을, 며칠 후에는 끝내야 했고 저는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 저는 새 인생을 사는 기분으로 하나 하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고통스러웠지만 문제와 얼굴을 마주하며 해결할 일들은 해결해 나가고, 포기할 일들은 깨끗이 버렸습니다.

 


 

제가 며칠 전 로디니의 그 자판기가 있던 가게 앞을 다시 찾았던 이유는, 당시 여행에서 일어났던 그 일을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저 제가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장소가 되어버렸고 그 가게도 많이 바뀌어서, 더 이상 예전의 그 느낌은 전혀 가질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곳을 찾았습니다.

이제 그리스는 저에게 더 이상 현실을 피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닌, 그냥 현실이니까요.

하지만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어서 그 자리에 간 것이 아니라, 제가 현재 사는 곳과 좀 떨어진 그 장소에서 잠시라도 예전 그 기분으로 앉아서 나를 환기시키고 싶었습니다.

나에게 마법 같았던 장소였던 그곳에 잠시 앉아, 생각을 정리하며 현실에서 저를 괴롭히는 여러 일들을 털어버렸습니다. 해결할 수 없는 일은 생각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은 정면 승부해서 하나씩 해결해 나가자고 말입니다.

비록 더 이상 관광객차림이 아니라서 할 일없이 거기에 앉아 있는 듯 보이는 제게, 지나가는 그 동네 사람들이 계속 그리스어로 "괜찮니?" 말을 걸긴 했지만요.

 

힐링이 되는 장소라는 것이 그러고 보면 참 별게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남들이 멋지다고 말하는 그런 장소가 아닌, 내가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 장소면 되는구나 싶습니다.


그래도 며칠 전 그곳에서, 지금보다 많이 어려서 인생의 해답을 훨씬 몰라 괴롭던 오래 전 일을 추억하며,

지금은 비록 당시처럼 어리지도 순진하지도 순수하지도 않지만,

좀 더 인생에 대해 뻔뻔하고, 담담하고, 대범해져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인생에 대한 정답은 없지만

찾고 싶었던 방향들을 찾아가며, 한 발 씩 내딛으며 용기있게 살아나갈 수 있다는 것도요.

 



 

여러분, 잘 쉬시는 일요일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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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 '멀쩡한 여자가 조국을 버리고 남자에 미쳐 그리스에 살고 있는 정신 나간 여자. 정신 차려라.' 라고 말한 독자님. 비록 참다 못해 독자님의 지난 댓글들까지 모두 차단하긴 했지만, 이 말만은 꼭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남자에게 미쳐서 이곳에서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조국을 버린 것도 아닙니다. 독자님의 여러개의 댓글에 화가 나기 보다 슬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말투로 보아 독자님은 저보다 연장자인듯 했는데, 살아오신 인생이 그렇게 흑백으로 나뉠 만큼 단순하셨다니 참 부럽다 싶었습니다.

제 인생은 독자님보다 비록 짧지만, 그리 단순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 남자와 결혼을 한 것도, 한국에 살다가 결국 그리스에 살게 된 것도 모두 단순하고 쉽게 이루어지지 못 했습니다. 차라리 독자님 말씀처럼 단순한 이유로, 제가 그리스로 이주한 것이라면 사는 게 좀 쉽겠다 싶습니다.

제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면, 독자님 요구처럼 '남편을 꼬셔서 한국에서 다시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조금이라도 제대로 현실에서 그날 그날의 만족감을 갖고 감사할 것들을 찾아가며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독자님이 말씀하신 정신차리라, 는 말 한마디는 새겨듣겠습니다. 하지만 독자님이 경험한 인생과 지식의 세상의 전부는 아니란 사실을 부디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더 이상 국제 사회는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 내에서도 그런 사고만 갖고 있다간 진정 나라에 보탬이 되는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 남긴 힘든 시대가 되었습니다. 부디 좀 더 넓은 세계관으로 2014년에 맞는 현실적인 시각을 갖게 되시길 바랄 뿐입니다. 독자님이 그렇게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한국을 위해서라도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