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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그리스 문화

날 20분 행복하게 만든 그리스인 남편의 거짓말

by 꿋꿋한올리브나무 2014. 4. 2.

 

 

 

 

 

 

"지금 어디야?"

"나? 이제 마리아나 데리러 학교에 가려고."

"긴급 상황이야. 애 데려다 놓자마자 어머니에게 맡겨 놓고 빨리 여행가방부터 싸."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홀랜드(네덜란드)에서 연락이 왔는데, 당장 출장 오래. 급한 일이 있다고. 근데 티켓을 두 장 보내 주겠대. "

"뭐야. 무슨 일인데 그렇게 급한 출장이 다 있어."

"아무튼 시간 없어. 3시간 후 비행기야. 서둘러."

 

이런 뜬금 없는 말과 함께 바쁘다며 매니저 씨는 전화를 툭 끊어 버렸습니다.

기가 막힌 상황이란 것은 알지만, 순간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는데요.

 네덜란드라니…

그것도 출장으로 공짜 티켓이라니…

내가 아테네에 못 가게 되버린 게 이렇게 보상되는 건가 싶었습니다.

 

몇 년 전에 경유하느라 네덜란드 스키폴 공항에 두 번 머물렀던 것이 네덜란드 땅을 밟은 유일한 경험이었던 저는, 가서 하루 이틀만 머물며 거기서 일만 하다 오게 되더라도, 무조건 좋다 싶었습니다.

암스테르담은, 초등학교 때 안네의 일기를 포함해 안네 프랑크의 일생에 대한 몇 권의 책들을 표지들이 닳도록 읽고 또 읽으면서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으니까요.

 

안네가 마지막까지 숨어있던 암스테르담의 집 (www.annefrank.org)

 

 

이런 갑작스런 매니저 씨의 출장은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일 년에 한 두 번 정도는 있는 일입니다.

주로 아테네나 그리스 내의 다른 지역에서 해결되지 않는 금고 등을 고치거나 열기 위해 소환되는 경우인데, 대개 매니저 씨를 찾 쪽인 회사나 호텔, 혹은 개인이 급한 경우이기 때문에, 비행기와 호텔 일체 비용을 그쪽에서 부담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아테네 은행의 큰 금고를 손 보는 경우에는 다른 전문가들과 공동작업을 하기도 하는데, 보통은 저희 사무실의 다른 직원과 함께 출장 가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드물지만 이제껏 터키 등 다른 나라에서 갑자기 매니저 씨를 찾는 경우도 있었고, 매니저 씨가 네덜란드와 독일에서도 세미 참석을 하면서 그쪽에도 업계의 지인들이 있는 지라, 저는 이 갑작스런 출장이 전혀 말 안 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다만 이제껏 이런 종류의 출장에 저를 데리고 간 적은 단 한번도 없었는데 이번엔 왜 기술적인 도움도 안 되는 나를 데리고 가려고 할까 이상했지만, 제가 휴가 휴가 노래를 부르니 이번엔 저를 데리고 가려나 보다 생각했던 것이지요.

 

물론!

한 가지 의심해보아야 할 것은, 평소 매니저 씨가 저를 놀려 먹길 좋아하기 때문에 심심풀이로 던져 본 말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설령 저를 놀리려고 전화한 것이라 할 지라도, 사무실까지 이 네덜란드 출장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러 가는 동안 만큼은 그냥 저는 여행길에 대해 상상해 보려고 했습니다.

네덜란드에서 매니저 씨가 일을 하는 동안 저 혼자 거리를 걷고, 커피를 마시고, 이곳 저곳을 돌아보고…

그런 모습을 운전하는 동안 내내 상상했습니다.

생각만 해도 무척 행복했으니까요!

(그럼, 오늘 저녁 포스팅은 네덜란드에서 하는 거야? 독자분들이 깜짝 놀라시겠지?? 이런 생각까지도 했답니다.^^)

 

 

google image.gr

 

샤방3 아~ 좋다! 딱 좋다!

 

 

 

20분 후에 사무실 앞에 도착했고, 저는 학교에 가기 전 시간이 5분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급하게 사무실로 걸어들어갔습니다.

매니저 씨는 구석에 앉아 일을 하고 있었고, 아버님과 잠깐 지나다 들른 셋째 고모님과 사촌 니키가 아이스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저의 급한 등장에 세 사람의 시선은 동시에 제게 꽂혔는데, 마치 왜 여기에 왔는지 알겠다는 듯 이구동성 이렇게들 말을 했습니다.

 

 

"올리브나무. 너 결국 왔구나. 홀랜드는 무슨.

넌 아직도 얘 말에 속니? 오늘 만우절이잖아!"

 

ㅋㅋㅋ   헐 ㅎㅎㅎ

Πρωταπριλιά

(그리스에서는 만우절을 '4월의 첫날'이란 뜻인 쁘로따프릴리아 라고 합니다.) 

 

 

만우절..

그랬습니다. 만우절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집안 페인트칠 공사하는 것에 정신이 팔려 오늘이 만우절인지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럼 그렇지. 역시 날 놀린 거였구나.

어쩐지. 웬일로 나를 출장에 데리고 가나 했다…일 도와줄 다른 멀쩡한 직원을 놔 두고…'

 

 

시간이 없어 "역시 그런 거였군요!" 라며 씁쓸하게 돌아서 나오는데, 사촌 니키가 마시고 있었던 프레도에스프레소에 얹힌 달달한 휘핑크림이라도 왈칵 들이키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흥4

 

 

부랴부랴 애를 찾아 집에 와 밥을 먹이고 또 페인트 칠 작업을 둘러는데, 매니저 씨가 제게 전화를 했습니다.

매니저 씨는 아까 구석에서 일을 하느라, 제가 바람같이 사무실에 다녀간 것을 못 봤던 모양이었습니다.

 

"가방은 다 싼 거야? 우리 이제 공항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슈퍼맨

 

 

저는 기가 막혀서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오늘 만우절인 거 다 알거든. 왜 이래 진짜."

 

 

매니저 씨는 제가 이제 안 속는다는 게 재미있었던지 하하하하 큰 소리로 웃더니, 갑자기 한국말로 이렇게 말 하는 게 아니겠어요?

 

"아아아~ 또똑해. 여자. 알았네. 거짓말 알았네."

축하2

 

"또똑해. 여자. 가 아니라 똑똑한 여자겠지."

요염

 

 "Whatever! 하하. 그래도 재미있었지?"

우하하

 

"에휴…내가 지금 당신 농담에 대응할 힘도 없거든.

페인트칠 신경 쓰느라 이리 저리 물건 옮기고 카펫 빨고 했더니

허리가 끊어지게 아파. 진짜. 그만 끊어."

안습

 

 

그렇게 전화를 끊고 이렇게 저렇게 일을 다시 하는데,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날 워낙 놀리는 매니저 씨라 의심은 했지만, 그 거짓말을 믿고 싶었던 내 자신에게 정말 웃음이 나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 만우절이면 선생님들을 기함하게 하는 장난들을 반 아이들과 단체로 치던 것도 차례로 떠올랐습니다.

사는 게 바쁘다고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일들이었지요.

 

숙제를 하던 마리아나는 제 생각을 알기라도 하는 듯 한 마디 거들었습니다.

" 엄마, 우리 반 아이들이 서로 머리에 이상한 게 붙어 있다고 장난치고 놀았어. 하하. 오늘은 만우절이잖아요! 거짓말은 나쁘니까 안 해야 하지만 서로 장난치는 것은 괜찮지요??? 엄마는 학교 다닐 때 만우절에 어떤 장난쳤어요?"

"엄마는… 고등학교 때 엄마 반 옆이 남자선생님들을 위한 화장실이었는데, 엄마 반 어떤 애가 문 옆에 걸린 화장실 표지판을 우리 반 것과 바꿔 걸어 두었어. 수업하고 있는데 남자 선생님들이 자꾸만 우리 교실로 들어오시며 깜짝 놀라곤 하셔서, 그 때마다 수업이 중단되어 우리끼리 꺄악꺄악 소리지르고 정말 많이 웃었었어. 그 땐 하루라도 수업 안 하려고 그래 놓고 좋아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선생님들께 굉장히 죄송한 일이네? 하하하."

 

비록 20분 저를 행복하게 만들었다가 허무개그로 끝나버린 매니저 씨의 만우절 거짓말이었지만, 그 덕에 먼지 앉은 기억들을 꺼내 보며 딸아이와 잠시 즐겁게 웃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즐거운 하루 되세요!

 좋은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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