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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과 독백

이제는 남편에게 제 입을 다물 때가 되었습니다.

by 꿋꿋한올리브나무 2013. 8. 22.

 

 

이런 이야기가 부끄럽지만, 먼저 제 성격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몇 번인가 언급한 적 있지만, 저는 싸우는 것을 크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분쟁이 일어나는 것도 싫고 언성을 높이는 것도 싫습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참거나, 좋게 넘어가거나, 긍정적으로 상대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편입니다. 뭐가 잘못 되었다고 따지는 것도 대개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좀 손해 보더라도 큰 피해를 입은 게 아니면 그냥 말 없이 지나갑니다.

그래서 이제껏 살아오는 과정에서, 사람을 제대로 파악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저와 알고 지냈다고 하면서도 제가 화를 내지 않으니 그냥 뭘 해도 다 수용해 줄줄 알고 한계 없이 제 맘대로 대하다가, 나중에 저에 대해서 깜짝 놀라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또한 가까운 사람이면 사람일 수록 저에 대해 고개를 절레절레 하며, 물렁한 줄 알았더니 예민하기 짝이 없는 까다로운 취향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가까운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 중 하나는, 싸우기 싫어하는 제가 정말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수준으로 화가 난 경우, 언성 높이지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상대의 입막음을 할 만큼 논리적으로 쏘아붙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진짜 화가 나면 말발이 끝내 주게 발휘된다는 것입니다. 제 스스로 생각해도 100분 토론 나가도 될 지경으로 상대를 논리로 몰아붙입니다.

 

오늘 제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제 성격에 대한 이야길 주절거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요 며칠 남편 매니저 씨와의 대화에서 느낀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는 남편에게 아무리 화가 치미는 상황이 되었을 때도, 저는 이렇게 말발을 세운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말로 다툰 적은 있지만 대부분이 그냥 다투고 금새 화해하고 끝나는 경우가 많았고, 혹은 남편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경우나 큰 잘못을 한 경우, 그 순간에 좀 참았다가 그 다음날 남편이 기분 좋을 때 어제의 일에 대해 내가 어떻게 느꼈는지 조곤조곤 이야기 해서 남편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잘 이해시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남편은 다혈질이기 때문에 제가 같이 언성을 높이는 경우 도리어 더 심하게 흥분한다는 것을 결혼 초에 이미 알았기 때문에 더욱 조심했던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조심하던 제가 요 며칠 남편에게 100분토론에 가까운 반박할 수 없는 논리를 내세우며 낮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던 일들이 몇 번 있었던 것입니다.

전에 그러지 않았는데, 요즘 갑자기 그러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요즘 고모님께서 저희 집에 머무시면서 아무래도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많아서 예민해진 것도 있었지만 그게 주 요인은 아닙니다.

결정적인 이유는...

제 그리스어가 일취월장한 데에 있었습니다...

불과 얼마 전, 독자님들에게 제 그리스어에 대해 네이티브로 오해한 와이너리 아주머니 이야길 하며 스스로 자랑스러워했었는데, 그게 이런 부작용을 낳게 될 지 미처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어를 편하게 잘 말 하게 되면 될 수록, 그리스어로 표현할 수 있는 어휘가 많아지고, 그것은 본래 한국어로 상대에게 참다가 논박해서 상대의 입막음을 하는 그 행동을 하게 만든 것입니다.

또 이 글에 대해서 고깝게 들으시는 분들은, 그래 너 그리스어 잘 한다고 자랑하냐? 하실 지 모르지만, 지금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의 핵심은 그게 아닙니다.

저는 제 문제를 인식하고 앞으로 다시 그러지 않기 위해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남편을 그렇게 논리로 제압해 말문을 열지 못할 만큼 빠르고 긴 말들을 내뱉었을 때, 저는 그만 남편의 표정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얼굴 뒤 눈빛 너머의 표정을 말이지요.

 

며칠 전 처음으로 그렇게 다다다다다다 논박을 했을 때는 그냥 놀라움! 그 자체의 표정이었습니다.

제가 결혼 초, 같이 언성을 높이며 싸울 때에도 짓지 않았던 표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차분한 말투로 다다다다다다 말로 이겨 먹고야 만 아내의 말을 들은 남편은 적잖은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입을 닫아 버렸지요.

오늘, 딸아이가 종일 만들어 둔 석고를 만지지 않았으면 하고 부탁했는데도 괜히 철 없이 만져보고 시험해 보다가 결국 깨뜨려 버린 남편의 행동에, 호기심에 그러다 실수한 게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 너무 화가 나서, 또 다시 다다다다다다다다 제가 말 이겨 먹고야 말았을 때...

남편의 표정을 보았습니다.

반박할 수 없는 제 논리에(왜 당신이 잘못했는지 일절, 이절, 삼절, 사절...) 말문이 막혔고, 아무 말도 못하고 제 얼굴만 쳐다보며 그 큰 눈을 깜빡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지난 번과 달리 그 눈빛 너머로 심하게 상처받은 그 내면의 또 다른 모습이 고스란히 느껴진 것입니다.

순간 깨달았습니다.

'내가 심했구나.'

 

 

 

차라리 그리스어를 잘 못할 때가 나았다 싶었습니다.

분명 남편이 잘못했지만, 일부러 깨려고 한 것도 아닌데, 그리스어가 지금보다 서툴 때는 즉각적으로 논박하기 보다 "왜 그랬어.." 이 한마디를 한 후, 다음 날 다시 조용히 남편에게 "다음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런 행동을 당신이 할 때 나도 속상하고 그렇거든." 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하면, 남편은 늘 많이 미안해 하며 다시 똑같은 잘못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남편이 아무리 잘못했더라도 무시하거나 소리지르거나 논박해서 이겨 먹고 그래서 공공연하게 상처 주고...그것은 분명히 딸아이 보기에도 가장으로서 남편을 세워줄 수 없는 태도라고 늘 생각해왔었기에 이제껏 상당히 조심했던 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어 좀 잘 구사하게 되었다고, 그렇게 별 것 아닌 일에서 이겨 먹고 남편을 상처 주었을 때, 제게 결과적으로 돌아오는 이득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 순간의 승리의 기쁨? 그것이 가정을 바로 세워주진 않으니까요.

부부가 힘의 균형을 맞춘 다는 것은 기싸움을 하거나 서로 싸워서 한번씩 승리를 나눠 갖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빠는 아빠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가정 내에서 각자의 역할이 있는 것이고, 이것은 사회적으로 부부 중 누가 얼마다 더 지위가 높으냐 와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밖에서 엄마가 잘났든 아빠가 잘났든, 가정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며 아내는 남편을 세워주고 남편은 아내를 존중하는 모습을 갖고 있을 때 자녀들도 그 안에서 질서를 배워가고 안정적으로 성장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늘 제가 이런 생각대로 잘 해 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제까지는 우여곡절과 시행착오 끝에 남편이나 아이가 반복적으로 실수하거나 잘못을 저질러도, 아무리 내가 화를 참아왔다 해도 그런 식으로 즉각적으로 사람을 몰아붙이지 않으려고 무척 애써왔었고, 대개는 화나는 감정이 좀 사그라진 후에 얘기한 내용들 덕에 남편이 조금씩 저와 맞추어가고 단점은 바꾸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의 제 행동은 지금까지 쌓아온 것을 다 뒤엎을 수 있는 태도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남편에게 제 입을 다물 때가 되었습니다.

아내에게 세워진 남편이기에 자녀가 아버지를 늘 존경하고, 아내를 존중하는 남편 덕에 자녀도 장성한 후까지 엄마를 존중할 줄 아는,

그런 가정을, 부족한 저이지만 오늘도 꿈꿔봅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감사합니다!

좋은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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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에 답글 달아 드리지 못해 무척 죄송합니다. 고모님께서 저희 집에 머무시다가 오늘 오스트리아로 돌아가시는데 그 후에는 좀 더 여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곧 답글을 쓸게요~

* 내일 드디어 한국에서의 있었던 일을 쓴 포스팅으로 여러분을 찾아 뵙겠습니다. 사진을 보았고, 써 놓은 글에 첨부해 두었답니다^^ 감사해요! 여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