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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그리스 문화

멀고 낯선 그리스식 파티에 참석했던 이유

by 꿋꿋한올리브나무 2014. 2. 24.

 

 

 

"뭘 굳이 학원 파티까지 참석하려고 그래? 그것도 한 시간이나 떨어진 동네에서 파티를 한다며. 안 피곤하겠어?"

제가 마리아나 영어학원에서 주최하는 가장무도회 초대장을 보여주자 남편이 제게 했던 말입니다.

그리스의 가장무도회 아뽀끄리에스απόκριες 파티 시즌을 맞아 학원에서도 파티를 연다고 하는데, 하필 로도스 시 밖의 학원 분점이 있는 지역에서 열린다고 했고, 날짜가 금요일 저녁이라 제가 이 파티를 가려면 한국어 수업을 1시간 앞당겨야 하며, 수업을 하러 갈 때 애를 미리 다 준비 시켜서 데려가서 수업이 끝나자 마자 출발해 컴컴한 밤의 외곽도로를 1시간을 달려야 참석할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로도스 시에서 1시간 떨어진 파라디시 지역에 있는 영어학원 분점

 

게다가 토요일에 전교생이 함께 하는 대규모의 학교 가장무도회 파티에도 참석할 건데, 제가 굳이 불편함을 감수하고 애를 학원 파티에 데리고 가려 하나 매니저 씨는 고생을 사서하네 싶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런 류의 아이들 파티는, 어른들은 재미가 없고 순전히 애들 좋으라고 참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저라고 낯선 장소에서 낯선 사람들을, 그것도 낯선 그리스인들을 150명이나 단체로 만나야 하는 것이 썩 내킬리가 없습니다. 동양인 얼굴은 분명 저와 딸아이 뿐일 테니 한국에서 낯선 사람을 단체로 만나는 것과는 또 다른 불편한 시선이 존재할 거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학교 파티는 더 대규모이지만 해를 거듭하며 친한 엄마들이 많으니 오히려 지금은 부담이 없는데 말이지요.

그리고 저보다 더 수줍음이 많은 딸아이는 파티라는 기대감도 갖고 있지만, 이쪽 학원 친구들보다 그쪽 지역의 낯선 사람들이 많이 올 거라는 사실에 살짝 긴장해서 그냥 안 가는 게 낫지 않나 싶은 눈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멀고 낯선 곳에서 열리는 그리스식 가장무도회 파티에 굳이 참석하려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돌아보니 마리아나가 영어 학원을 다닌 지 몇 달이 되어갑니다.

그간 제가 영어를 가르치니 자꾸 애한테 소리를 질러서 이건 못할 짓이구나 싶어, 수소문을 하다 사무실 근처에 좋은 학원을 발견하고 등록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학원을 선택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원장님이 20년 넘게 영어학원을 운영한(그리고 경제 위기에도 끄떡없는) 베테랑이라는 것과 주변 입 소문이 좋다는 것, 결정적으로 영국식 영어를 가르치는 그리스 영어 교육에 맞게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거나 영국인인 선생님들도 계시지만, 미국인 선생님도 계신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요즘 그리스에서도 미국 드라마와 늘어가는 미국 관광객의 영향으로 미국 영어에 대해서도 알아 두면 좋다라는 인식이 생겨 이렇게 두 가지 영어를 가르치는 학원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인데, 이 학원은 이미 10년 전부터 미국인 선생님이 함께 해왔다고 들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마리아나를 학원에 데려다 준 지 며칠 만에 드디어 미국인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요.

그리스에 이사온 이후로 관광객이 아닌 이민자 미국인을 만날 일이 많지는 않아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리스는 미국인 이민자가 많은 나라는 아닙니다.) 

한국에 살 때 제겐 우연히 알게 된 미국인 친구가 몇 명 있었는데, 외롭게 타향살이를 하는 친구들을 병원에 데려다 주기도 하고 필요한 지역 사회 모임에 소개해 주기도 하면서 어쩌다 보니 친하게 지내게 되었기에, 그리스에서 처음 만나는 미국인 선생님이 마치 타향살이를 했던 한국의 제 미국인 친구들을 다시 만나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게 했습니다.

 

선생님의 이름은 신시아Cynthia였습니다.

사십 대 중반쯤 되었다고 스스로를 소개한 아주 동안 얼굴의 그녀는, 미국 뉴저지 출신으로 미국에서 그리스인 남편과 만나 결혼해서 살다가 아이를 낳고 그리스로 이민 오게 된 경우였습니다.

이민 이유는 정말 그리스인 남편을 둔 사람답게 남편의 연로하신 부모님 때문이었는데요.

저희 사무실 거래처 중에도 미국에서 30년을 살다가 연로한 부모님을 혼자 둘 수 없어 그리스로 역 이민 온 그리스인이 세 사람이나 있어서, 신시아 선생님의 상황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오래 자리잡은 터전을 다시 떠나는 것이 쉽진 않았을 텐데요.

연로한 부모님을 미국으로 모시고 가기엔, 부모님께서 그리스의 안정된 연금을 두고 갈 수 없어서 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부모님의 친척과 지인들의 끈끈한 관계를 끊어버릴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참, 이런 것을 보면 대단한 그리스인들의 가족애입니다.

대박

 

 

저는 학원에 딸아이를 데려다 주러 갈 때마다 신시아 선생님과 대화를 하며, 그녀에 대해 많은 것을 알 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살 때 미술과 영어를 복수 전공했다는 것, 그래서 뭐든 잘 만든다는 것, 채식주의자(비건vegan)란 것, 휴대폰을 쓰지 않고 오래된 중고차를 탈 만큼 검소하다는 것, 하지만 웬만한 옷을 만들어 입을 만큼 솜씨가 좋아서 멋쟁이라는 것....

단아하고 유쾌한 목소리를 가진 신시아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는 일은 제게 늘 큰 즐거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다 크리스마스 직전 폭우로 도로 전복사고가 이어지던 날, 학원 아이들이 대거 결석을 하며 저와 선생님은 다른 아이들을 기다리는 동안 좀 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는데요.

이민의 이유가 되었던 그녀의 그리스인 시어머님께서는, 그녀의 가족이 그리스로 이민 온 후에 기력을 되찾아 건강하게 사시다가 한달 전에 노환으로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올 크리스마스와 새해맞이는 파티 없이 조용히 지낼 거라고 말하는 그녀는, 시어머님을 정말 사랑했던지 그 말을 하며 몹시 슬퍼 보였는데요.

저는 저도 모르게 그릭 커피를 만들던 그녀의 손을 덥석 잡으며 "아휴..아직도 슬프시군요." 라고 말을 해버렸습니다.

선생님은 큰 눈을 더 크게 뜨더니 제게 "고마워요." 라고 말했고, 그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이후로 선생님과 저는 부쩍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이었습니다.

"올리브나무! 좀 멀고 이쪽 학원아이들은 많이 참석하지 않을 예정이지만 당신이 가장무도회 파티에 꼭 왔으면 좋겠어요. 물론 아이들이 즐거운 파티겠지만, 선생님들은 모두 무도회 의상을 입기로 했는데, 제 의상은 제가 한 땀 한 땀 손바느질로 직접 만들었거든요. 올리브나무에게 꼭 제 옷을 보여주고 싶어요!!"

학원 가장무도회 파티 초대장과 함께 그녀가 건넨 말이었습니다.

 

그녀와 앞으로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겠다 '드문 예감' 때문에, 저는 그 파티에서 새로운 그리스인들을 분명 많이 만날 거라는 약간의 불편함을 뒤로하고 그 파티에 참석하게 된 것입니다.

낯선 파티에 가길 주저하는 딸아이에게도 분명 좋은 시간이 될 거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물어 물어 찾아간 지역에서의 그 파티는 큰 즐거움을 주었습니다.

같은 지점 학원 아이들이 많이 오진 않았지만 선생님들이 정성을 다해 준비한 파티라 아이들에겐 정말 재미있었고, 저는 거의 말을 하지 않고 테이블에서 커피를 마시며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감탄이 절로 나오는 요정 옷을 만들어 입은 신시아 선생님 이야길 들으며 낯선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즐거울 수 있었습니다.

 

신시아 선생님, 어떻게 저런 멋진 옷을 만들어 입었을까요?! 대단해요!!

 

 

 

 

 

 

이번 시즌 파티에 입을 새 옷을 사 주었는데도, 그 옷은 학교 파티 때 입으면 된다며

이제 내년엔 입기 어려운 단이 껑충 짧아진 귀한 한복을

이날 마지막으로 한번 더 입고 싶어했던 마리아나입니다. 

  

 

아이들 사진을 찍어 주는 저 낯선 엄마는 모델 출신일까요? 어쩜 저런 몸매를......

 

 

 

그런데 이 파티를 갈까 말까 고민했던 딸아이는 이날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엄마, 낯선 장소에서 낯선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일은 정말 쑥스럽고 부끄럽고 불편한데,

그래도 엄마가 용기를 내서 나를 데리고 여기에 오느라

기름도 차에 많이 채워야 했고, 언니들 한국어 수업도 더 빨리 해야 했고, 파티 참가비도 내야 했는데 

막상 오니까 새로운 친구도 많이 생기고, 엄마랑 드라이브도 하고, 처음 보는 동네 구경도 해서 정말 좋아요.

나도 다음에 이런 일이 생긴다면 덜 쑥스러워 하도록 용기를 내 볼게요. 엄마 고마워요!!"

 

 

그렇게 생각해 주다니... 제가 도리어 고맙기만 합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좋은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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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고기 먹는 파티와 금, 토 가장무도회 파티에 지칠 대로 지쳤는데도 불구하고, 일요일에 또 가족들이 단체로 저희 집을 찾아 주어서 또 남은 고기를 구워 먹고 돌아갔습니다...이렇게 허망하게 쉼도 없이 월요일이 오다니요.ㅠㅠ 여러분 파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