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목요일 하루 일과가 끝나고, 요즘 방과 후 학교 합창단을 시작한 딸아이를 늦게 학교에서 찾아 퇴근을 하는 길이었습니다.
해가 길어져 아직 날이 저물지 않은 시간이었고 평소처럼 복잡한 시내 길을 피해 외곽 길로 돌아 집으로 오고 있었지요.
운전을 하며 딸아이의 합창단에서 있었던 이야길 들으면서도 마음은 딴 곳에 가 있었습니다.
정리해고를 당했다는 친구 엘레니의 소식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늘 모임에서 보는 친척 중에도 둘 이나 정리해고 되었다는 소식을 막 접한 터라 마음이 착잡한 게 편치 않았습니다. 그리스의 국가 경제는 확연하게 나아지고 있지만 그 덕에 긴축 재정에 들어간 기업들의 후폭풍이 서민들의 삶 속으로 크게 파고드는구나 싶었고, 비록 제 일이 아니지만 그런 현상들이 반가울 수만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딸아이 이야길 듣는 둥 마는 둥 운전을 하는데, 하늘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비가 내내 왔던 날답지 않게 지대가 높은 도로에 걸린 하늘은 참 예뻤습니다.
그런데 해가 기우는 그 하늘에 분명 낙하산처럼 보이는 물체가 둥둥 떠다니는 게 목격되었습니다.
저는 급히 차를 갓길에 세웠고, 딸아이에게 잠깐 기다리라며 차에서 내렸습니다.
휴대폰으로 확대해서 바라보니, 분명히 그건 낙하산 비슷한 물체에 사람이 앉아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도대체 저 사람이 어디서 뛰어내린 건가 싶었습니다.
게다가 공중을 선회하며 하강하는 속도가 워낙 느려서 마치 모터라도 달고 있는 비행체 같아 보이기까지 했는데요.
제가 지나던 도로는 로도스 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도로였기 때문에, 그 낙하산은 분명히 언덕이나 산이 아닌 비행기나 헬리콥터에서 뛰어 내렸을 것이란 추측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정신 없이 사진을 찍으며 그 사람이 천천히 석양을 즐기며 땅으로 내려오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설 렌 다…'
참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외모와 꼭 맞는 적절한 역할로 연기하는 모습을 볼 때, 오래된 소원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아님 정말 기대했던 음식을 먹기 위해 맛집 식당의 문을 밀고 들어가면서, 혹은 밤에 기도를 하려고 앉아 있다가 어떤 마음의 깨달음 때문에…
가끔 저는 설렌다는 감정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 조차도 최근엔 거의 느껴 본 적이 없었고 게다가 이날의 설렘은 몇 년 동안이나 느껴 본 적이 없는 종류의 설렘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저는 어릴 때부터 높은 곳에서 조용히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을 몹시 좋아해서, 가끔 엉뚱한 행동들을 하곤 했습니다.
아주 어릴 땐 놀이터 정글짐 꼭대기에 올라가서 가만히 서 있기도 했었고, 중학교 땐 교실 창문 닦는 난간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 보기도 했었고, 더 자라 성인이 된 이후에는 잘 오르지도 못하는 높은 산을 꾸역꾸역 올라가 정상에서 하염없이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었고, 어쩌다 장거리 비행이라도 하게 되면 비행기 창문으로 이착륙 때 멀어졌다 다가오는 땅의 풍경을 꼭 들여다보곤 했습니다.
마리아나가 3살 무렵, 한국의 어느 놀이터 정글짐 꼭대기에 저와 함께 앉아
함께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사진입니다.
2003년 끔찍했던 12시간 지리산 등반 때 대청봉 근처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2006년 한라산에서 내려 오다가 도로에서 저 멀리 바다를 보며 찍은 사진입니다.
그런 이유로 우연한 계기로 하게 되었던 스카이다이빙 역시, 몹시 두려웠지만 결국 낙하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풍경에 흠뻑 빠질 수 있었고, 시드니의 하버브리지 등반도 마다 않고 할 수 있었는데요.
2004년 비싸고 무서웠지만 결국 아래를 내려다 보기 위해 등반했던 시드니 하버브리지
놀이공원에 갈 때 꼭 자일로드롭을 탔던 이유도, 수직하강 하는 그 기분은 끔찍하지만 자일로드롭이 공중에 잠시 머물 때, 천천히 빙그르 도는 그 2~3초의 짧은 정적의 순간이 정말 좋아서였습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익스트림 스포츠 자체를 좋아한다기 보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여유 있게 내려다보는 것을 좋아했던 것입니다.
이런 저에게, 이날 그 낙하산에 매달려 천천히 공중을 선회하며 땅으로 내려오던 사람이 보고 있던 풍경은 과연 어떤 것인지 정말 궁금할 수 밖에 없었는데요.
그냥 언덕에서 보아도 아름다운 몬테스미스 도로에서의 바다 풍경인데, 그 사람은 도대체 어떤 다른 것을 보려고 저 위에 용감하게 올라가 앉아 있는 걸까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낙하산의 사람이 제게 부럽다 라는 감정이 아닌 설렌다 라는 감정을 느끼게 한 것이 이상해서 잠깐 생각해보니, 그날은 비가 온 후라 잔디 사이 사이에 물 웅덩이가 많았고 자칫 그곳에 착지하게 될 수도 있는데 그것을 무릅쓰고 황홀한 석양을 바라보며 낙하산에 앉아있는 그 사람이, 그가 바라보고 있을 풍경만큼이나 멋져 보였기 때문인 듯 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조금의 불편함이나 조금의 위험은 감수하는 용감한 사람의 모습이었으니까요.
얼굴 생김새도, 혹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젊은 사람인지 늙은 사람인지도 육안으로 확인이 안 되는 사람에게 설렜던 것은, 어쩌면 내가 나이가 들고 일상이 바빠질 수록 자꾸만 잃어가고 있는 '좋아하는 것을 얻기 위해 내야 하는 불편한 용기'를 그 사람은 지니고 있는 듯 보였으니까요.
넋 놓고 사진을 찍으며 그 사람을 바라보는데, 딸아이가 세워진 자동차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엄마! 집에 가야지요?" 저를 불렀습니다.
어느덧 해는 많이 저물어 있었습니다.
차에 타 집으로 돌아오는데 최근에 보았던 영화 하나가 생각 났습니다.
저도 이젠 불편한 용기를 좀 내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무모한 일탈이나 즉흥적인 도전이 아닌 -그런 일들을 반복하기엔 제 일상이 그것을 허락하지 못할 때가 너무 많으니까요.- 바쁜 일상이지만 잠시라도 짬을 내, 운동을 좀 더 열심히 하는 불편한 용기를 내보아야겠다고요.
그런 매일의 용기들이 쌓여 어느 날 건강하고 가뿐한 몸 상태로, 어쩌면 저도 낙하산 위에 다시 오를 수 있는 날이 올지 누가 알겠어요. 지금은 기회가 공짜로 주어진다 해도 낙하산을 탈 수 있는 건강 상태가 전혀 아니니 말이지요.
그런 불편한 용기들이 쌓이다 보면, 다시 한국에서 지리산을 종주할 날이 올 지도요. 혹은 해발 2,917m의 그리스 올림푸스 산을 등반하러 떠날 날이 올 지도요.
그렇게 다시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날들이 올 지도요.
여전히 꿈을 꿀 수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젊은이라고 했던가요.
저는 아직 젊은이이고 싶고 언제까지나 젊은이이고 싶습니다.
여러분 힘찬 한 주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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