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대로라면 저는 오늘 아테네에 가 있어야 합니다.
이래저래 일이 있어 다녀와야 했는데, 때마침 한국어 학생들인 디미트라와 갈리오삐가 아테네에 다녀올 일이 생겼다고 해서 한두 달 전부터 함께 가기로 이야기가 되었었습니다.
그런데 2주 전부터 업무 스케줄과 갈 여건들이 막 꼬이기 시작하더니 결국 지난 금요일, 최종적으로 이번엔 다녀오지 않는 걸로 결정을 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금요일 저녁 한국어 수업을 하러 가서 이 사실을 전하는데, 얼마나 속이 상하던지요.
업무적인 일로 가는 것이지만, 사실 그녀들과 저는 이번에 아테네에 가면 한국 식당에 함께 매 끼니마다 가자고 잔뜩 의기투합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전…
남이 해주는 한국음식이 먹고 싶었으니까요…
그리고 여기선 먹을 수 없는 두부도 작정하고 먹자고 생각했었지요.
사실 몇달 전 쯤엔가 꿈을 꾼 적이 있었는데, 꿈 속에 어떤 한국인 아주머님이 홀홀단신으로 로도스로 이민을 오셨는데 도착하자마자 해안 도로 식당가에 태극마크가 크게 달린 식당 플랭카드를 내걸더니 한식당을 여신 것입니다. 그것도 고급 한정식집이 아닌, 한국의 여느 북적이는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백반집이나 기사식당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전 아주머님께 인사도 드릴 겸 식당에 들렀는데, 아주머님은 마치 로도스에서의 당신의 새 이민생활 따윈 전혀 안중에 없고, 오직 한식당을 열기 위한 CIA 훈련이라도 받고 온듯 비장한 얼굴로 음식만 종일 만들고 계셨습니다.
뭐랄까, 마치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나 봄직한 장면같은 이상한 꿈이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서 어찌나 기가막히던지 혼자 너털웃음을 웃었는데요.
이민 초기엔, 두부를 한 판을 사서 그 많은 양을 다 구워 양념 두부를 해서 먹던 꿈이나 만두를 산처럼 쌓아 놓고 먹는 꿈 등을 자주 꾼 적이 있습니다. 근데 요즘은 그럭저럭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한국 음식을 요리하게 되면서 이런 류의 꿈을 거의 꾸지 않았었는데 참 오랜만에 꾸어본 한국 음식 먹는 꿈이었던 것입니다.
아테네에 일 때문에 가는 것이긴 해도 가사일과 북적거리는 가족들로부터 이틀 정도 해방되니, 조용히 서점에 들러 책을 구경하고 친구들과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면서, 정말 큰 쉼이 될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기대가 컸던 만큼, 결국 못 가는 쪽으로 결정이 되면서 그 실망감은 이루 말을 할 수가 없었는데요.
친구들에게 이번에 아테네에 함께 못 가게 되 버렸다고 전한 뒤 한국어 수업을 예정대로 하고 집에 돌아오면서, 함께 수업에 따라가서 거실에서 숙제를 하며 수업 끝나길 기다렸던 딸아이에게 이런 저런 이야길 했습니다.
"에구. 언제 엄마는 쉰다냐.
언제 엄마는 남이 해 주는 한국 음식 좀 또 먹는다지?
언제 엄마는 좀….
아, 아테네 못 가게 되어서 진짜 속상하네."
제 중얼거림에, 딸아이는 걱정스런 목소리로 "엄마, 그렇게 속상해?" 라고 물었습니다.
집에 와서 남편 동수 씨에게도 이런 속마음을 털어 놓았습니다.
"내가 진짜 아테네에 이번에 가고 싶었는데,
아테네에서 할 일도 뒤로 밀리고
여기 상황도 지금은 갈 수 없는 여건이고, 난 진짜 속상해."
동수 씨는 어쩐 일로 조용히 제 말을 듣고 있더니,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진짜 가고 싶으면 다녀와. 업무 아니라도 그냥 하루 이틀 쉬고 오든가."
말이라도 그렇게 해 주니 정말 고마웠지만,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못 가는 것인데 억지로 다녀오겠다고 할 수가 없었고, 저는 "괜찮아. 그냥 속상해서 말 한 거지 억지로 가겠다는 말이 아니야." 라고 대답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집에 오자마자 방에 올라가서 조용히 있던 마리아나가 내려와 제게 뭔가를 건네는 것이었습니다.
"엄마, 이것 한 번 보세요."
얼마 전 자기가 선물로 받았던 파우치였습니다.
열어보니, 거기엔 심부름 쿠폰들과 '엄마 사랑해요'라는 카드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 만으로도 충분이 이미 감동했는데, 종이가 또 하나 있어 꺼내보니 거기엔 웬 가짜 비행기 티켓이 들어 있는 게 아니겠어요?
아…작년 여름 한국에서 어린이 직업체험을 하러 갔던 곳에서 입장권대신 주었던 가짜 비행기 티켓을 아직 갖고 있었던 모양인데, 거기에 제 이름을 써 넣고 출발지 로도스, 도착지 아테네 라고 써서 제게 건넨 것이었습니다.
그러며 마리아나는 제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엄마, 만약 아테네 갈 돈이 필요한 거라면 내 통장에 있는 돈 엄마가 다 써도 돼요. "
"아이구…고맙다. 우리 딸. 근데 그런 거 아니야. 괜찮아 엄마."
저는 얼른 뽀뽀쿠폰을 꺼내 건넸고, 녀석은 제 뺨에 마구 뽀뽀를 했습니다.
딸아이의 위로 덕에 폭풍 감동해서 잠시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그걸 가만히 지켜보던 동수 씨가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는 것입니다.
"근데 한국말 속상해가 무슨 뜻이야?'"
잉?
여태 속상해 라는 한국말도 몰랐단 말이야?
그러고 보니, 제가 그런 말을 남편 앞에서 여태 거의 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웬만큼 크게 맘 상한 일이 아니면 속상한 얘길 말로 잘 꺼내지 않는 게 제 단점인데, 요즘은 바꾸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아스프로에 관한 이야기도 남편에게 여태 안 했네요.)
말의 뜻을 설명하니 엉뚱하게도 동수 씨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속상해! 난 이런 뜻으로 쓸 거야.
속은 Sock! (영국식 영어 발음으로는 양말socks을 싹스가 아닌 쏙스나 썩스에 가깝게 발음하지요.)
그리고 이~~~상해!
그래서 속상해는 '이상한 양말 한 짝'이란 뜻이야!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렇게 자기 혼자 말도 안 되는 한국어 해석을 하고 미친 듯이 웃어대는데, 그 모습이 정말 웃겨서 저도 같이 웃어버렸는데요.
몇 분을 그렇게 웃고 났더니, 동수 씨 제게 이런 말을 건넸습니다.
"이제 기분 좀 나아졌어?"
오잉? 저 기분 좀 풀리라고 일부러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했던 모양이네요.
딸아이와 방식은 다르지만, 속상한 제 마음을 풀어주고 싶었던 마음은 같았나 봅니다.
아테네에 못 가게 되어 무척 아쉽지만, 가족들의 위로 덕분에 오늘도 또 몸을 일으켜 하루를 시작해야겠지요.
아테네는 다음에 일 때문에 어차피 다녀와야 하니, 그 땐 친구들 없으니 조용히 혼자 다녀오게 될 테고 어쩌면 더 쉴 수 있고 좋을 수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해봅니다.
근데...한식당에서 혼자 엄청 시켜 놓고 먹을 때 사람들이 놀라지나 말아야 할 텐데 말이지요^^
남들이 놀라더라도 다 먹겠어요!!!!!
(이 그림처럼 얼굴 터지도록 먹을지도 몰라요^^;;)
내게 벌어진 어려운 일에도 반드시 얻을 것이 하나는 있으니 어차피 벌어진 일, 좋은 점만 봐야겠습니다!
여러분, 우리 오늘도 파이팅하기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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