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전쯤, 알고 지내던 그리스인 커플 스타브룰라Σταυρούλα 빠나요디스Παναγιώτις로부터 청첩장을 받았습니다.
그 청첩장을 남편 매니저 씨에게 건네 받고 저는 좀 의아했는데요.
저희 부부가 그 커플을 따로 밖에서 만난 건 제가 이민 온 이후로 딱 한 번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2년 전쯤의 일이라, 그리스 북부 데살로니끼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다닌 그녀와 나눴던 대화는
"데살로니끼 날씨는 어때? 그곳이 그립니?" 가 다였습니다.
물론 전용 해변을 낀 호텔과 식당, Bar를 운영하는 부유한 집안의 딸인 스타브룰라를, 저는 그 식당에 다른 지인들을 만나러 갔을 때 본 적도 있었고, 그녀가 저희 옆집에 살다 결혼한 엘레프테리아의 친한 친구여서 우연히 합석해서 본 적도 있습니다.
호텔을 경영하는 그녀의 엄마와 스타브룰라
그렇지만 사적으로 따로 만난 적이 한 번 밖에 없고, 그것도 제가 평소 불편해하는 친구인 엘레프테리아 커플과 함께였던 만남이었기에, 저는 친한 사이도 아닌데 청첩장을 받고 당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몇 주 전 마사와 처음 그리스어 수업을 시작하던 날, 마사 역시 그녀에게 청첩장을 받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겠어요!
저는 '이 결혼식이 엄청난 규모구나' 그제서야 깨달았고, 청첩장을 다시 확인해보니 피로연 장소가 로도스에서 피로연 장소로는 알아주는 1,000명을 수용할 수 있고 춤추는 홀이 완비된 식당이었습니다.
'아, 뭐 나를 그냥 예의상 초대했구나' 싶었고 그렇다면 이 결혼식에 굳이 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수 밖에 없었는데요.
친하지도 않은 사람의 결혼식에 가려고 새 드레스와 축의금이나 선물을 준비하는 노력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사는 오스트리아에서 오기 전부터 이 결혼식이 있을 거라는 얘길 남자친구에게 전해 들었고, 그래서 미리 드레스와 구두, 파티용 백까지 준비해 왔다고 말하는 게 아니겠어요!
저는 마사에게 물었습니다.
"저기, 마사. 너 스타브룰라와 친해?"
"응. 난 그녀와 친해."
"응? 어떤 계기로 친해진 거야? 난 별로 안 친해서 그냥 가지 말까 하는데…"
오스트리아에 살며 그리스를 왔다갔다하는 마사가 어떻게 스타브룰라와 친해진 것인지 정말 궁금했는데요.
그녀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전에 엘레프테리아 결혼식 전에, 신혼 집 침대에서 새 침대보 펼치며 신랑신부 축하하는 전야 행사 있잖아. 그 때 나와 그녀가 같이 침대보 귀퉁이를 잡았거든."
2년 전, 엘레프테리아 결혼식 전야 행사에서 침대 네 귀퉁이를 잡고 신혼 부부를 위해 새 침대보를 씌우고 있는 친구들.
보이지 않는 쪽에 마사와 스타브룰라가 있었습니다.
저는 마사의 말에 말문이 탁 막혔는데요.
그도 그럴 것이 엘레프테리아의 결혼식은 2년 전이었고, 그 전야 행사에서 침대보 귀퉁이를 같이 잡았다는 이유로 그녀를 친구로 생각한다는 마사의 말이, 정말 순진하기 짝이 없는 십대 소녀의 대답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그렇구나…그럼 넌 스테르고스와 함께 결혼식에 가려는 거지? 잘 다녀와. 우린 그냥 안 가려고."
그녀가 무안할까 싶어 저는 이 이상의 말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스타브룰라가 SNS에 전체 공개한 결혼식 피로연에서의 사진입니다.
참 행복해 보이네요.^^ (전 이 글을 쓰기 전까지 그녀와 제가 SNS 친구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 엘레프테리아의 아들, 즉 옆집 요상한 할머니의 증손자 돌잔치에 참석하기 전에, 그 모임에 분명히 갓 결혼한 스타브룰라 커플이 올 텐데 싶었고, 저는 매니저 씨에게 혹시나 싶어 물었습니다.
"결혼식은 못 갔지만, 이번 주에 돌잔치에서 마주치면 뭐라도 결혼 선물을 해야 할 만큼, 그 남편과 당신과는 가까운 사이인 거야 혹시라도?"
"음, 빠나요디스는 경찰공무원인데 경찰이 마약상들 집 급습할 때 내가 금고 여는 일을 몇 번 같이 했었잖아. 그 때 친해졌지."
"뭐야? 그럼 친한 사이인 거잖아? 그럼 혹시 스타브룰라와도 친해?"
"음, 뭐 그녀 부모님이 하는 호텔 금고를 전체 교체할 때 매번 일을 했으니까 친하지."
"어머! 그럼 결혼식에 갔어야 하는 거잖아. 거래처인데! 왜 안 친하다고 했어. 그럼?"
"그냥….결혼식 가기 귀찮았다고…정말 피곤하다고 요즘…."
이 철 없는 남편아...그런 얘긴 미리 해줘야 하는 거야...
그러니까, 침대보 귀퉁이를 함께 나눠 든 마사보다 저희 가족이 그 커플과 더 가까운 사이였던 것입니다...
(부랴부랴 뭘 선물할까 고민하다, 이미 결혼식이 몇 주 지나 미안한 마음에 신혼 집에 놓을 만한, 그러나 맘에 들지 않아도 거추장스러워 버릴 필요는 없는 공책크기보다 좀 작은 그림들을 그리게 된 것입니다.)
그림을 그리며, 결혼식에서 결국 친한 사람이 별로 없어 군중 속의 고독으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후일담을 전해준 마사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생각 하다보니, 이제 갓 이민을 결정하고 그리스에 정착할 마사의 모습이, 영락없이 저의 이민 초기 친구 사귀기에 혼동을 겪던 모습과 그렇게 비슷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정말 외로웠고, 한국에서 공부한 그리스어들은 머리 속에만 맴돌며 입 밖으로 잘 나와주질 않을 때여서 누구든 영어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과는 무조건 친구가 되길 시도했었습니다.
자주 대화를 하던 스타벅스 직원 리아를 친구라고 착각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는데요.
미국에서 3년 생활을 했었던 루마니아인 리아는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고, 대학에서의 전공이 심리학이라, 심리상담공부를 몇 년간 했던 저와 대화할 거리가 참 많았습니다.
커피를 사러 갈 때마다 대화를 시도했었고, 그때마다 따뜻하게 자기 얘길 터 놓는 그녀와 이야길 나눈 지 몇 개월 째, 저는 저와 대화를 나누어준 그녀가 고마워 오스트리아 여행길에 비엔나 시청 앞 크리스마스 풍경이 있는 엽서를 사다 주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저는 그녀에게 밖에서 한번 따로 보자며 전화 번호를 물었는데, 그녀는 제게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올리브나무, 난 손님에겐 전화번호를 주지 않아. 원하면 네 번호를 내게 주든가.
생각해보고 시간 나면 연락할게."
그날의 충격은 상당히 컸는데요.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보니, 한국에서 사람을 사귀었다면 그렇게 허술하게 마음을 터 놓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와 맞는 사람인지 아닌지, 상대의 성격이나 인격은 어떠한지 정도는 그럭저럭 몇 번 얘기해보고 파악할 수 있을 만큼은 사회생활을 한 저였습니다. 그래서 쉽게 파고드는 사람에게 도리어 '날 뭘 안다고, 친한 척이래?' 라는 식의 쌔한 반응을 보여, "쉽게 곁을 내준 듯 하다가 참 어느 부분 이상 다가가기 어려운 벽을 치고 사네, 뭐 살면서 상처가 많았나 봐?" 라는 뼈있는 말을 듣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외로운 이민생활을 하다 보니, 그런 이성적인 촉수는 다 죽어버리고 누구라도 말만 할 수 있으면, 언어만 통하면 친구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마사가 그녀와 각별한 친구였다면, 그녀 결혼식 전 친구 파티에 초대 받았어야겠지요.
이 파티 사진이 이렇게 클럽 홍보 사진으로 공개적으로 올라왔는데 말이지요.
늦은 밤 그림 세 장이 완성되었을 때쯤, 속으로나마 이제 갓 이민 오려 하는 마사의 '친구에 대한 기준'을 성급하게 판단했던 제 오만에 대해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고, 1,000명을 초대할 만큼 인맥이 넓은 스타브룰라에게 있어 마사가, 겨우 침대보를 나눠 든 사이가 아닌 진짜 친구가 되도록, 제가 다리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제, 스타브룰라 부부는 자동차 이모빌라이저를 고치러 저희 가게에 들렀는데, 지난 주말 돌잔치 때 전해 주었던 그림이 맘에 든다며 저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그녀의 의아한 표정에서, 그녀가 전에 없던 저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음을 느낄 수 있었는데요.
신혼 집이 저희 가게와 가깝다며 언제 꼭 차 마시러 오라는 그녀의 초대에, 저는 진심으로 "꼭 갈게." 라고 답했습니다.
어쩌면 마사 덕분에, 제게 새 친구가 하나 생길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듭니다.
여러분 행복한 금요일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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