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삼십 대 중반이 되도록 살며, 제게 물을 마시는 물컵이란 이런 것이었습니다.
회사에서 자주 보던 종이컵,
보통 식당에서 주던 물컵,
가끔 가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물을 담아 주던 유리컵,
그리고 집에서 물을 마시던 흔한 머그컵.
<google image>
이렇게 드라마에서도 볼 수 있듯, 보통 한국 가정에서 식사를 할 때 머그컵 형태의 손잡이 있는 컵을 쉽게 사용하는 것처럼요.
매니저 씨는 한국에 사는 동안, 물을 마실 때 저의 이런 머그컵 사용에 대해 단 한 번도 뭐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물론 매니저 씨에게 이 컵을 주고 물을 담아 주었을 때도요.
그런데 그리스에 이민을 온 후 매니저 씨는 이런 익숙한 머그컵에 물을 담아 마시는 저에게, 그간 마치 못한 말을 쏟아 놓듯, 잔소리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넌, 왜 물을 커피컵(Κούπα꾸빠)에 담아서 마시니? 물은 유리컵(Ποτήρι뽀띠리)에 담아 마셔야 하는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한국에서 물 마시려고 이런 머그컵을 사용할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잖아!"
"그거야,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가정에서는 손잡이 있는 컵에 물을 담아 마시니까 그냥 한국 문화는 그런가 보다 싶어서 말을 안 한 거지. 하지만 그리스는 다른 문화라고. 물은 손잡이 없는 유리컵에, 손잡이 있는 머그나 커피잔에는 뜨거운 커피나 차를 마시는 거야. 아이스커피인 그리스 커피 프라뻬도 손잡이 있는 잔에는 만들어 대접하는 게 아니라고. 물컵으로 손잡이 없는 유리컵을 사용하는 것은 다른 유럽 국가도 비슷하다고."
"뭐가 그렇게 법칙이 많아. 항상 한국이 예의범절 따지는 게 많다며, 그리스는 한국보다 자유로운 문화라고 주장하던 게 누구지? 자유롭다며 뭐 이렇게 물 하나 마시는 걸 따지고 그래?"
"그거야 한국에서 물을 어른에게 받아 마실 때, 두 손으로 꼭 받아라 그러니까 그러지. 그리스는 그렇진 않잖아. 네가 우리 부모님한테 한 손으로 물을 받는다고 뭐라 하겠어?"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난 그냥 편하게 물 마실래. 새삼 깨지기도 쉬운 손잡이 없는 긴 유리컵에 물을 마시는 불편함을 집에서 까지 감수하고 싶진 않아…"
사실 제가 이렇게 말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는데요.
저는 어릴 때부터 '새는 손'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주 의식적으로 깨지기 쉬운 것을 들고 옮길 때는 깨뜨리지 않는데, 아무 생각 없이 그런 물건을 들고 가다가 손에서 미끄덩하며 물건이 깨져버린 적이 정말 여러 번 있습니다.
게다가 걸음이 상당히 빠른 편인데 총총 걸어가다 갑자기 조금 튀어나온 1mm 어긋난 보도블록에 걸려 넘어지는 경우도 평생 동안 아주 많았습니다. 예전에 제 친구가 "네가 같이 얘길 나누고 걸어가다가 순식간에 땅으로 꺼져버려서 정말 깜짝 놀랐어."라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니까요. (이에 관한 무수한 일화들은 다음 기회에 또...ㅠㅠ)
그래도 모성이란 놀라와서, 아이를 낳은 이후로는 손이 새는 증상과 땅으로 꺼지듯 넘어지는 증상이 몇 년간 사그러드는 듯 보여, 이 불치병이 치료가 되었구나 싶었는데요.^^
하필이면 이 '새는 손' 증상은 그리스 이민 후 본격적으로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수시로 저희 집으로 모이는 그리스인들 덕에 저는, 저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리스 물컵 문화를 따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찬 음료를 많이 마시는 여름이 긴 그리스인 가정에는 이렇게 긴 유리컵이 대략 10~40개 정도는 구비되어 있는데요.
google.gr 에 그리스어로 물컵(ποτήρι νερού) 이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그리스의 일반적인 가정용 물컵들입니다.
손님에게 커피를 대접할 때 조차 물을 꼭 유리잔에 담아 함께 내 놓는 것이 이들의 문화이기 때문에, 조금만 손님이 오는 집이라도 유리컵은 필수로 갖추어야 하는 품목이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어쩔 수 없이 유리컵들을 구비했고 식사, 파티, 차 마시는 각 종 모임까지 이 유리컵을 내 놓기 시작했는데요.
불행히도 그 횟수가 많아질 수록, 제가 유리컵을 깨는 속도도 빨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렇게나 많은 유리컵을 설거지 해 본 적도 없는지라, 주로 설거지를 하다가 손이 미끄러지며 깨뜨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무리 조심하려 해도, 살짝만 미끄러져도 유리컵은 왜 그렇게 잘 깨지던지요.
나중엔 유리컵만 봐도 가슴이 덜컥 내려 앉으며, 이거 또 깨뜨리는 것 아닌가 심장이 두근두근 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민 후 첫 여름을 보내고 유리컵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되어, 저는 유리컵 세트를 전체를 다시 구매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큰 파티에서는 유리컵과 아주 비슷한 플라스틱 컵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요. 다행히 시부모님께서는 제가 설거지가 많아서 그러나 보다 싶어 이에 대해 크게 뭐라 하지 않으셨고, 야외 파티가 많은 그리스엔 참 다양하고 예쁜 플라스틱 일회용 컵들이 판매해 그럭저럭 좀 격조 있는 파티라도 구색을 맞춰가며 플라스틱 컵을 식탁에 배치할 수 있었습니다.
유리컵과 아주 흡사한 느낌의 플라스틱 물컵
그리고 몇 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는 시어머님 댁에서 유리컵 설거지도 자주 해왔고, 다른 친척, 친구들 집에서도 유리컵 설거지를 거듭 돕다 보니, 더 이상 유리컵을 많이 깨뜨리지 않는 신기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플라스틱 컵을 치우고, 유리컵을 다시 사용하게 되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 여름에 유리컵을 한 개 밖에 깨뜨리지 않았답니다. (그래도 파손율 제로를 만들 수는 아직 없는 모양이네요.--;) 그리고 유리컵을 씻을 때도 깰까 봐 두근거리는 증상이 훨씬 덜해졌답니다.
하지만 올해는 저희 시어머님이 컵을 많이 깨뜨리셔서 빌려가셨던 저희 집 컵도 수가 많이 줄어들어 결국은 다시 사야 하는 것을 보면, 그리스 여성들에게도 이 유리컵 설거지가 모두에게 쉽지 만은 않은가 보다 싶네요.
참, 파티가 아닌 저 혼자 물을 마실 때는 그냥 머그컵을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래서 유리컵 트라우마가 극복된 것인지도요.
저희 가족만 집에 있을 때는 이제 이 머그컵에 물도 커피도 열심히 마셔요.
손잡이가 있는 컵이 이렇게 고마울 수 없습니다.^^
여러분 즐거운 월요일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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