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친구 매니저 군이 한국에 첫 여행을 왔을 때, 북적이던 놀이동산에서 단어 하나 때문에 20분 넘게 실랑이를 벌여야 했습니다.
그리스어를 거의 모르던 저는 당시 영어로만 대화를 했는데, 의사소통에 문제가 되었던 단어는 바로 은행이란 단어인 "Bank"였습니다.
정신 없이 관광 안내를 하다 보니, 현금이 떨어진 줄 모르고 돌아다녔고 계속 매니저 군이 돈을 쓰게 할 수만은 없어, 은행에서 돈을 찾아 오겠으니 잠시 기다리라는 저의 말을, 매니저 군은 도저히 못 알아듣고 "어디? 어디에 간다고?"를 반복했습니다.
결국 20분 실랑이 끝에 저는 ATM 이란 단어를 사용했고, 그제서야 "아하! 방크!" 라고 말하는 게 아니겠어요???
그 때까지 뱅크라고 발음했던 제 영어를 못 알아 들었던 것입니다.
A는 정직하게 '아'로 발음했고, O는 정직하게 '오'로 발음했습니다.
이후 그리스에 자주 드나들면서 저는 도대체 대부분의 그리스인들이 왜 영어발음을 그렇게 이상하게 하는지, 그래서 제 영어를 못 알아듣는지 잘 이해가 가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제 발음을 못 알아 듣고, 제가 그들 발음을 못 알아듣는 원인은 이러했습니다.
1. 그리스를 비롯한 남유럽에서의 영어는 '미국의 언어'가 아닌 '영국의 언어'라는 기본 개념이 있고, 학교와 학원에서 초등학교 때부터 가르치는 영어는 미국 영어가 아닌 영국 영어입니다.
얼마 전 저희 집에 들어온 영어와 독일어를 중심으로 가르치는 외국어 학원 홍보지 입니다.
오른쪽 위에 선명하게 보이는 영국 국기가 보이시지요?
이 학원에서는 해마다 방학 때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간다고 하네요.
2. 영국식 영어에 딱딱 끊어지는 억양을 가진 남유럽 언어(그리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발음이 섞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매니저 씨가 좋아하는 온라인 탱크게임에서 이 탱크들Tanks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는 "땅쓰" 라고 발음하는 게 아니겠어요?
이는 영어의 'Tt 티'와 모양이 비슷한 그리스어의 'Ττ 따프'가 대개 '뜨' 발음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 내에서 매년 수 많은 관광객들을 마주하다 보면, 서유럽에 해당하는 프랑스인, 독일인, 오스트리아인 등의 영어도 미국식 영어보다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영국식 영어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물론 발음 면에서는 보통의 그리스인들 만큼 딱딱한 영어를 구사하진 않지만, 상대적으로 관광국인 그리스보다는 영어 표현을 유창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생각보다 적어서 좀 놀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으로 북유럽 사람을 만났을 때, 저는 서광이 비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바로, 그들은 한국인인 저에게 익숙한 '미국식 영어'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매니저 씨의 오랜 친구인 안토니스는 브라질인 엄마에 그리스인 아버지를 둔 그리스인입니다. 10년 전, 노르웨이 여성 티네와 만나 노르웨이로 이주했는데, 매니저 씨는 그 친구를 만나러, 혹은 그 커플의 결혼식에 들러리로 참석하기 위해, 몇 번 노르웨이 오슬로에 머물곤 했습니다.
매니저 씨가 2005, 2009년 노르웨이 오슬로에 갔을 때 찍었던 사진입니다.
(티네와 토니로 불리는 이 커플의 결혼식에 대한 재미있는 얘기는 다음에.)
그들은 해마다 그리스에 여름 휴가를 보내러 올 때, 자연스럽게 저희집에 들르곤 했습니다.
올해 그들이 저희 집을 방문했을 때, 저는 노르웨이인인 티네에게 그 동안 궁금했던 북유럽의 영어 교육에 대해 묻게 되었습니다.
미국인과 거의 다를 바가 없는 유창한 미국식 영어를 구사하는 그녀는 이런 대답을 해왔는데요.
"노르웨이를 비롯한 스웨덴, 덴마크 등 북유럽은 학교에서 미국식 영어를 교육하고 있어. 당연히 성인이 된 후에 업무적으로도 미국식 영어를 사용할 일이 더 많아. 북유럽과 미국은 대개 경제적인 교류가 다른 유럽에 비해 많은 편이거든. 이 세 나라는 각각 다르지만, 비슷한 면이 많고 현재는 경제적 우방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다만 핀란드의 경우 역사가 짧고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와 다르다고 느껴서, 사실 그다지 국가간에 친한 편이 아니고 이 세 나라와 다른 면이 많아." |
저는 다시 물었습니다.
"아무리 미국식 영어를 학교에서 배운다고 해서, 어느 나라나 이렇게 유창하게 미국 영어를 구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북유럽 국가들이 그럴 수 있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인구가 적은데 지하자원이 많은 나라들이잖아. 노르웨이에서는 한국인 이민자들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유는 이런 지하자원 개발 관련 업체의 주재원으로 오는 경우가 많아서야. 적은 자국 인구를 보완할 타국의 지식인들이 필요하고, 그렇게 여러 국가의 이민자들과 함께 일하기 위해서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해야 업무가 가능한 것이지. 그런 면에선 관광국인 그리스도 마찬가지 아닐까? 다만 발음이 좀 좋은 편은 아니지만 영어 표현은 유창한 사람이 많잖아. 어떻든 우린 영어 발음을 유지 하기 위해 미국드라마를 많이 본다고. 하하하" |
"미국드라마를 많이 보는 것은 그리스인들도 마찬가지야. 아마 전 유럽이 그럴걸? 그래도 발음은 미국인 같지 않은 걸 보면, 학교 교육에서 어떤 영어를 가르치느냐가 참 중요하다 싶어. "
"그건 그래."
그런데 그녀와 오랜만에 대화를 하며, 제 영어 역시 이곳 사람들이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다분히 영국식 발음이 되어버렸음이 여실히 드러났는데요. 이 두 가지 방식의 영어를 다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날이 평생 올까 싶은 암담한 기분도 들었습니다. 반대로 영국식 영어를 사용했다던 안토니스는 북유럽에 살며 미국식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미국식 영어를 교육 받는 한국인이 유럽을 장기 여행하거나 이민을 준비할 경우, 어느 유럽으로 가느냐에 따라 준비해야 하는 영어가 다른 것입니다.
잠깐의 여행이야 어떻게든 의사소통이 되겠지만, 생활을 하게 된다면 분명 의사소통의 불편함이 오기 때문입니다.
특히 남유럽을 여행하시게 된다면, 부디 A를 아, O를 오 라고만 발음하는 <영국식+남유럽식 영어 발음>을 좀 알아 두셔서, 저처럼 dollar '달러'와 '돌라' 라는 발음 차이 때문에 장시간 서로 못 알아 들어 진땀흘리는 그런 일은 겪지 않으시길 바랄게요.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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