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T 마트에 노트북을 사러 들렀습니다.
6년 가까이 써온 노트북이 몇 달 전 드디어 부팅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워낙 처음에 싸게 구입했던 것이라 고치는
값이 더 아까운 듯 해서(그리스는 AS 비용이 한국보다 더 비쌉니다.),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미리 아버지께 부탁을 드렸
더니 제게 딱 맞는 사양의 좋은 물건을 알아 봐 두셨던 것입니다.
미리 봐 두신 노트북을 함께 보러 가기 전에, 저희 엄마는 제 딸아이와 휴대폰 가게에 뭘 물어봐야 한다며 그 쪽으로
가셨고, 저는 같은 층에 위치한 각 종 휴대폰 단말기A/S, 전자제품 A /S 센터에 아버지와 함께 들르게 되었습니다.
저는 휴대폰 배터리를 하나 더 구입하려 했었고, 아버지께서는 얼마전 새로 구매하셨던 휴대폰 단말기에 대해 직원에게
물어볼 게 있으시다며 다른 쪽으로 가셨습니다.
사실 저는 오랫동안 서울 안 동쪽 지역에 살았었기 때문에 T마트가 생길 때부터 보아온 터라, 이곳이 용산이나 인터넷
과 가격 차이가 있든 없든 그런 실용적인 부분과 상관없이 이곳에 대해 늘 친근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제게는 낯익은 이 장소에 가면서, 예상과 달리 상당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요.
이유는 제가 한국에 들어온 하루 사이에 고국에서 해외 이민자로서의 이상한 증상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먼저 이 이상한 증상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한국인이 전혀 없는 곳에 살다가 한국인을 갑자기 많이 만나니 단어를 정확하게 쓰고 그리스어를 섞어 쓰지않기 위해 지나치게 조심하게 되었는데, 그러다보니 모르는 사람과 말을 할 때 자꾸 말투에 약간 문어체 같은느낌이 묻어 나는 것입니다! (동생을 제외한 한국인은 8개월 만에 처음 만난 셈입니다. 8개월 전엔 1년 만에 처음 만났었습니다.)
드라마 배우가 만약 이런 제 말투를 사용했다면 틀림없이 발연기 소릴 들었을 그런 말투랍니다…
나 배우도 아닌데, 발연기 하고 있는거야?
2. 저는 해가 강한 그리스에 살다 보니 피부가 많이 까매졌는데요. 옷차림이나 화장스타일도 유럽형으로 자연스럽게 바뀌어서 인지, 모르는 한국인들 중에 이 동양인 얼굴을 보고도 자꾸 영어로 말을 건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저께 인천 공항에서 편의점과 환전소 직원이 그랬었고, 어제 T마트에서도 제게 영어로 말을 건넨 분이 한 분 계셨습니다.
전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스에선 그렇게 동남, 동북, 중앙아시아 전 국가의 대표 얼굴처럼
온갖 나라사람으로 다 오해 받더니,
이제 고국에서는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으로 오해 받는 걸까요???
3. 그리스에서의 언어 습관이 한국어를 사용할 때도 튀어나와서 자꾸만 지나치게 "고맙습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네요?" 라고 말을 한다든지, "네~! 그렇군요! 알겠어요!" 라는 외화 더빙톤의 맞장구를 친다는 것입니다. (오늘 친구와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계속 이 외화 더빙톤이 튀어나와서 정말 미~~~~~~춰 ~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다행히 친구는 눈치를 못 챘어요.)
나, 뒤 늦게 새 직업의 가능성을 찾은거야? 외화 더빙 하는 성우?
"알겠어요! 존! 그렇군요~!"
안 그래도 아직 시차가 적응이 안 된 상태라 이게 꿈인지 생신지 싶고, 오늘 먹은 만두 떡볶이 돌솥 비빔밥이 꿈에서 먹은
것인지 아닌지 헷갈릴 지경인데, 위의 세 가지 증상까지 동반되니 제 스스로가 몹시 어색하고 낯설 수 밖에 없었고,
T마트에 근무하시는 낯 모르는 분들에게 되도록 어색하지 않게 말을 하려고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던 것
입니다.
그런데 제가 만났던 이 A/S 센터 직원은, 세계에서 친절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한국 A/S 센터 직원들, 그 중에서도
하필 특히 더 친절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제게 필요한 설명을 해 주고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는 젊은 남성이셨는데요.
일은 잘 하지만 필요한 말 외에는 댓구를 잘 하지 않는 조금은 불친절한 그리스 A/S 센터 직원만 몇 년간 접해 오다가,
친절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무장한 이 직원의 친절이 엄청 부담스럽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론 감동 또 감동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A/S센터를 나오면서 제게 90도로 인사를 하는 젊은 남성 직원에게, 저는 그만! 위에 말씀 드린 이상 증상이 더 심하게
나타내 버린 것입니다.
제가 그 직원의 인사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러면서 함께 90도 맞절을 한 것입니다!
송대남, 정훈 감독의 맞절 사진
무릎만 안 꿇었지 거의 이 분위기 였어요ㅠㅠ
사실 맞절을 하면서도 좀 이건 아니다 싶었지만 저절로 꺾이는 제 고개와 튀어나오는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직원은... 몹시 당황한 듯 했습니다. 어쩌면 매일 이런 융숭한 친절을 당연하게 받고 있는 보통 사람들에게서 나오지
않는 반응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저도 예전엔 한국에 살 때는, 이런 친절을 고맙다고 여겨본 적이 별로 없었으니 말이지요. 당연한 거 아니야? A/S센터
직원인데? 라고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 발생했습니다.
당황한 직원은 제게 다시 90도 인사를 하며, "고객님 저희가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라고 인사를 했고,
저는 거기서 멈추었어야 했는데 저도 모르게 또 다시 90도 허리를 꺾으며 "아니에요. 제가 감사하지요!"
라고 말해버렸습니다.
엉엉엉…이 어색한 상황을 어쩔 거야…
그후 저와 그 직원분의 대화는 이랬습니다.
직원 : 고객님 안녕히 가십시오.
나 : (다시 고개를 숙이며) 네~! 감사합니다.
직원 : 네~ 감사합니다!
나 : 네~~~~ 좋은 하루 되세요!
직원 : 네~~고객님도요!
나 : 네~~~~~~~(또 고개를 숙이고)
직원 :(얼떨결에 또 같이 고개를 숙이며) 네~
….
휴대폰 배터리 하나 사면서
사돈 상견례라도 하듯 그렇게 계속 맞절을 하며 서로 감사하다고 하다니…
저는 정말 스스로에게 오글거려서 어디로 숨고 싶었을 정도인데요.
아마 그 남자분, 참 희한한 고객 만났다고 나중에 웃었을 거에요..ㅠㅠ
그래도 비록 이런 이상한 상황을 겪었지만, 저는 오랜만에 만난 한국인의 풍성한 친절에(그게 진심이든 아니든)
참 감사하는 하루였습니다.
여러분 즐거운 토요일 되세요!
*컴퓨터 매장의 여성 사장님께서, 제가 노트북 사러 온 대학생인 줄 알았는데 큰 딸이 할머니와 나타나서 깜짝 놀라셨다고, 동안이라고 말해 주셔서 그게 말도 안 되는 접대성 멘트인 줄 알면서도 날아가게 기분 좋아졌던 올리브나무였습니다. (그런 말을 듣고 너무 좋아한다고 비웃지 않으실 거져~~~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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