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는 좀 비슷한 vs 다른
그리스 시댁의 문화
시어머니가 새 며느리에게 "난 너를 딸처럼 생각한단다." 하는 말에 대해 저는 스무 살 때부터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시어머니 얘길 하며 "우리 시어머니 멋지지?" 하는 순진한 새 며느리 아가씨들을 보면서 속으로 실소를 금치
못했습니다.
물론 어떤 시어머니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고자'하는 좋은 의도에서 이 말을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도 알고는 있습
니다.
하지만 어떤 어르신들은 좋은 시어머니 코스프레로 이런 말을 내 뱉기도 하지요.
만약 시어머니가 이십 년 같이 산 며느리에게 "난 너를 딸처럼 생각한단다."라고 말한다면, 그 말은 믿을 수 있겠
지요.
자식이 낳아야 꼭 자식은 아니니까요. 유수의 세월을 같이 보내다보면 미우나 고우나 정말 가족같이 되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시댁 친척 간의 인간관계에 대해 일찍부터 냉소적인 시선을 갖게 된 것은, 수십 년을 꼬장하고 막무가
내셨던 친할머니에게 늘 당하시며 힘겨루기를 하셨던 저희 엄마, 그리고 그 주변 친척들을 보면서였습니다.
시는 시야! (시댁 식구는 시댁 식구야!) 라는 말을 주변에서 무수히 들어왔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한국에서 삼십 오 년 넘게 살면서 딸이 없는 시어머니 중 인품이 좋은 어르신이 며느리를 딸처럼 챙기는 것
을 본 적은있으나, 딸이 있는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딸을 똑같이 챙기는 모습은 별로 본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
다.
비단 시어머니 뿐만 아니라 시댁 식구들이 며느리와 아들에게 차별적으로 챙기거나 행동하는 것, 며느리와 시누이
에게 차별적으로 행동하는 등의 사례를 보면서도 역시 '시는 시다.' 라고 결론 내리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로 이사와서 이렇게나 많은 '시'자 들어가는 사람들과 함께 붙어 살게 되면서 저의 이런 '한국의 시댁에 대한
개념'이 발동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친정 중심으로 모이는 그리스라 하더라도, 어차피 친정이 여기가 아
닌 제게는 개인적으로 별 의미가 없는 문화인 것입니다.
게다가 친정 중심으로 모여야 하는 시고모님과 그 가족들의 친정은 시할머님 댁이 아닌, 저희 뒷집인 시부모님 댁
입니다. 시할머님께서 젊었을 때, 딸 아들에게 상처주는 발언을 서슴치 않으셨던 관계로 자식들은 엄마를 피해 큰
오빠인 시아버님 중심으로 모이게 된 것이지요. 그렇다고 시할머님을 안 챙길 수 없으니 시할머님도 찾아뵈어야 하
고, 친정 중심으로 모이는 문화이니 시어머님의 엄마인 시외할머님도 수시로 저희 집에 오시는 그런 대가족 문화
가 저희 집 중심으로 형성된 것입니다.
처음 그리스에 와서 이렇게 많은 시댁 사람들이 집으로 일 주일에 한 번 이상 드나드는 것, 저와는 몇 번 일면식도
없는데 '한 가족' '한 가문' 이라는 이유로 막 들이대며 친한 척 하는 시댁 식구들이, 저는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
었습니다.
그냥 좀 먼 시댁 식구는 형식적으로만 명절 때나 만나 안부나 전하고 잘 대해 드려도 큰 불편이 없는 한국의 시댁
식구를 대하는 방식으로 생각했던 저는, 이렇게 막무가내로 훅 들어오는 그리스 시댁 친척들의 행동이 무례하게
느껴지기까지 했을 정도로 불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자주 언급한 친척 끼끼는 사실은 매니저 씨의 고모, 시아버님의 막내 동생입니다.
그러나 저 뿐만 아니라 매니저 씨도 그녀를 고모님이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는, 시할머님이 늦게 낳은 막내 딸로
매니저 씨보다 다섯 살 밖에 많지 않은 고모인데다가 저희 시어머님이 거의 키우다시피 했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한국처럼 나이에 따라 상하관계를 갖는 게 아닌 그리스 문화라, 끼끼 본인도 형제 자매처럼 자란 매니저 씨
나 시누이에게 고모라고 불리우는 것을 무척 싫어합니다.
결혼을 스무 살에 한 끼끼는 상당히 큰 아들과 열한 살 터울의 딸이 있는데요.
제가 그리스로 이사온 바로 그해 부터 그녀의 큰 아들인 스타브로스와 둘째인 미카를 수시로 저희 집에 재우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열 여덟 살인 스타브로스는 당시에도 방학 때마다 저희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곤 했었는데요.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날은 이유도 없이 저희 집에 와서 자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들어 보니 저희가 이사오기 전
엔 시댁에서 그렇게 자고 가곤 했었다는데, 저는 몇 번 본 적도 없는 그 친구를 집이 먼 것도 아닌데 특별한 이유도
없이 우리집에 재워야하는 것이 늘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여분의 방도 없는 저희 집에서 소파 베드를 펼쳐서 친하지도 않은 그 친구에게 새 침대보와 베개보를 깔아 주고
밥을 챙겨 주는 일들이, 아직 그리스 생활에 적응도 못해 무척 고생 중이던 저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
다. 끼끼의 딸 미카는 지금은 일곱 살이지만 당시에는 상당히 어렸고 편식도 심한 아이인데, 끼끼는 직장일로 바쁘
면 그냥 훅 맡겨놓고 "고마와 정말~" 이러며 가버리는 거였습니다.
제가 이에 대해 불평을 해도 "가족인데 당연히 그 정도는 도와줘야지."라는 그리스 특유의 가족 의리를 내세웠고,
매 주말 들이닥치는 시댁 친척 음식 대접도 힘겨웠던 저는, 마치 내가 그리스에 가족 일을 해주러 무보수로 잡혀 온
"하녀"같다는 극단적인 생각이 들 지경이었습니다. 아주 며느리라고 막 부리는구나 이런 생각들을 하지 않을 수 없
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의 세월이 흐르고, 지금은 그냥 이런 생활에 적응하게 되어서 할 만큼만 하자, 그 대신 할 때는 진심으
로 하자 그래야 내가 스트레스를 안 받는다는 결론을 내리고 시댁 관련 모든 일들에 대해 초연한 자세를 갖게 된 것
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수술을 하게 되면서 이런 저의 '시댁에 대한 개념'을 좀 바꾸게 된 일들이 생겼습니다.
우선 12 세 미만의 어린이 출입을 면회 시간 외에는 금하고 있는 그리스 종합병원의 방침대로, 딸아이를 며칠
동안 누군가 돌봐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마침 시어머님이 여름 시즌이라 출근하기 시작하셔서 아이를 봐줄 사람이
전혀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늘 제게 본인의 아이를 떠 맡기던 끼끼가 기꺼이 딸아이를 데려가 며칠을 먹이고 재우며 봐주었던 것입니
다.
게다가 뭔가 특별한 것을 해 먹이려고 애쓰기 까지 하고 딸아이 갈아입은 옷 빨래까지 해서 보낸 것을 보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늘 저에겐 안타까운 돌봄의 대상이었던 연애 흑역사의 몸 약한 시누이도 제 입원 내내 병실을 떠나지 않고 지켜주
었고, 본인 집 정원의 장미를 손질해 선물해 저를 감동시키기까지 했습니다.
우리집에 자주 자고 갔던 끼끼의 아들 스타브로스는 오토바이로 딸아이를 데리고 가야 할 곳에 함께 가주어서 저를 감동시켰지요.
평소 저와 성격이 달라 제일 데면데면하게 지냈던 사회불만 토로자인 셋째 시고모님은, 아무리 집에 가시라고 해도
시누이와 함께 병실을 지키셨고 퇴원한 후에도 매일 전화 해 안부를 물어왔습니다.
저는 이제껏 제게 받기를 좋아했던 시댁 식구들이 제가 좀 아프다고 갑자기 제게 이렇게 잘 하는 것을 보면서,
이건 뭔가? 싶었는데요.
고맙다고 거듭 말하는 저에게 그들이 한결같이 해 온 대답은, 진심으로 접대성 멘트 냄새 없는 담백한 말투로
"가족인데 뭐가 그렇게 고마와. 당연하지."였습니다.
가족인데...라니...
그럼, 나를 며느리가 아니라 진짜 가족으로 생각했던 거였던 거야?
진짜 가족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나한테 뭘 해달라고 쉽게 부탁했었던 거야?
그리고 진짜 가족이라고 생각해서 지금은 또 이렇게 나에게 필요한 필요를 채워주는 거야?
그러며 깨달은 사실은 그리스에서 '가족의 의미' 란 시댁이고 친정이고 할 것 없이 일단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 울타리에 들어오면, 상하관계보다는 '형식이 아닌 진심으로 서로의 정을 나누고 도움을 주고 받고 의리를 지키
는 관계'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저도 성격에 맞지는 않지만 이제는 시댁식구라고 어려워 말고, 좀 더 두 발 뻗고 뻔뻔하게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도와달라고 부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는데요.
늘 매니저 씨가 "너는 가족의 도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아." 라고 했던 말의 의미를 이제는 알 것 같기 때문입니
다.
시댁 사람이여서 오히려 뭔가 저를 도와주려고 할 때 관계 때문에 불편하고 뒷말 나올까 불편해서 거절했던 과거를
이제는 청산해야 할 때가 됐나봅니다.
물론 감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저희 시어머님은 본인의 금쪽같은 딸 아들인 시누이와 매니저 씨가
저 간호하느라 병원에서 불편하게 고생하는 모습이 안타까와서 수술 첫날 밤인데 "이제는 너희들 집에 가도 되지
않니"라며, 본인도 집에 갈버릴 거면서, 누워있는 저보다 간호 중인 자식 걱정을 온몸으로 드려내셔서
'역시 딸에게, 아들에게와 며느리에게는 같을 수 없다'는 한국 시어머니에 대한 개념이 그리스 시어머니들에게도
마찬가지란 사실을 확인시켜 주시긴 했지만,
괜찮습니다. 저희 시어머님은 한번도 "널 딸처럼 생각한다"는 입에 발린 말은 한 적이 없으시니까요.
(어머님의 솔직한 표정에 저는 결국 모두를 돌려보냈습니다. 사실 매니저 씨가 쪼그려 잘 의자 형태는 못 되어서
어머님이 그러시지 않아도 밤엔 집에 가서 자고 오라고 하려 했었는데, 어머님께서 확인 도장을 찍어 주신 셈이지
요. 덕분에 한밤 중에 저절로 빠진 링거 바늘은 옆 침대 보호자 아저씨가 간호사를 불러주셔서 수습했습니다.--;
이런 얘길 하면 어머님은 왜 진작 말하지 않았니? 라고 정색을 하시는데, 앞으로는 이런 일이 있을 땐,
그냥 어머님이 남아주세요! 이렇게 부탁할거에요^^ 가족이라면서요. 의리를 지켜주시겠지요.)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덧붙임.
* 한국의 시댁 문화 전체를 비하하려고 쓴 글이 아닙니다.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한국의 시댁 문화에서 며느리의
위치가 진심과 더불어 아무래도 형식적인 모습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부분을 말씀드리고 싶었고,
자주 수십 명 수백 명 가문 모임을 하는 그리스가 시댁 문화에의 고충이 한국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며느리도 '가족 의리를 지켜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상하관계가 아닌 개념이 좀 다르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 시고모님인 끼끼를 저도 끼끼라고 막 부를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녀와 제가 동갑내기이기 때문입니다.
매니저 씨와 저의 나이 차를 밝히게 되었군요^^
* 시어머님도 여자, 시누이도 여자, 나도 여자인데 한국이나 그리스나 가족 문화 색이 짙은 나라에서는 피해갈 수 없는 이런 현상들
이 있는 것을 보면서 내가 나이가 들어 만약 며느리가 생기게 된다면, 난 어떤 여자가 될 것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여자를 부려먹는 여자 / 여자를 질투하는 여자 / 여자를 도와주는 여자 / 여자를 응원하는 여자. 중에서?
여자를 도와주고 응원하고 기도해주는 여자로 늙고 싶네요.
그 여자가 그 때에도 분명 살아 계실 시어머님이든 우리 엄마든, 내 며느리든 내 딸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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