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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과 독백

“마리아나, 인종차별보다 더 큰 것을 봤으면 좋겠어.”

by 꿋꿋한올리브나무 2014. 6. 3.




 

딸아이는 울먹울먹 울며 제 옆에 와서 앉았습니다.

"무슨 일이야?"

"엄마, 저기 어떤 애가 중국 애라고 눈 찢어지는 흉내 내며 놀렸어...내가 중국 애 아니라고 하니까 그럼 일본 애냐? 그러면서 또 눈 찢어지는 흉내 냈어..."

"어이쿠..우리 딸이 속상했겠네. 이리 와. 엄마가 안아줄게."

저는 아이를 안고 한참을 등을 쓸어주며 말 해주었습니다.

"그 애는 동양인을 본 적이 별로 없어서 그런 거야. 중국 무술영화에서 본 게 다인지도 몰라. 그리고 여기 엄마들 중엔 아이들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안 가르치는 엄마들도 있다는 거 알지? 신경 쓰지 말도록 노력하자. 어차피 남 놀리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 아인 벌써 나쁜 행동을 했는걸. 넌 걔보다 더 나은 애잖아. 응?"

"그래도 이런 데에 오면 꼭 이런 일이 한 번씩은 있어서 너무 속상하단 말야…"

아이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흐느꼈습니다.

 

바로 어제 마리아나 학교에서는 부모 동반 전교생 소풍이 있었는데, 이제 대부분 학교 안에서는 마리아나가 한국인 엄마를 둔 한국에서 온 아이라는 것을 다들 알고 있는 편인데, 또 이런 장소에 오면 교실이 다른 층에 있는 다른 학년 아이들 중에 마리아나를 처음 보고 이런 행동을 하는 아이가 한 명쯤은 꼭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나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본 반 친구들 여러 명이 몰려와서 "왜 울어 마리아나??"고 물었고, "널 놀린그 아이가 누구냐? 우리가 말해주겠다!" 며 마리아나를 데리고 가버렸습니다.

이 친구들은 인종차별뿐만 아니라 남을 놀리면 안 된다는 부분에서 부모로부터 교육을 받은 아이들입니다.



마리아나를 변호하고 나선 마리아나의 친구들

  


10분쯤 지난 후 그 중 한 친구가 "올리브나무 부인!" 이라며 저를 부르러 왔고, 저는 아이를 따라 그 자리에 가 보았습니다.

거기엔 마리아나 보다 한 두 학년 높아 보이는 한 남자 아이가 아주 곤란한 표정으로 마리아나 친구들에게 둘러 쌓여 있었고, 어깨에 소풍가방을 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부모님이 직장에서 월차를 빼지 못 해 단체 버스로 선생님 인솔 하에 소풍에 온 아이 같아 보였습니다.


저는 아이를 보고 차분히 말 했습니다.

"내 딸은 중국인도 일본인도 아니란다. 그렇게 얼마든지 오해할 순 있지만, 놀리기까지 하는 것은 기분 나쁠 수 있지 않겠니? 우린 한국에서 왔어. 삼성 알지? 그 회사가 한국 회사야. 앞으로는 내 딸을 놀리지 않을 수 있겠니?"

하지만 그 아이이는 억울하다는 듯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눈이 이렇게 된 것을 이렇게 됐다고 말 한 것이 잘못인가요?"

라면서 제게도 눈을 찢는 흉내를 내 보였습니다.


"그래. 하지만 넌 그런 흉내를 내면서 얘를 따라다니며 놀렸잖아. 그러면 기분 좋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 만약 누가 너의 신체적인 부분을 지적하며 따라다니며 놀리면 넌 기분이 좋겠니? 이제 안 그럴 거지? 난 니가 안 그럴 거라고 믿어."

"……"    

아이는 끝내 "네"라고 대답하지 않고 퉁퉁 부은 얼굴로 자리를 떴습니다.

 

 

사실 마리아나도 저도, 그냥 쳐다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자기들끼리 수근 거리는 시선쯤은 이젠 많이 익숙해서 별로 기분 나쁘지도 않습니다. 지난 주 마리아나의 합창발표회는 인근 10개 초등학교가 합동으로 학년 말 평가회 같은 형태였기에 다른 학교에서 온 아이들이 많았고, 저 역시 그런 쳐다보며 저를 손가락질 하며 흘끔거리는 아이들의 시선을 받아야 했습니다. 10개 초등학교가 모여도 동양인은 저와 마리아나 단 둘뿐이었고 흑인이 한 명, 나머지는 모두 백인이었으니까요. (그 흑인아이는 마리아나 학교의 아이인데, 부모가 단 한번도 학교에 오는 것을 본 적 없고 늘 이웃 다른 그리스인 엄마가 자기 아이와 함께 이 아이를 등하교 시키는 것으로 보아, 그 부모 역시 그런 시선이 불편하니 학교에 오지 않는구나 싶었던 아이입니다.)   


이렇게 아이들이 우리를 신기해서 쳐다보는 것쯤은 이젠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데, 문제는 그 이상의 인종차별적인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에 대해 그리스에서는 자녀에게 교육하려 들지 않는 부모도 많고, 도리어 이민자들이 추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황금새벽당처럼 나치즘을 신봉하는 정당이 이 나라에서 합법적인 정당으로 버젓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인데요. 그리스에서는 인종차별이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또한 지난 번에 유로비전에 대한 글 이후에 <2014/05/13 - 유럽에서 자녀를 키우는 데엔 ‘필터’가 필요하다.> 에서 언급한 대로 '유럽의 지나친 표현의 자유'가 부른 '비극'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남과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당하는 사람은 '차별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이색적인 방법들로 자신의 표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라고 여기고, 반면 이들을 차별하는 반대편 시각에서는 '남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 차별하거나 풍자하는 자유가 있다' 고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유럽에서도 인종차별에 대해 법적으로 제제를 가하는 국가들도 있습니다만 그리스처럼 그렇지 않은 국가들도 의외로 많기 때문에, "이런 합법의 범위 내에서 인종차별을 하는 것이 뭐가 어때서? 실제로 이민자들이 우리에게 피해를 주는 부분도 있잖아?" 라고 당당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제 한국에서 대통령을 풍자하는 그림을 화장실에 그렸다고 경찰에 연행된 사건에 대해 기사로 접하게 되었는데, 그리스에서는 대통령에 대해 공중파에서 풍자 그림을 내보내도 '그것은 또한 이들의 자유'라고 생각하기에 그냥 같이 웃고 넘어가곤 하는데요. 만약 그런 프로그램에 대해 비판하고자 한다면, 또 다른 TV프로에서 '대통령을 풍자한 프로그램 MC를 역으로 풍자하는 그림'을 만들어서 내보내서 그런 것에 대응하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들이 생각하는 표현의 자유인 것이지요.


이 사진들은 한 동안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화재가 되었었는데요. 

스티브 잡스의 사진을 그리스 대통령을 비롯한 전,현직 총리, 정치인들의 풍자용으로 사용한 사진입니다. 

하필 스티브 잡스 사진을 이용했던 이유는, 이 사진이 그의 이른 죽음에 대해 애도하는 느낌의 사진이기 때문에 

그리스 정치인들이 했던 잘못된 정치들도 그처럼 안타까운 일들 뿐이라고 풍자하고 있는 것입니다. 

(쓰여진 단어들도 그들의 이름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그 정치인이 집권했던 당시 문제가 되었던 부분을 꼬집고 있습니다.) 



 

자...그렇다면 본론으로 돌아가서, 제가 아이를 쫓아다니며 매번 변호해 줄 수도 없고, 아이 스스로가 놀림의 정도를 판단해 당당하게 맞서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제 저는 장거리 소풍을 운전해서 다녀와 피곤했지만 아이에게 보여줄 만한 좋은 자료가 없을까, 인터넷을 뒤져보기 시작했는데요.

때마침 어제 MBC '휴먼다큐 사랑'에서 캐나다에 사는 마리아나 또래의 샴쌍둥이 자매에 대한 프로그램을 방영했었고, 저는 이 프로그램을 마리아나와 같이 보기로 했습니다.

분명 이 아이들은 과 다르게 태어난 것에 대한 험난한 시선을, 누구보다 많이 겪었을 아이들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마리아나는 태어나서 샴쌍둥이를 사진으로조차 한번도 접한 적이 없기 때문에 놀라지 않도록 영상을 보기 전에 미리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프로그램을 보며, 마리아나보다 더 큰 배움을 얻었던 것 도리어 저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MBC '휴먼다큐 사랑-말괄량이 샴쌍둥이' 

캐나다의 타티아나크리스타(2006년생)



저라면 과연 그 아이들의 엄마처럼 5남매를 낳아서 키울 수 있었을까 싶고, 그 쌍둥이 아이들을 그렇게 돌볼 수 있었을까 싶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장애아이들에게 비교적 차별적인 시선이 적은 캐나다이기에 그 아이들이 정상적으로 일반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저와 마리아나가 가장 놀랐던 장면은, 그 아이들과 다른 남매들을 데리고 쇼핑몰에 갔을 때 그 아이들을 충격적으로 바라보는 주변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들이 정말 밝고 명랑하다는 점이었는데요.

분명 거기엔 부모와 조부모의 눈물의 헌신과 노력이 컸겠구나 싶었습니다.

 

 

영상을 다 보고, 마리아나와 저는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마리아나, 넌 무엇을 느꼈니?"

"응. 엄마. 나도 당당하고 긍정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 그리고 넌 이미 너를 변호해줄 만큼 주변에 좋은 친구들도 많고, 너를 손재주가 좋다고 인정해주는 선생님들도 있잖니. 네 장점을 봐주는 많은 다른 그리스인들이 있으니, 그렇게 몰라서 놀리는 사람에 대해 기죽지 말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생각해보면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남을 놀리는 것은 그리스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거든. 어느 나라에서는 뚱뚱하다고 놀리기도 하고, 키가 작다고 놀리기도 하고, 같은 나라 사람끼리도 피부다 희다 검다 로 놀리기도 하고, 공부를 잘 한다 못 한다 로 놀리기도 해.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런 일은 너무 많아서 다 헤아릴 수도 없고, 이보다 더 큰 어려움들이 살아가는 동안 곳곳에 숨어있다가 나타나서 너를 힘들게 하기도 할 거야. 그 때마다 울고만 있다면 사는 게 너무 힘들거든. 같이 기도하면서 잘 넘어가보자. 하나씩 하나씩 당당하게 잘 맞서서 해결하고 나면, 나중엔 마음에도 근육이 생겨서 더 큰 어려움들도 거뜬히 해나갈 수 있게 돼. 그러니 네가 그리스에 살기 때문에 꼭 어려움을 겪는다고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세상엔 어디에나 어려움이 있거든."


마리아나는 조용히 생각에 잠기는 눈치였고, 오늘 아침 등교길에서까지도 샴쌍둥이 아이들에 대해 더 자세히 물어보면서 고민하는 듯 했습니다.

저는 이번 일로 이 아이가 고민한 만큼 분명 단단하고 당당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도 잘 버티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으로 말이지요.

엄마에게 130살까지는 건강하게 살라고 신신당부하는 만큼, 자신도 100살 이상 건강하게 오래 살려면 이쯤은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날도 올 것입니다.^^

 

여러분 힘내시는 하루 되세요!

좋은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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