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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속의 한국

한국전쟁 참전용사셨던 나의 그리스인 시할아버님

by 꿋꿋한올리브나무 2013. 6. 6.





제 그리스인 시할아버님 이야길 하기 전에, 먼저 저의 친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제 친할아버지는 남매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셨다고 합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 해방 후 혼란기에 있었던 1940년대 후반, 젊디 젊은 임신 중이었던 아내와 두 자녀를

두고 사고사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 후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 아이가 바로 제 아버지이십니다.

할아버지는 여동생 하나와 남동생 셋을 두셨었는데, 여동생은 당시 여러웠던 살림살이를 말해 주듯, 일찍 결혼해

나가 연락이 끊어졌다 합니다. 

할아버지의 바로 아래 남동생이 바로 저희가 유일하게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저희에게 친할아

버지와 같았던 작은할아버지셨습니다.


이 작은할아버지는 제가 자라는 동안, 늘 현충일과 한국전쟁(6.25)기념일이 있는 유월이 되면, 저희 집으로 전화를

하시곤 했습니다.

약주를 잔뜩 하시고 취기가 오른 목소리로 전화하셔서, 어렸던 저를 바꾸라시며 하시는 말씀은 늘 같았는데요.


"야, 니는 네 할아버지를 모르재?  모를끼다. 참 인물이 훤한기 멋진 형님이셨던기라.

그래 가버릴 줄은 누가 알았겠노. 니 아나? 내가 남동생이 둘이 있었는데, 6.25 때 둘 다 전쟁에서 싸우다가

했다 아이가. 내가 오늘 국립현충원에 다녀왔다카이... 니 그거 아나?"


"네. 작은할아버지. 알아요."


매년 이맘 때면 해 주시는 말씀인데 모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저의 친할아버지의 두 막내 남동생분들은 꽃다운 이십 대 초반의 나이에 전장에서 전사하셨던 것입니다.

저는 살아계셨다면 제게 또 다른 작은할아버지가 되셨을 이 동생분들에 대해 변변한 사진도 없이, 작은할아버지를

통해 그렇게 기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작은할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형제 중 홀로 남아 살아오신 서글픈 역사의 이야기를 늘 해 주셨습니다.

작은할아버지의 장례식장 영정사진 앞에서, 안고 있던 간난아기였던 제 딸아이를 쳐다보며 언젠가는 작은할아버지

와 그 형제분들의 이야기를 저도 딸아이에게 해 줄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매니저 씨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매니저 씨의 친할아버님 그러니까 저의 시할아버님은 그 시점에서 한 해 전에

이미 병으로 세상을 뜨셨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할아버님의 얼굴을 사진으로 밖에는 만나볼 수 없었습니다.


한번은 이 시할아버님이 묻혀 계시는 묘소에 매니저 씨와 함께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할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첫 손주였던 매니저 씨는 할아버님의 사진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습니다.

그리스의 전통대로 할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은 매니저 씨.

그리고 본인과 이름과 성이 정확하게 같았던 친할아버지의 묘소.

내 이름이 써 있는 묘소에 나를 보고 투박하게 웃고 계시는 할아버지의 사진을 보던 매니저 씨는

많은 생각이 오가는 듯, 오래 있지 못하고 그 자리를 뜨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저는 시할아버님께서 한국전쟁에 참전하셨던 분이신 줄은 전혀 몰랐었습니다.


그리스에 와서 살게 된 후에야, 모든 친척들이 이구동성으로 제게 시할아버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는데요.

1950년 이십 대 초반이셨던 시할아버님은 당시 군 복무 중이셨고, 자원해서 한국전쟁에 파병되셨다고 했습니다.

당시 그리스 역시 기나긴 내전의 끝으로 좋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기꺼이 한국전쟁에 자원하게 되셨던 것입니다.


[6·25 60년, 참전 16개국을 가다]<9>그리스 청년들이 동쪽으로 간 까닭은?

(기사 중 일부만 발췌했습니다.)

2010-03-29 donga.com 고기정 기자

○ 그들은 왜 한국에 갔나

그리스는 1950년 11월부터 보병 1만여 명과 수송기 1개 편대를 한국에 파병했다. 보병은 미 1사단에 배속돼 철원과 경기 이천 지역 등 주요 거점에서 많은 전과를 거뒀다. 특히 전쟁 막바지인 1953년 6월 강원 김화-철원-평강을 잇는 ‘철의 삼각지’에서 벌어진 해리고지 사수작전은 6·25전쟁 사상 아주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기록돼 있다. 해리고지 전투는 현재 미국에서 영화로 제작되고 있다.

참전용사들은 하나같이 6·25전쟁에 참전한 이유에 대해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하지만 자유와 평화라는 대의를 목숨과 바꿀 수 있을까. 돈벌이 목적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파병 군인의 98%는 자원해 참전했고, 당시 사병 월급은 20달러 정도로 그리스 기업의 평균 월급인 100달러의 5분의 1에 불과했다.

더욱이 그리스는 6·25전쟁 직전인 1944∼1949년 정부군과 공산군 간 심각한 내전을 겪었다. 사망자가 5만 명에 달했다. 게릴라전으로 진행된 내전에선 한국에서처럼 가족마저도 좌우로 갈려 서로 총부리를 겨눴다. 이 때문에 당시 그리스에서는 반공 정서가 매우 강했다. 현지에서는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 이후 최대 규모의 군인이 해외로 파병됐다고들 한다.

6·25전쟁 때 목에 박힌 파편을 아직까지 제거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콘스탄티노스 피시오티스 씨(85)는 “내게 한국전쟁은 그리스 내전에 이은 2번째 전쟁이었다. 한국에서 공산주의를 몰아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고 말했다. 공군 조종사로 참전한 아크리보스 촐라키스 씨(80)는 “한국에 갔을 때 한복 입은 여자들은 왜 허리띠를 가슴에 맬까 하고 의아해할 정도로 한국을 전혀 몰랐지만 우리에게는 자유를 수호해야 한다는 이상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스틸리아노스 드라코스 참전용사협회장은 “우리의 작은 도움으로 한국이 성공한 나라가 돼 고맙다.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참전용사들이 눈을 감기 전에 한국이 통일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스에서 한국전쟁에 보낸 군사의 수는 1950년 11월 부터 1954년까지  10,518명인데, 전사자가 188명,

전상자가 459명이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제 시할아버님께서는 무사히 그리스로 돌아오셨고, 이후 결혼 하셔서 지금의 큰 가족을 일구시고 노년에

지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시할아버님께서는 가끔 한국전쟁의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하셨다고 합니다.

지금도 비행시간만 16시간 이상 되는 물리적으로 먼 그리스-한국 인데, 당시에 그 먼 한국까지 23일간 미군 수송

선을 타고 가 전쟁을 치르고 돌아오신 시할아버님.


그 할아버님은 과연 본인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당신의 첫 손주가 한국여성과 결혼하게 될 지 알고 계셨을까요?

고모님들은 제게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너를 많이 예뻐하셨을거다." 라고 늘 고마운 말씀을 해 주시곤 합니다.



와 매니저 씨 작년 미국 방문 때, 워싱턴에 있는 한국전쟁기념관(Washington Korean War Veterans Memorial)

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당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각 나라의 국가명과, 실종자 숫자 씌여있었는데요.

그리스라고 새겨진 돌판 앞에서 저와 매니저 씨는 한동안 말 없이 머물러 서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냐고 한번도 묻지 않았지만, 아마도 매니저 씨는 1950년 혈기 넘치게 세계평화를 외치던

의협심 강했던 본인의 그리스인 할아버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는 1950년 같은 해 비슷한 또래에 한국전쟁에서 전사하신 제 친할아버의 동생분들과, 그 이야를 늘 해 주시던

작은할아버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현충일입니다. 아픈 역사 속에서 조국을 위해 개인의 삶을 희생한 수 많은 순국선열들에 대해

단 하루라도 기억하며 감사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제 몫을 열심히 다 하는 국민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 또한 

그분들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는 애국의 길이란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좋은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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