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그리스인 시할아버님 이야길 하기 전에, 먼저 저의 친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제 친할아버지는 오 남매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셨다고 합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 해방 후 혼란기에 있었던 1940년대 후반, 젊디 젊은 임신 중이었던 아내와 두 자녀를
두고 사고사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 후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 아이가 바로 제 아버지이십니다.
할아버지는 여동생 하나와 남동생 셋을 두셨었는데, 여동생은 당시 여러웠던 살림살이를 말해 주듯, 일찍 결혼해
나가 연락이 끊어졌다 합니다.
할아버지의 바로 아래 남동생이 바로 저희가 유일하게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저희에게 친할아
버지와 같았던 작은할아버지셨습니다.
이 작은할아버지는 제가 자라는 동안, 늘 현충일과 한국전쟁(6.25)기념일이 있는 유월이 되면, 저희 집으로 전화를
하시곤 했습니다.
약주를 잔뜩 하시고 취기가 오른 목소리로 전화하셔서, 어렸던 저를 바꾸라시며 하시는 말씀은 늘 같았는데요.
"야야, 니는 네 할아버지를 모르재? 모를끼다. 참 인물이 훤한기 멋진 형님이셨던기라.
그래 가버릴 줄은 누가 알았겠노. 니 아나? 내가 남동생이 둘이 있었는데, 6.25 때 둘 다 전쟁에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아이가. 내가 오늘 국립현충원에 다녀왔다카이... 니 그거 아나?"
"네. 작은할아버지. 알아요."
매년 이맘 때면 해 주시는 말씀인데 모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저의 친할아버지의 두 막내 남동생분들은 꽃다운 이십 대 초반의 나이에 전장에서 전사하셨던 것입니다.
저는 살아계셨다면 제게 또 다른 작은할아버지가 되셨을 이 동생분들에 대해 변변한 사진도 없이, 작은할아버지를
통해 그렇게 기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작은할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형제 중 홀로 남아 살아오신 서글픈 역사의 이야기를 늘 해 주셨습니다.
작은할아버지의 장례식장 영정사진 앞에서, 안고 있던 간난아기였던 제 딸아이를 쳐다보며 언젠가는 작은할아버지
와 그 형제분들의 이야기를 저도 딸아이에게 해 줄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매니저 씨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매니저 씨의 친할아버님 그러니까 저의 시할아버님은 그 시점에서 한 해 전에
이미 병으로 세상을 뜨셨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할아버님의 얼굴을 사진으로 밖에는 만나볼 수 없었습니다.
한번은 이 시할아버님이 묻혀 계시는 묘소에 매니저 씨와 함께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할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첫 손주였던 매니저 씨는 할아버님의 사진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습니다.
그리스의 전통대로 할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은 매니저 씨.
그리고 본인과 이름과 성이 정확하게 같았던 친할아버지의 묘소.
내 이름이 써 있는 묘소에 나를 보고 투박하게 웃고 계시는 할아버지의 사진을 보던 매니저 씨는
많은 생각이 오가는 듯, 오래 있지 못하고 그 자리를 뜨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저는 시할아버님께서 한국전쟁에 참전하셨던 분이신 줄은 전혀 몰랐었습니다.
그리스에 와서 살게 된 후에야, 모든 친척들이 이구동성으로 제게 시할아버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는데요.
1950년 이십 대 초반이셨던 시할아버님은 당시 군 복무 중이셨고, 자원해서 한국전쟁에 파병되셨다고 했습니다.
당시 그리스 역시 기나긴 내전의 끝으로 좋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기꺼이 한국전쟁에 자원하게 되셨던 것입니다.
[6·25 60년, 참전 16개국을 가다]<9>그리스 청년들이 동쪽으로 간 까닭은? (기사 중 일부만 발췌했습니다.)2010-03-29 donga.com 고기정 기자○ 그들은 왜 한국에 갔나 |
그리스에서 한국전쟁에 보낸 군사의 수는 1950년 11월 부터 1954년까지 10,518명인데, 전사자가 188명,
전상자가 459명이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제 시할아버님께서는 무사히 그리스로 돌아오셨고, 이후 결혼 하셔서 지금의 큰 가족을 일구시고 노년에
지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시할아버님께서는 가끔 한국전쟁의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하셨다고 합니다.
지금도 비행시간만 16시간 이상 되는 물리적으로 먼 그리스-한국 인데, 당시에 그 먼 한국까지 23일간 미군 수송
선을 타고 가 전쟁을 치르고 돌아오신 시할아버님.
그 할아버님은 과연 본인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당신의 첫 손주가 한국여성과 결혼하게 될 지 알고 계셨을까요?
고모님들은 제게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너를 많이 예뻐하셨을거다." 라고 늘 고마운 말씀을 해 주시곤 합니다.
저와 매니저 씨는 작년 미국 방문 때, 워싱턴에 있는 한국전쟁기념관(Washington Korean War Veterans Memorial)
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당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각 나라의 국가명과 사망, 실종자 숫자가 씌여있었는데요.
그리스라고 새겨진 돌판 앞에서 저와 매니저 씨는 한동안 말 없이 머물러 서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냐고 한번도 묻지 않았지만, 아마도 매니저 씨는 1950년 혈기 넘치게 세계평화를 외치던
의협심 강했던 본인의 그리스인 할아버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는 1950년 같은 해 비슷한 또래에 한국전쟁에서 전사하신 제 친할아버지의 동생분들과, 그 이야를 늘 해 주시던
작은할아버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현충일입니다. 아픈 역사 속에서 조국을 위해 개인의 삶을 희생한 수 많은 순국선열들에 대해
단 하루라도 기억하며 감사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제 몫을 열심히 다 하는 국민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 또한
그분들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는 애국의 길이란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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