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겐 10명 정도의 친한 마리아들이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첫 번째로 친구가 되었던 마리아는 동수 씨 친구 스테르고스의 형수로 그리스에 이민 오기 몇 년 전부터 알던 사이입니다.
170cm가 넘는 큰 키에 마른 체구, 검고 긴 곱슬머리에 갸름한 얼굴... 첫 눈에도 그녀는 몹시 아름답고 분위기 있는 사람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스테르고스의 형 베리안드로스는 그녀가 모델 생활을 하던 20대 때 아테네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고 합니다.
첫눈에 반해 그녀를 몇 년간 쫓아다녔고, 오랜 구애 끝에 결국 결혼에 성공했습니다.
그녀가 질기게 쫓아다녔던 그를 오랜 시간 거절했던 이유는 그녀의 파란만장했던 이전의 삶 때문이었습니다.
그녀가 아주 어릴 때 그녀의 부모님은 몇 되지도 않는 자녀들을 다 키우기가 힘들다며 무작정 그녀를 이모 집으로 보내버렸다고 합니다.
이모 손에서 성장한 그녀는 늘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었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그녀가 스무 살이 조금 넘었을 때, 그녀의 이모는 이웃의 땅부자인 한 남자에게 그녀를 억지로 시집 보내길 원했고, 원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을 키워준 이모의 강요에 못 이겨 결국 그 남자와 결혼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두 아이를 낳았지만 몇 년도 못 살고 결국 그 땅부자 남자의 상습적인 도박과 구타에 못 이겨 이혼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패션 모델 생활과 슈퍼마켓 계산원으로 두 가지 일을 하며, 다시는 결혼 따윈 하지 않겠다고 이젠 혼자서 아이들과 행복하게 살겠다고 다짐했던 그녀 앞에, 지금의 남편이 나타났고 그녀를 끈기 있게 쫓아다녔던 것입니다.
그렇게 고생을 하며 살아왔지만 타고나게 지혜로운 성품을 가진 그녀였기에 지금의 남편과 그녀가 결혼을 한 후, 주변인들은 그녀에게 "당신은 그 남자의 영웅이야!" 라는 소릴 하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베리안드로스는 워낙 성격이 다혈질에 제 멋대로인 사람으로 툭하면 직장을 그만두거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거나 만취 하면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던 아주 대단한 성격의 소유자였었는데, 그녀를 만난 후 특히 그녀와 결혼한 후로는, 자기 사업도 안정적으로 하고 성격도 부드러워지는 등 점점 괜찮은 사람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8년 전 둘 사이엔 온 가족의 축복 속에서 막내 딸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건강검진을 하는 과정에서 갑상선에 암이 있는 게 발견되었고, 그 때부터 그녀의 투병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처음 만났을 때의 그녀는, 발병해 수술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인데도 제가 그 앞에서 기가 죽을 만큼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해를 거듭하며 계속되는 항암치료와 암의 전의로 그녀는 늘 잘 먹지 못 했고, 점점 말라갔습니다.
작년 겨울, 베리안드로스와 마리아
작년 여름, 마리아의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며
제가 이민을 오고 그녀는 제게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진심으로 저를 좋아하는 듯 했고, 제가 사는 로도스 시에서 그녀의 집이 좀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린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자주 만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녀와 저는, 여전히 자주 만나고는 있는데 몸이 아닌 마음에서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제 글에 그녀가 거의 등장한 적이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유는, 스테르고스와 동수 씨 사촌 마사가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하면서, 마사가 그리스에 올 때마다 '표현이 늘 과장된 예비 시어머님' 때문에 힘들어하거나 숫자가 많은 시댁친척들 때문에 힘들어 하면서 마리아까지도 예비 손 윗동서처럼 여겨졌던지 관계를 어려워했습니다.
그녀가 특별히 마사에게 나쁘게 대했던 것은 아닌데, 몸이 아픈 사람이다보니 예민하게 행동하는 면이 있었던 것 같고, 안 그래도 그리스를 이해하지 못 해 예비 시댁이 어려웠던 마사는 상처를 받았던 듯 했습니다...
당시 마사가 예비 시댁식구들로부터 상처를 받아 제게 찾아오면 저는 어떻게든 달래는 역할을 하다 보니, 저까지 자연스럽게 마리아와도 멀어지게 되어 버린 듯 합니다.
마리아와의 관계를 회복해야겠다고 여겼던 것은 제가 작년 여름 한국에 다녀온 직 후였습니다.
몇 달 만에 우연히 쇼핑몰에서 마주친 그녀는 저를 보자마자 끌어 안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올리브나무.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어. 흑흑.."
오랜 투병생활로 바짝 마른 몸으로 저를 끌어 안는데, 저는 정말이지 다시 그녀와 잘 지내며 도울 것이 있으면 도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그녀와 잘 지내려고 일부러 그녀 집에 찾아가기도 했었고, 지난 겨울엔 스테르고스의 별장이 있는 곳에서 형님네 식구들과 저희 가족까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녀와 더 깊은 대화들을 시도하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한번 관계가 벌어지고 나니 이전만큼 마음으로 다시 가까워지긴 어려웠고, 저도 제 생활이 바빠 그녀를 더 살뜰히 챙기지는 못했었습니다.
그러다 한 2주 전쯤 저희 동네에 사는 할머니 집에 놀러 온 그녀의 막내 딸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정신이 번쩍 들면서 그녀를 찾아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전화를 해야지, 전화를 해봐야지...그랬었는데,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틀 전 스테르고스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형수 마리아가 항암치료를 받던 중 혼수 상태가 되어 버렸는데, 의사가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네. 그래도 마리아가 너를 참 좋아했었는데 네겐 알려야 할 것 같아서 전화했어."
"………"
토요일인 어제도 출근을 했던 저는 일요일이었던 오늘 오후...그렇게 병원을 찾았습니다.
그녀는...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빠 보였습니다.
아마 그녀가 마리아라고 스테르고스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뼈만 앙상하게 남은 상태였습니다. 머리카락도 하나도 없는 그런 모습으로 산소마스크에 의존해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평소 남자답게 호탕하게 웃는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침대 끝에 앉아 그녀의 마른 다리를 주물렀다가 그녀의 머리에 키스를 했다가...어찌해야 할 줄 몰라 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무심하다지만, 그녀를 키운 이모님이나 그녀의 부모님은 작년에도 로도스에 잠시 다니러 왔었으면서, 딸이 며칠을 그러고 누워 있는데도 아테네에서 로도스로 그녀를 보러 오지 않았고, 시부모님은 막내 손녀딸을 돌봐야 하니 또 병실에 올 수가 없었고, 그녀의 다른 두 자녀는 이미 장성해서 타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느라 올 수가 없었고, 병실엔 며칠 동안 그녀의 남편과 시동생인 스테르고스만 그녀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저는 가만히 그녀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고 기도를 하는데, 미안함에 눈물이 나려는 것을 꾹 눌러 참으며 마음으로 그녀에게 속삭였습니다.
'미안해. 마리아.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지? 나 처음 이민 와서 아무것도 모를 때 날 일부러 찾아와서 말동무도 해주고 여러 정보도 주고 내게 참 잘 해주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설거지 두어 번, 청소 두어 번 대신 해줬던 거... 함께 커피 마시며 얘기를 나눴던 거... 그게 당신이 항암치료하며 아플 때 내가 했던 일의 전부였네.
정말 미안해 마리아. 내가 너무 늦어서. 내가 너무 늦게 와서.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그렇게 주춤거리며 열지 못 해서 미안해.'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그녀의 팔과 손은 너무 앙상해서 가슴이 너무 아팠고, 저는 그 자리를 쉽사리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몇 시간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집에 있는 동수 씨와 마리아나 저녁을 해줘야 한다는 생각에 자리를 뜨면서, 마리아의 남편에게 "내일 아침에 또 올게요. 뭐든 필요한 것 있으면 전화로 알려주세요. 갖다 드릴게요." 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내 말을 알아 듣는지 알 수 없는 마리아에게는 "마리아. 꼭 일어나야 해. 꼭." 이라며, 당부했습니다.
집에 오니 동수 씨도 마리아의 안부를 다급히 물었고 저는 본 대로 말을 하며 얼른 밥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이 글의 초반부를 쓰다가 빨래가 다 된 듯 해서 2층에 올라가 빨래를 널기 시작했습니다.
빨래를 너는데도 그녀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면서 빨래집게를 담아 두는 통이 혼자 스르륵 미끄러지며 베란다 밖으로 떨어져서 빨래집게들이 아래층 지붕 위에 다 떨어져 펼쳐져 버렸고, 빨래집게를 담았던 통은 지붕 아래로 굴러 떨어져 버렸습니다.
이게 무슨 일이래 라며 간신히 손을 뻗어 빨래집게들만 수습해서 다시 빨래를 널려고 하는데, 동수 씨가 베란다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더니 "올리브나무. 스테르고스에게 전화왔는데." 라고 했습니다.
저는 불길한 마음에 날카롭게 되물었습니다.
"왜? 뭐래?"
"마리아, 갔대."
동수 씨는 제 얼굴을 살피더니 잠시 제게 시간을 주고 싶은 듯 자리를 피해주었습니다.
혼자 남은 저는 베란다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아 낮부터 참았던 눈물을 쏟았습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저만치 집 뒷편에서 마리아의 딸이 동네 아이들과 노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직 소식을 모르는 그 아이가 듣지 못 하게 저는 숨죽여 흐느꼈습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내 그리스인 친구 마리아와 제 사이에 남은 시간이 조금이라도 있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썼었는데, 이제 우리에겐 더 이상 남은 시간이 없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많은 사람들이 주변인들에게 미처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혹은 자신들도 준비가 안 된 채 세상을 떠납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땐 오늘처럼 내가 너무 늦었구나 후회하곤 합니다.
초등학교 때 친했던 오빠가 하루 아침에 사고로 세상을 떴을 때도, 고등학교 때 사랑했던 목사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을 때도, 외할머니께서 떠나셨을 때도, 친할머니께서 떠나셨을 때도...
그 밖의 다른 여러 지인들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많은 순간 '나와 그 사람 사이에 시간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고 내가 너무 늦었다'는 사실에 후회의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그렇게 후회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 마음에 '어떤 이를 찾아 가 살펴보고 함께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면, 이제 미루지 말고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멀리 있는 가족들에게도 더 자주 전화하며 챙겨야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 더 자주 할머니 집에 와 있게 될 마리아의 딸을, 그저 자주 챙겨주어야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나이 마흔 넷,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내 친구 마리아를 위해 이제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으니까요.
작년 여름, 마리아나와 함께 있는 마리아의 막내 딸 흐리스파
여러분과 가족,지인들 사이에도 남은 시간이 늘 많이 있길 바라며, 또 그 시간들이 열린 따뜻한 마음들로 가득하길 바라며...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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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새 답글을 너무 못 써서 어디부터 어떻게 써야할지도 이젠 잘 모르겠는...그래서 독자님들께 많이 죄송한 마음입니다.
제가 여러가지 직업의 일을 하고 있다보니 일이 바쁜 것도 있고,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책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난 주엔 건강검진을 받느라 검사가 많아 더 정신이 없었는데요.
방명록에는 웬만하면 답을 하고 있으니, 자주 댓글을 쓰시는 분들이나 오랜만에 댓글을 쓰시는 분들은 방명록에도 안부를 남겨주시면 답을 하도록 노력할게요.
그리고 아마 답글은...제가 할 수 있는 여력 안에서 그냥 쓰게 될 듯 합니다. 혹시 쓰신 댓글에 답글이 없게 되더라도 양해 바랄게요.
정말 제가 여력이 안 되서 그런 거랍니다.
여러분, 행복하세요!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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