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그리스인 시어머님은 꾸미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보통의 그리스 여자들이 그렇듯, 화장을 안 하고 외출을 하시지도 않고 여윳돈이 생기면 예쁜 신발을 사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어머님은 중요한 파티가 있으면 "매니큐어! 페디큐어!" 라고 혼자 외치시며, 예쁜 한 가지 색깔로 손톱 발톱을 잘 바르고 다니십니다.
역시 꾸미길 좋아하는 보통의 그리스인 여성들은 특수 직업이 아닌 다음에야 손톱관리를 안 하고 다니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엔 한국만큼이나 네일샵이 흔하고 그 가격도 물가에 비해 저렴한 편입니다.
* 그리스 전국 네일샵 평균가격을 조사해 보니 약 15유로~60유로(한화 22,000원~90,000원) 정도인데요, 원래 그보다 더 비쌌으나 경제 위기 이후 네일케어, 네일아트도 상시 세일하는 곳이 많아졌습니다.
그리스 로도스의 네일샵들입니다.
하지만 어머님의 어린 시절은 여유롭지 못 했고, 그런 영향으로 어머님은 나이가 드신 지금도 과한 돈을 쓰는 데엔 간이 콩알만해지는 우리네 어머니들과 비슷하십니다. 그러다 보니 그 흔한 네일샵에서 제대로 네일케어를 받아보신 적은 이제껏 단 한번도 없으셨던 것입니다.
연말 연시 파티 시즌이 막 시작되었을 무렵, 바쁜 요리를 끝내 놓고 손님들이 오기 전에 집안 음식 냄새를 제거하고 빛의 속도로 옷을 갈아 입고 화장하고 손톱에 뭐라도 막 바르고 있는 저를, 어머님은 물끄러미 바라보시며 이렇게 말하곤 하셨습니다.
"너는 참 이런 걸 빨리 잘 하더라?"
웃음이 쿡 터져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색깔과 디자인 맘에 드세요? 제가 오늘은 시간이 없으니까 다음에 다른 파티가 있을 때 제대로 한번 해드릴게요.^^"
어머님과 몇 년을 함께 지내다 보니 "너는 참 이런 걸 빨리 잘 하더라?" 란 말이 "나도 너처럼 손톱을 꾸미고 싶은데." 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한국에 살 때 강의를 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청강하는 사람들이 강의 내용도 신경 쓰지만 강사의 옷차림이나 화장, 머리스타일 등에도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안 이후로 어쩔 수 없이 손톱을 관리했었고, 매번 네일샵에 가는 것이 부담스러워 혼자 손톱을 꾸밀 수 있도록 몇 달 동안 동료들과 그룹을 만들어 네일아트를 배운 적이 있었는데요. 그래 봤자 요즘 기막히게 '셀프 네일아트'를 하시는 분들에 비해 그냥 남에게 비호감을 줄 정도는 아닌 추레한 수준인데, 어머님은 제가 뭔가 막 도구를 이용해 손톱 관리를 하는 것이 늘 부러우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몇 번의 파티가 지나갔고... 어머님은 그 때마다 제 손톱을 보시며, "어머! 오늘은 또 새로운 디자인으로 발랐네?" 이러시길 반복하셔서 저는 마치 중요한 업무가 밀린 사람처럼 '어머님께 네일아트 해드려야 하다'는 큰 부담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드디어 12월 30일 해가 막 기우는 이른 저녁, 저는 작정하고 어머님과 마주 앉았습니다.
손과 팔 마사지부터 시작해 손톱을 갈고, 큐티클을 제거하고, 꼼꼼하게 손톱을 손질하는 데에 시간을 들였는데요.
어머님은 연신 이렇게 말 하셨습니다.
"아…난 이런 건 처음이야! 정말 처음이야! 아이구 좋다!"
한국에서 살 때 친정 엄마께도 가끔 해 드리곤 했었는데, 부모님과 떨어져 살며 연말이라 좀 헛헛한 마음을 저는 이렇게 채우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손톱을 손질해 드린 후, 연말 분위기가 나는 색깔로 칠하고 네일 팬으로 꾸며드렸습니다.
어이쿠...어머님 손을 이렇게 자세히 보긴 이 날이 처음이었데,
평생 일하시고 여전히 일하고 계신 흔적이 그대로 묻어나는, 제 친정 엄마와 비슷한 그런 손이었습니다...
다른 손톱엔 그냥 간단한 장식을 했지만, 넓은 엄지엔 그림을 그려 넣으며 어머님께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머님, 여기에 크리스마스트리와 선물 두 개를 그려드렸어요. 이 선물에 어머님이 새해에 이루고 싶은 것을 집어 넣으세요~"
시누이가 얼마전 수술을 하며, 속상하셔서 올해에는 트리도 안 꾸미시겠다고 선언하셨던 어머님을 위한, 아주 작은 트리였는데요.
완성된 손톱을 보시며 어머님은 기분이 좋아지셨고, 연신 손톱의 선물 상자에 무엇을 집어 넣을지 고민하시더니, 이내 "돈!" "건강!" 이라고 계속 외치셔서 옆에서 구경하던 딸아이를 웃게 만드셨습니다.
저는 선물 상자를 그려 넣으며, 그곳에 차마 말하지 못 하는 제 마음을 담았습니다.
'우리가 남으로 만났다면 어머님을 더 진작 좋아하며 편하게 지냈을 텐데, 서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갑자기 가족이 되어서 이렇게 서로 불편할 때가 많지만, 원래 부모나 형제도 그렇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거잖아요. 저도 저의 부족한 점을 잘 알면서도, 어머님과 제가 성격도 정말 다르고 너무 붙어 지내다 보니 어머님께 싹싹하게 못 할 때가 많아요. 어머님을 좋아하지만, 아직은 솔직히 사랑한다고 말하진 못해요. 그래도 어머님! 제가 어머님 사랑하려고 엄청 노력하는 거 아시죠? '
결론적으로 이 네일아트가 어머님께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말씀 드리자면요.
그 다음 날, 신년맞이 파티에서 한껏 꾸미신 어머님은 다른 날보다 훨씬 도도해 보이고 젊어 보이기 까지 하셨는데요.
손톱이 잘 꾸며졌다는 기쁨이, 어머님의 옷차림과 스타일에도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시종일관 도도한 컨셉을 유지하시느라 얼굴이 굳어 계셨지만
손이 보이도록 자세를 취하는 것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기분이 마구 들뜨셨던 어머님은, 결국 그 다음 날이었던 새해 첫날 파티가 끝나자 마자 어머님의 초등학교 동창인 오랜 친구분과 그분 별장이 있는(그리스는 부자가 아니어도 별장을 가질 수 있어요. 이 얘긴 다음에.) 다른 섬으로 휙 여행을 떠나버리신 것입니다!
그것도 4박 5일 동안이나요!
4박 5일!
무려 4박 5일!!!!!
이렇게 아버님과 떨어져 어머님이 어디론가 긴 여행을 가신 것은, 제가 오래 전 그리스 여행 중 어머님을 친구의 어머니로 처음 알게 되었던 그 날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집에서는 늘 큰 소리 치시지만, 어디나 시아버님과 함께 다니는 것을 좋아하시는, 바깥 세상에 대해서는 좀 소극적인 어머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어머님의 일탈은 우리가족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불편하시겠구나 걱정되었던 아버님은 자유롭게 친구분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셨고,
저는 불시 방문의 방해를 받지 않고 맘 놓고 소파에 누워서 뒹굴 거릴 수 있었으며,
남편은 '이상하게 집이 참 조용하고 좋다.'라며 짧은 평화를 만끽했습니다.
며칠 후 어머님이 돌아 오셨고 "아니, 이건 왜 이런데. 어머나, 이건 뭘까? 나 없는 사이에 네 시아버지 많이 불편했대지? 난 여행에서 낚시도 하고 바닷가에서 커피도 마시고 친구랑 엄청 즐거웠는데! 미안해서 어쩌지!~~~" 라며 분주히 집안을 돌아다니시다, 저희 집도 왔다 갔다 하셔서 다시 집안 분위기가 들썩들썩 해졌는데요.
이 네일아트의 나비효과를 보니, 앞으로도 가끔 해 드려야겠다 싶었습니다.
여러분 즐거운 금요일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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