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름을 처음 들었던 학생 때부터, 저는 낯선 이 사람이 반갑진 않았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유명인들이 다 그렇듯 다양한 학문에 박학다식한 이 사람의 이름을, 고등학교 수학 교과서를 놓는 순간 내 평생 다시 들을 일이 또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마리아나 숙제를 봐 주는데, 교과서에 뙇! 하고 나타나 준 이 사람의 이름과 얼굴에 헉!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마치 집안에서 그냥 돌아다니다가 이유 없이 식탁 모서리에 배가 찔려서 으헉! 하고 비명을 지를 때처럼, 아무 생각 없던 저를 갑자기 아주 기분 나쁘게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그리스 초등학교 수학책에 실린 내용을 잠깐 보면,
피타코라스의 곱셈 도표를 보여주며 그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피타고라스의 도표(곱셈) 피타고라스(피싸고라스Ο Πυθαγόρας)는 기원전 6세기 정도의 사모스 섬 출신의 사람입니다. 그는 항상 숫자를 바라보던 사람으로 불리는데요. 아시아를 여행했고, 이집트에서 그곳의 철학, 수학, 천문학, 의학을 연구했습니다. 또한 그는 철학과 수학, 그 밖의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피타고라스 학파'를 설립했습니다. 발췌 : 2014년 그리스 초등학교 3학년 수학 교과서 3-2 중에서 번역(의역): 꿋꿋한올리브나무 |
이 그리스 교과서에 실린 내용을 보는데 제 마음엔 하나의 엉뚱한 생각이 파바박 번개처럼 스쳤습니다.
오늘 보니 아저씨, 천재였군요!
그런데…그 옛날에 아시아에 갔었다고요?
아하! 알고 보니 그리스 인근 아시아를 말하는 거네요.
그런데 난 말이지요.
당신이 이왕 멀리 가는 거,
한국까지 좀 와서 한국어를 배우고 돌아갔으면 어땠을까 싶은데요.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실은 작년 부터 저는 그리스 구구단 때문에 미춰~ 버릴 것 같은 순간이 몇 번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 아이들은 요새 빠르면 유치원에서도 구구단을 배운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정규교과 과정에서 곱셈이 나오기 시작하는 때부터 학교에서는 구구단을 외우도록 시키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리스에서도 대개 곱셈이 나오는 초등하교 2학년 때부터 학교에서 구구단을 외우게 하고 시험보기 시작하는데, 문제는 지나치게 원리 위주로 되어 있는 그리스 수학 때문인지, 구구단을 한국만큼 달달 외우도록 시키진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마리아나가 2학년 때부터 3학년이 된 지금까지도 수시로 구구단을 점검해 보곤 하는데요.
왜냐하면 그리스어로 구구단을 외운 딸아이는 큰 숫자끼리의 곱셈에서 빠르게 답하지 못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7x8 9x8 이런 숫자 말이지요! 답을 알지만, 느릿 느릿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평소 말이 느린 편은 아닌데도 말이지요!
곱셈은 어찌보면 앞으로의 모든 수학의 기초가 되는 부분이므로 아무래도 구구단을 빠른 발음으로 외우도록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데, 아무리 강조를 해도 녀석의 답은 느릿 느릿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으아~~ 속 터져! 구구단에서 빨리 답이 안 나오면 나눗셈이나 분수나 아무 것도 못 한다고!!
이제부터 수학에서 내내 써야 하고, 생활하면서도 내내 써야 하는데 어쩌려고 이러냐!"
아무리 녀석을 닦달해도 이 그리스어 구구단 속도가 나아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느 순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스어 구구단은 한국어 구구단 만큼 빠르게 반사적으로
결코 외울 수 없겠구나!'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를 들어, 7x8=56 을 한국어로 외우면 칠팔에 오십 육 이렇지만,
그리스어로는 이렇습니다. 에프따 포레스 옥또 이네 베닌다 엑시!
이렇게 음절이 많아서 아무리 이 말을 요약을 해도 에프따 옥또 베닌다 엑시 정도로 밖에 안 되어서, 그리스 아이들이 '구구단 하나 마다 이렇게 긴 음절'을 입에 딱딱 붙게 빨리 외우기는 정말 쉽지 않겠다 싶었습니다.
도대체 쉽게 외워지지 않는 음절 수인 것입니다! 아무리 피타고라스의 후예 그리스인이라고 해도 말이지요!!
그러니 그리스인 모임에서 음식값을 9명으로 금새 나누는 제가 수학 천재 소릴 들었던 것입니다.(고등학교 때 수학 성적표 보고 혀를 차던 저의 엄마가 아시면 썩소를 흘리실 일이지요.) 그리스어 구구단이 이렇게 잘 안 외워지니 계산기 없이 생활 속의 나누기가 빨리 되는 그리스인들이 적을 수 밖에요.
결론적으로 저는, 피타고라스 아저씨가 BC 6세기에 여행했다는 중앙 아시아를 넘어 한국으로 왔다면, 그리고 만약 한국어로는 숫자를 말할 때 음절이 이렇게 간단하다는 것을 알았다면(한글은 있기 전이지만 한국말은 지금과 비슷했겠지요?), 어쩌면 곱셈을 도입할 때 한국어로 읽도록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한국어 숫자 발음은 딱딱 떨어져서,
원래 발음을 딱 떨어지게 말하는 그리스인 입장에선 배우기도 쉬웠을 텐데...
수학기호를 다 그리스어로 넣은 것은 어쩔 수 없지만
피타고라스 씨가 그 옛날 만약 한국에 왔다 갔다면,
적어도 어쩌면 전 세계 곱셈의 발음에도 영향을 미쳤을 지도 몰라!'
...라며 제 상상은 피타고라스 아저씨를 데리고 저 멀리 중력 없는 대기권 너머로 빠져나가고 있었습니다.
결국 미춰~ 버리겠는 이 그리스어 구구단의 기나긴 음절들 앞에 무릎 꿇은 저는, 조용히 딸아이에게 한국어 구구단 송을 유투브에서 찾아 틀어 주었고, "반복해서 들으며 한국어로 외워봐라…이미 그리스어로 외웠는데 한국어로 왜 또 외우게 하나 싶어 네가 힘들 수 있지만, 이렇게 안 하면 네 숙제 봐주다가 너무 늦은 발음의 너의 그리스어 곱셈 대답에, 성질 급한 내가 속이 터져서 피타고라스 아저씨 얼굴 사진에 연필로 낙서를 하고 싶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아..."라고 설득했습니다.
이 엄마가 한국에서 나고 자라서 한국어 구구단의 신속함을 이미 알아버려서 정말
미안하다. 사랑한다.
... 라고 짐짓 소지섭의 대사를 뿜어주며, 오늘도 먹을 것으로 이 상황을 무마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피타고라스 학파의 지금 보면 대박 웃긴 BC 6세기 종교적 철학으로 글을 마무리합니다.
"콩을 엄청 좋아하고, 떨어진 것도 잘 주워 올리고, 빵도 덩어리 째 뜯어 먹고, 화환의 꽃도 잘 뜯고,
불빛 곁에서 거울도 잘 보는 나는!?
아저씨 철학에 동의할 수 없다고요!!
콩을 동경하면 반역이 되는 BC 6세기 아저씨와 제자들 사이에서 안 살았던 게 다행이구나 싶네요~!"
여러분 신나는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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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어와 그리스어 구구단 발음을 비교하며, 어디까지나 제가 상상한 내용이므로 수학자분들께서는 그냥 웃어 넘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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