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비가 오기 직전, 우연히 지나가다 찍은 사진인데 꼭 멋진 작품처럼 나왔네요^^
'첫 번째 비' 라는 말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저는 아홉 살쯤 여름의 어떤 오후가 떠오릅니다.
여름 방학을 앞 둔 여느 한국의 장맛비였는데, 그날 따라 우산을 챙기지 못해 비를 쫄딱 맞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체크 무늬 원피스, 축축한 운동화, 젖은 책가방…
그런데 초인종을 아무리 눌러도 집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 분쯤 서서 기다리다가 바로 옆 동에 사는 친구 집으로 가 보았습니다.
오 층이었던 친구 집 앞 복도에 서서, 열린 부엌 문틈으로 따뜻해 보이는 불빛 아래 엄마와 친구의 엄마, 친구 그리고 제 동생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십여 분을 그렇게 안쪽을 들여다 보기만 했습니다. 달짝지근한 밀크 커피 향과 달각 달각 커피잔을 내려 놓는 소리와 두런두런 웃음소리…
초인종을 누르니 엄마와 아줌마가 달려 나와, 제 몸을 수건으로 닦아 주며 호들갑스럽게 "아침에 우산 안 가져 갔던 거야?" 라고 야단스러웠던 날.
그것이 제가 기억하는 첫 번째 비에 대한 선명한 추억입니다.
물론 더 어릴 때도 비가 왔을 것이고 비를 맞고 돌아다닌 적이 있었겠지만 이런 일상이 첫 번째 비에 대한 기억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은, 한국에서는 비가 더 오냐 덜 오냐의 차이가 있을 뿐 계절과 상관 없이 비가 오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긴 여름 7개월 동안 비 구경하기 어려운 그리스에 살며 이 '첫 번째 비' Πρώτη Βροχή [쁘로띠 브로히]가 그리스인들에겐 전혀 낭만적이지도 아름다울 수도 없는 추억을 갖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 북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그리스 전국은 여름 내내 비가 오지 않습니다.
처음엔 어떻게 그렇게까지 비가 오지 않을 수 있을까 신기할 정도였는데, 그리스에서 첫 겨울을 경험했을 때 내내 미친 듯이 쏟아지는 폭우를 보며 이걸로 식수가 해결될 수 있구나 알게 되었습니다.
최근 며칠, 그리스 전국엔 긴 여름이 끝나감을 알리는 '첫 번째 비'가 내렸는데요.
어제 SNS에 그리스인 친구가 로도스 해변의 첫 번째 비가 오던 날의 사진을 찍어 올렸는데,
마치 토네이도처럼 구름과 파도가 휘몰아쳐서 깜짝 놀랐다고 하네요.
로도스도에 엊그제 내린 이 첫 번째 비 때문에,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이며 정신 없는 하루를 보내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그리스에서 이 첫 번째 비는 절.대.로. 우산 없이 맞아서는 안 되는 비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리스는 에개해와 지중해라는 환경 덕분에, 겨울 한 가운데쯤에 오는 비는 그냥 좀 맞아도 상관 없을 만큼 깨끗한 비가 내립니다.
그러나 이 첫 번째 비는, 7개월간 건조할 대로 건조해진 땅을 미끄럽게 만들어 차사고를 유발할 뿐 아니라, 지붕이나 건물에 그간 쌓인 먼지들을 흘러내리게 만들고 이집트에서 날아온 적사(붉은 모래)가 섞인 구름을 동반하고 있어 그야말로 붉은 색 흙비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이 비를 피하기 위해 이 무렵엔 열심히 일기예보를 들여다보게 되지만 어쩌다 비 소식을 놓친 경우 그리스의 보편적 교통수단 중 하나인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들은 아주 낭패를 보는 것입니다.
제 앞에 오토바이를 타던 여성이 급하게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란다는 흙비로 더러워지고 자동차들도 얼룩덜룩 해집니다.
제 차도 엄청나게 붉게 얼룩져서 결국 비가 그친 다음날 손세차 하러 들러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기다리는 동안 춥다고 엄마 카디건을 입고 있는 딸아이.
저는 고슴도치인지, 그냥 딸아이가 뭘 입어도 다 예뻐 보입니다. (죄송해요.--;)
저희 가족들도 첫 비 소식을 하루 전에야 알게 되어, 바다에서 배를 끌고 들어와야겠다는 생각에 밤 9시 넘어 자동차로 배를 견인하느라 고생할 수 밖에 없었고, 급하게 베란다의 딸아이의 튜브 수영장과 여름 물건들을 정리하느라 아주 정신이 없었습니다.
(작년에 첫 비가 왔을 때, 이 튜브 수영장을 미처 정리하지 못했더니, 그 큰 게 폭우에 날아가 엉망인 상태로 옆집 정원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제 그리스에 첫 번째 비가 내렸으니 1~2주 더 덥다가 10월 15일을 기점으로 대부분 호텔이 문을 닫기 시작하며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될 것입니다.
오늘은 또 다시 이렇게 맑은 날씨여서, 저 멀리 보이는 다이빙대에 사람들이 올라가서 뛰어내리며 수영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어요.
결론적으로, 그리스인들에게 '첫 번째 비'의 추억을 묻는다면, 대개 비가 갑자기 와서 고양이와 쥐가 집에 뛰어 들어와 깜짝 놀랐다 라든가, 너무 더럽다 라든가, 정신 없었다, 바빴다, 무서웠다 등의 이야길 듣게 되는 것입니다.
현관 앞 데크가 흙비로 더러워지자, 방충망 너머로 집에 들어오고 싶어하는 미옹이의 간절한 눈빛을 마다할 수 없어,
잠깐 집에 들어와 쉬게하고 다시 내보냈습니다.^^
겨울 내내 내리는 습하고 으슬한 비는 그리스인들에게 낭만이나 시원함을 선사하진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리스 음악 중에, '비처럼 음악처럼'과 같은 서정적인 비에 관련된 노래는 찾아보기 어려운 듯 하네요.
여러분은 '첫 번째 비' 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기억이 제일 먼저 떠오르시나요?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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