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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그리스 문화

낮잠이 게으름의 상징이라고 오해하면 안 되는 그리스 문화

by 꿋꿋한올리브나무 2013. 9. 24.

 

 

 

 

처음 이민 왔을 때, 딸아이가 가족들로부터 자주 주의를 들었던 말이 있습니다.

"넌 왜 낮에 낮잠을 안 자니?" 라든가, "지금은 한 낮(Μεσημέρι 메시메리)이라고! 절대 떠들면 안 돼. 경찰이 올 수도 있다고." 였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게 잘 이해가 가질 않았는데요.

그리스에서는 아무리 이 한 낮 메시메리에(2:30-5:00) 문 닫는 상점이 많고, 대부분 사람들이 집에 와서 밥을 먹고 쉰다고 해서, 자기들이 피곤해서 잠깐 낮잠들을 자면서 왜 애한테 주의를 시키나 싶었고, 경찰이 올 수도 있다는 말은 좀 과장된 말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이 시간은 한참 왕성하게 활동할 시간이기 때문에 그 패턴이 평생 몸에 익은 저와 딸아이는, 이 시간에 집에서 시끄럽다는 주의를 듣느니 더워도 밖에 돌아다니자 해서, 이 시간에 문을 연 에어컨 빵빵한 상점들을 그냥 열심히 돌아다녔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나이가 많거나, 몸이 아프거나, 혹은 신생아를 키우는 엄마가 아닌데 이 시간에 낮잠을 매일 자는 사람을 볼 때 분명 좀 게으르다는 인상을 갖기도 했었기 때문에, 당시 저는 이민 초기라 그렇게 낮잠을 한 두 시간이라도 꼭 자려고 하는 그리스인들이 어쩐지 게을러 보였습니다.

하루는 제가 이 한낮에 바쁘게 돌아다니다가 어떤 급한 일이 있었던 친척과 시내에서 마주쳤고, 그 친척이 "왜 메시메리에 쉬지 않고 돌아다녀? 뭐 급한 일 있어?" 라고 묻는데 그만 이렇게 말해 버리게 되었습니다.

"전 아직 낮잠의 필요성을 못 느껴서요~"

요염

그러나 이민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이 말이 얼마나 교만한 말이었나를 진심으로 뉘우치며 깨닫게 되었습니다.

엉엉 

정말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한 일에 대해서 함부로 얘기하면 안 되는구나. 엉 엉...

 

 

잠깐, 그리스에 대해 잘못 알려진 정보를 알고 가실게요~*^^*

흔히 그리스를 소개하는 책자에, 이렇게 그리스인들이 뜨거운 한낮에 낮잠을 자는 것에 대해서 '씨에스타' 라고 소개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그리스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표현이기 때문에 사실 잘못된 표현입니다. 만약 그리스인들에게 '너희들도 씨에스타가 있지?' 라고 묻는다면 '뭔 소리하냐?'라는 반응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어로 낮잠이란 단어는 Μεσημεριανός ύπνος(메시메리아노스 이프노스)라고 하고, '하루의 한 가운데' 라는 뜻의 «Μεσημέρι 메시메리»라는 단어로 이 낮잠을 잘 수 있는 시간에 대해 대표적으로 지칭합니다.

 

제가 1년을 그리스에 살고 난 후, 깨닫게 된 것은 이랬습니다. 

OECD 유럽 가입국 중 가장 긴 노동 시간을 갖고 있는 그리스인들은 이 길거리를 돌아다니기도 어려운 뜨거운 메시메리에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자고 그 대신에, 다른 나라 보다 아침 일찍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더 늦게 하루 일과를 마치는 것이었습니다!

아침 7시 반이면 관공서나 은행이 문을 여는 곳이 많다보니 거기에 맞춰 아침 일찍 업무가 시작되는 곳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공과금을 많이 내는 어느 월말 아침 8시, 시내 은행에 갔는데 대기 순번 250번을 받고 기함하게 놀란 적도 있습니다. 도대체 제 앞의 250명은 몇 시부터 은행에 왔단 말일까요. 인터넷뱅킹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데 말이지요.   

그렇게 메시메리까지 일곱 시간을 일하면 일과가 끝나는 직업도 있고, 메시메리 때 밥 먹고 쉰 후 다시 나가 일해야 하는 직업도 있습니다.

저희 사무실의 경우 메시메리에도 문을 닫지 않기 때문에 돌아가며 그 시간에 일을 하는데 매니저 씨의 경우 그 시간에도 집에 들어오지 않고 밤 늦게 까지 계속 일을 한답니다.

언젠가 소개한 저희 거래처인 아테네 유로은행 직원의 경우도 메시메리에 쉬고 밤 10까지 잔무와 외근 업무를 또 해야 해서 실제 하루 12시간 이상을 일하는 셈이라 만날 때마다 본인이 밤엔 정말 몇 시간 못 잔다고 하소연할 때가 많습니다. 

만약 이 사람이 메시메리에 잠깐 이라도 눈을 붙이지 않는다면 뜨거운 여름이 길어 체력 소모가 큰 그리스에서의 일상을 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오죽하면 하루 중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고, 편히 쉬는 메시메리 직전인 2시 쯤 아는 사람과 헤어질 때는 "Καλό μεσημέρι! 갈로 메시메리!" (좋은 메시메리 되세요!) 라고 인사를 할까요!

 

 

또한 오전 업무만 하는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도 낮잠이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인들이 워낙 모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다들 바쁘니 주말에 주로 모이지만, 어떤 모임은 어쩔 수 없이 평일에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일단 모였다 하면 밤 12시 넘어 까지 앉아서 서로 먹고 마시고 천천히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만약 낮잠을 조금이라도 자지 않고 아침 일찍 일어나 이 시간까지 버티려면, 체력이 도저히 따라 주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그리스인들의 낮잠은, 해가 길고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볕에 일의 능률이 오르지 않는 날씨를 겪어오며 오랜 전통으로 자리잡게 되었는데요. 우리나라에도 알려진 바대로, 짧은 낮잠이 신진대사를 더 활발하게 만들어 일의 능률을 올려준다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면서, 더욱 지속된 문화가 된 것입니다.

 

결국 이런 그리스의 문화를 몰랐던 저는 이민 1년 만에 저녁 모임에 앉아 언제 집에 돌아갈 지 모르는 사람들이 부디 이야길 마치고 돌아가길 기다리며, 테이블에서 꾸벅꾸벅 조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졸려4

사람들은 제가 낮잠을 자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너 오늘 낮에 좀 안 잤어?" 라고 걱정스럽게 물었고, 저는 더 이상 "저는 아직 낮잠의 필요성을 못 느껴요."라고 잘난척하며 대답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에서 짧은 낮잠은, 게으름의 상징은커녕 살아가는 데에 꼭 필요한 체력을 비축하는 필수 요소였던 것입니다.

물론 매니저 씨처럼 낮잠을 잘 상황이 안 되어도 기본 체력이 좋아 잘 버티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도저히 이러다가 쓰러지겠다 싶어서 이민 1년이 지난 이후부터는 밤 늦게 파티가 잡힌 날은 반드시 낮잠을 한 시간이라도 자도록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남의 집 파티에서 집에 먼저 가고 싶어서 안절부절 하는 것도 미안했고, 저희 집인 경우 언제 집에 돌아갈 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을 졸면서 기다리는 것은 정말 보통 고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렇게 낮잠을 잔 후부터는 파티를 조급해하지 않고 그럭저럭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에서는 명절 전 날 며느리가 낮잠 자는 것을 시어머님이 본다고 해도 죄가 되지 않는 것이랍니다! 

음하하하하...이런 장점도 하나 있어 줘야 대단한 그리스 시어머님과 살아갈 수 있겠지요?

우하하

 

결론적으로, 그리스에서는 이 메시메리에 웬만큼 급한 일이 아닌 경우 남의 집에 전화하거나 찾아가는 것도 실례라는 것과, 실제로 한 밤 중엔 워낙 파티들을 자주 하니 약간 소란스러워도 경찰을 부르지 않지만 이 금쪽같은 휴식시간인 메시메리에 주택가에서 소란스럽게 한다면 정말로 경찰이 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아두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희 앞집엔 그 문제로 이웃을 신고한 경우도 실제 있었답니다.)

 

유레카를 외친 고대 그리스의 학자 아르키메데스가 욕조에서 왕의 왕관의 순금 여부를 측정하는 법을 발견했을 때도, 

그리스인인 그가 사실은 욕조에 누워 잠시 낮잠을 자다가 일어난 일이라는 것도 우연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음 기회에 이 아르키메데스가 외친 것이 정확하게는 유레카, 라는 단어가 아니었음에 대해서도 한번 소개하도록 할게요^^

 

여러분 즐거운 하루 되세요!

 좋은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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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사진을 보면 마음이 시원해진다는 독자님이 계셔서, 며칠 전 급히 또 한 장을 찍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