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에 와서 한국보다 습도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느꼈던 잠깐의 순간이 무색하게 오늘 하루 내내 40도를 웃도는 햇볕에 머리가 지끈 거리고 가만히 집에 앉아 있는데도 땀이 주루룩 흘러 온 가족이 한 방에 에어컨을 켜고 들어 앉아 있다가, 요리 조차 할 수 없어 피차리아에서 스파게티와 샐러드를 시켜서 먹으며 물을 배가 부를 만큼 폭풍 흡입하였습니다.
물을 마셔도 또 목 마르고 마셔도 또 목마른 뜨거운 날씨를 경험하다 보니 문득 그리스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라서 피식 웃고 말았는데요.
본의 아니게 제가 승무원을 깜짝 놀라게 만든 사건을 소개해 봅니다.
인천공항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헤어지며 엄청난 양의 눈물을 쏟아낸 딸아이는 밤 12시가 넘은 시간에 출발한 비행기에 몸을 싣자 마자 물 한잔을 겨우 마시고 골아 떨어졌습니다. 저 역시도 딸아이와 함께 고개를 맞대고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식사를 나누어 주기 시작했는데, 장거리 비행이 의례 그렇듯 한번의 식사를 먼저 배식하고 나머지는 몇 시간 후에 배식하는 듯 했습니다.
저는 어차피 자면서 가려 했기 때문에 첫 식사를 건너뛸 생각으로 신경 쓰지 않고 자고 있었습니다.
사실 저를 먼저 놀라게 만든 것은 제 오른 쪽 통로를 담당하던 아시아인인 승무원이었습니다.
보통 깊이 자고 있으면 굳이 깨워서 배식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마 초보 승무원인 듯, 정신 없이 고개를 흔들며 자고 있던 제 어깨를 씩씩한 손놀림으로 턱 하고 잡으며,
영어로 "식사하시겠습니까?" 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저는 하고 놀라며, 무의식 중에 " No thanks!" 라고 대답을 하고 특이한 승무원이 이 라인을 담당했구나 생각하며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몇 시간을 그렇게 잤을까요?
기내는 모두 불이 꺼져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을 자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목 베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앉아서 자는 게 불편한지 몸을 뒤척이던 딸아이는 갑자기
"할아버지! 아니야!" 라며 잠꼬대를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딸아이 잠꼬대를 진정시켜야겠다는 생각에 눈꺼풀을 겨우 밀어 올리며 딸아이 가슴팍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는데, 딸아이 옆에 앉아 있던 키가 큰 중년의 한국인 남자도, 갑자기 잠꼬대를 시작하는 게 아닙니까!
그런데 분명히 탑승할 때 한국인임을 확인했던 남자는 이상한 아랍어를 말하며 잠꼬대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카타르가 목적지라 저 남자 아랍어를 말할 줄 아나 봐. 일 때문에 출장 가는 걸까?
짧은 시간 그런 생각을 스치듯 하기가 무섭게, 남자는 또 아랍어로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는 듯한 잠꼬대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뙇!
딸아이가 마치 그 남자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남자가 잠시 잠꼬대를 멈춘 틈을 타서 계속 잠꼬대를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랍어를 전혀 모르는 제 귀에 이 두 사람의 낮은 잠꼬대 이중주는 이렇게 들렸습니다.
"할라쿰, 알라 알라 알라 알라 할라쿰 알라 알라 알라...."
"할아버지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고!"
"@#$%&^&*@#$^%&*&$#@!!!!!!"
"할아버지! 아니야!"
.......................................................................................................
저는 이 두 사람의 잠꼬대 이중주에 너무 당황을 했고, 갑자기 목이 심하게 마르면서 물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컴컴한 제 오른쪽 통로 쪽으로 아까의 그 승무원이 쟁반에 물을 몇 잔 들고 지나가고 있었는데요.
워낙 캄캄하게 조명을 낮춰 둔 상태라, 그녀는 그녀를 쳐다보는 제 눈을 미쳐 발견하지 못하고 제 옆을 지나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또 다시 두 사람의 잠꼬대는 시작되었고, 저는 목이 타들어 가는 기분에 이미 지나쳐 버린 그녀의 팔을 제 오른 팔을 길에 뻗어서 턱, 하고 잡아버린 것입니다.
그녀는 어둠 속 등뒤에서 뻗어 나온 팔이 자신의 팔을 턱 하고 잡자, 히익! 소리를 내며 놀라 거의 쟁반을 엎을 뻔 했고, 겨우 몸의 균형을 맞춘 후 떨리는 목소리로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무..무..무엇이 필요 하십니까..."
물어보는 그녀의 목소리는 된통 놀란 듯 쉰 목소리를 내며 떨렸고
저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재빠르게 고개를 들며 "무..무..물 좀 주세요...." 라고 말을 했는데,
그녀는 저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더 식겁하여 살짝 뒷걸음을 치며 물을 내밀고 급히 종종걸음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이유를 깨닫지 못 했던 저는 잠시 후 화장실에 세수를 하러 가서 비로소 승무원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탐승 당시 묶고 있었던 머리 끈이, 상모 돌리듯 머리를 흔들며 잠을 청한 탓에 헐거워져서 등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가 마치 조선시대 대역 죄인 같이 산발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자신의 팔을 갑자기 붙잡은 것도 놀랄 일인데, 돌아보니 그런 모습으로 물을 달라고 애원했으니...
언젠가 다시 만난다면 꼭 미안하다고 말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즐거운 월요일 되세요!
* 비행기에서 내릴 때, 입구에 서 있던 그녀가 머리 빗고 세수해서 단정해진 저를 못 알아보는 눈치여서 더 미안했습니다...ㅎㅎㅎ
* 그리스로 돌아와, 그간의 긴장이 풀린 저는 주말 내내 체체파리 물린 사람 처럼 자고 일어나고 자고 일어나고를 반복 했는데, 너무 많이 자서 허리가 아플 지경이랍니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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