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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그리스 문화

고단한 버스기사를 위한 그리스 가족들의 따뜻한 명절 전통

by 꿋꿋한올리브나무 2014. 4. 22.

  




저희 집 앞엔 한 시간에 두 번 버스가 지나갑니다.

두 개의 노선 버스가 지나가는데, 시내 복잡한 상업지역부터 주택가 곳곳을 도는 이 버스들은 총 노선 길이가 한 시간이어서 승객이 늘 많은 편입니다.

 

그리스 최대 명절인 빠스하(부활절)였던 지난 일요일, 예년처럼 많은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 바비큐를 하며 떠들썩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작년과 달리 염소 통구이가 아닌 통돼지구이를 하기로 한 가족들은, 이른 아침부터 통 구이를 굽는 기계를 돌렸습니다.


  

통구이는 총 4 시간 이상을 구워 줘야 기름이 쭉 빠지고 안쪽까지 다 익기 때문에 

자동으로 돌려 주는 기계로 돌리고, 중간 중간 허브 양념이나 와인(혹은 맥주) 등을 발라가며 구워야 합니다.

오래전엔 직접 손으로 봉의 끝을 잡고 돌려주었다고 하는데, 

 명절 때마다 얼마나 팔이 아팠을까요??


이웃집 요르고스 아저씨 댁의 염소 통구이입니다.


 

저희 집의 명절 음식들입니다.


 



그렇게 가족들이 어느 정도 먹고 마시며 파티가 무르익을 오후 두 시 무렵, 집 앞으로 버스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때 한참 파티를 즐기던 동수 씨가 갑자기 버스 기사를 향해 "이따 돌아서 나올 때 잠깐 서주세요!" 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버스는 저희 동네 안 쪽으로 들어가 정거장 한 곳에 들렀다가, 다시 동네 밖 큰 길로 나가기 위해 저희 집 앞을 지나야 하는데 그 때 잠깐 서 달라는 얘기였습니다.


'올해도 동수 씨가 집안 전통을 지키려는구나.' 싶었는데요.

 

그리스인 가족들이 해마다 빠스하 명절 때 행하는 전통이 있는데, 그건 바로 이것입니다.

  

 

명절 음식을 한 접시 준비해

  

   

그리스의 점심 시간인 오후 2시에 지나가는 버스를 세우고


  

 

기사 아저씨에게 음식 접시와 음료를 건네는 것입니다.

   

  

"여기 음식이에요! 좋은 부활절 되세요! (갈로 빠스하!)"


"여기 콜라도요!"



명절인데도 일을 해야 하는 기사 분을 위한 배려인 것이지요.

사실 운전기사 분과 크게 일면식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가족들은 모두 차나 오토바이로 출퇴근을 하니까요.

 

하지만 몇몇 식당이나 카페를 제외하고는 모두 문을 닫는 큰 명절에, 적은 수의 승객을 위해서 수고를 하는 기사 분들은 동네를 돌면서 담 너머로 저희 집처럼 떠들썩하게 파티를 하는 광경을 계속 목격하며 운전을 할 테고, 그에 대한 작은 배려를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에 와서 처음 이 장면을 보았을 때, 이렇게 차를 세우는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다른 승객들이 싫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놀랐었습니다.

하지만 제 그리스인 가족들이 이렇게 '모르는 남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며 따뜻한 배려를 하는 것'은 특별히 이들이 좋은 사람들이기 때문만은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예부터, 집에 찾아 온 손님들을 맨 입으로 절대 돌려보내는 게 아니라는 사고가 깊이 자리 잡혀 있고 아무리 바빠도 삶의 여유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제가 같은 집이나 다름 없는 바로 뒷집에 사시는 시부모님 댁에 가서 의논할 일이 있어 아주 잠시 자리를 잡고 앉을 때에도, 시어머님은 "커피 줄까? 뭐 마실래?" 라고 반.드.시. 묻곤 하시는데요.

"아니에요. 마시고 싶으면 집에서 가져올게요."

라고 말씀을 드려도, 어머님은 

"아니야. 이렇게 내 집에 왔던 사람을 절대 그냥 보내는 게 아니란다. 우리 그리스인들은 그래. 예전에 고성 안에 살 때에는 관광객이 정말 집 앞에 많이 지나다녀서, 바비큐 하던 것을 한 점씩 얻어 먹고 가는 경우도 자주 있었는걸?" 

라고 말 하시며 뭐라도 꼭 먹고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듯 그리스에서는 관광객이나 낯 모르는 사람들이 어쩌다 실수로 관광지가 아닌 동네로 들어와 잠시 더위를 식히려고 나무 그늘에 서 있다가 동네 아주머님이 보시고 데려가 커피라도 대접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 것입니다.

물론 시 안 쪽의 상업지구나 빌딩이 많은 쪽은 워낙 사람이 붐비는 곳이니 이런 경우를 보기 어렵지만, 굳이 시골이 아니고 심지어 아테네라 하더라도 좀 한산한 주택가에서 대문을 열고 청소를 하는 아주머니로부터 물을 얻어먹는 경우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스를 여행하셨던 저희 엄마도 다른 지역에서 자유시간에 혼자 집들을 구경을 하시다가 어느 할머님으로부터 커피를 얻어 드신 적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최근 이런 그리스인들의 인정 많은 관습을 악용해, 노인들이 연금을 받는 날짜인 월말을 노려 커피나 물을 얻어 마시며 "정말 곤란한 일이 있어서 그런데 잠시만 돈을…"이란 식으로 노인들의 한달 생활비를 몽땅 사기를 치는 수법이 늘고 있어서 안타깝기만 한데요.

제 양쪽 시할머님들도 이런 사기를 각각 당해보신 경험이 있으셔서, 어느 나라나 사람들의 따뜻한 인정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분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그리스인들의 사람을 대접하는 인정 많은 전통이 바뀌진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랜 서적들 속에도 이런 그리스인들의 손님을 맨 입으로 돌려보내지 않는 문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올 만큼, 

수천 년을 거듭해온 그들의 모습이니까요.

  

오늘 기사를 통해 세월호 구호품을 납품할 수 있도록 알선하겠다는 식의 사기 행각을 벌인 사람들이나 이런 혼란스러운 틈을 타 자기 잇속을 챙기려는 사람들에 대한 소식을 여러차례 접하게 되었는데요.

이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어떻게든 사람들이 세월호 희생자 가족을 돕고 싶어하는 이 상황에서 그런 사기를 벌이는 사람들이 다 있을까 화가 나기 이를 데 없고 누구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당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리스인 이상으로 이 많다는 장점을 갖고 있는 한국인들이니 이런 불미스러운 일들이 있다고 해서 어려운 이웃을 직간접적으로 돕는 일을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한국인으로 사는 게 얼마나 더 팍팍해지고 얼마다 더 믿을 사람이 없어지더라도 말입니다.

우리 한국인은 미개한 국민인 아닌, 참 괜찮은 국민들이잖아요. 


여러분 힘내는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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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저는 썼던 글 전체를 다시 살펴볼 일이 있어, 구석구석을 댓글까지 다시 보게 되었는데요.

   왜 이렇게 놓치고 답글을 못 쓴 댓글들이 많은지 정말 죄송하더라고요.

   이 기회를 빌어서 사과를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댓글을 놓쳐서 답글을 못 썼더라도 너무 실망마시고 

   또 한번 최신 글에 댓글 남겨 주시면, 성실히 답변하도록 할게요.

   여러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