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때의 그리스인 남편 동수 씨의 육아 철학은 참 단순합니다.
"어린이는 즐거워야 한다! 어린이는 건강해야 한다! 어디서나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행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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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이렇게 요약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에 이사왔을 때, 처음부터 자신의 육아 철학대로 딸아이에게 강하게 밀어부친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스에서 어린이가 건강하고 즐겁게 살려면 놀 때 신나게 그리스 아이들과 잘 어울려 놀 수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 수영과 자전거타기를 잘 할 수 있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리스 아이들은 남녀 구분 없이 5~6세만 되도 두발 자전거를 탈 줄 아는 아이들이 참 많아서 그게 참 신기했는데, 이는 대부분의 그리스 아빠들이 동수 씨 같은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동수 씨는 평소 겁이 많은 마리아나에게 망가져도 부담 없는 보조바퀴 달린 헌 자전거를 구해 손수 핑크색으로 페인트칠을 해서 자전거를 타게 하더니, 마리아나가 그 헌 자전거 타기가 익숙해지자 초등학교 1학년 생일 때는 보조바퀴가 달린 좀 더 큰 새 자전거를 사 주었습니다.
이미 동네의 다른 또래 아이들은 모두 보조 바퀴 없는 두 발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데도, 겁이 많은 마리아나는 좀처럼 보조바퀴를 떼는 것을 무서워했습니다. 하지만 동수 씨는 "이러다 자칫 다른 아이들과 어울릴 때 소극적이 될 수 있다. 어떻게든 두발자전거를 가르치겠다!" 선언했고, 보조장비를 잔뜩 갖추게 한 뒤 과감하게 보조바퀴를 떼고 자전거를 타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처음엔 많이 넘어지고 피가 나도록 상처가 생겨 울기도 했지만, 어찌나 동수 씨가 강하게 스파르타식으로(스파르타의 후예여서일까요!) 밀어부쳤던지 마리아나는 하루 만에 기적적으로 두발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수영도 마찬가지였는데요. 여름엔 일이 바빠 같이 바다에 나갈 날이 별로 없지만 틈만 나면 바닷물을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는 수영 방법에 대해 동수 씨는 아이에게 가르치고 또 가르쳤습니다.
그리스 바닷물 참 깨끗하지요?
그런데 그리스에 살다 보니, 동수 씨의 말대로 그리스 부모들이 아이를 데리고 공원에서 모임을 가질 때 자전거를 들고 오라고 말하기도 했고, 어떤 생일 파티 초대장엔 아예 자전거를 들고 오거나 수영복을 입고 오라고 특별히 표시가 된 것도 있었습니다. 섬이 많고 바다를 끼고 형성된 도시가 많은 그리스의 다른 지역 아이들도 여름이면 비슷하게 모여 신나게 자전거를 타거나 수영을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1학년 때, 한 생일파티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는 마리아나입니다.
작년 10월, 산악 지대의 한 공원에서 생일 파티가 있었는데
역시 자전거를 갖고 와 함께 타며 노는 아이들입니다.
몇 주 전 주말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날씨가 제법 따뜻했던 날이라 마리아나는 오랜만에 동네 아이들과 모여 신나게 뛰어다니며 놀게 되었는데, (저희 동네는 200채의 집이 모여있는 주택가인데 뒤편은 나무가 많은 들판이라, 어른들이 돌아가며 아이들을 잘 살펴준다면 요즘 같은 날씨엔 놀기가 참 좋습니다.)
퇴근해 돌아온 동수 씨는 "마리아나는?" 물었고, 제가 "응. 이제 춥지 않아서 오랜만에 밖에서 애들하고 놀아." 이랬더니, 마치 드라마의 허세 가득한 실장님처럼 고개를 막 가로로 저으며 물개박수를 과한 동작으로 치면서 "브라보! 마리아나! 그렇게 뛰어 놀기도 해야지. 맨날 숙제하고 학원가고 집에 틀어박혀서 공부만 한다면 그건 어린이가 아니지! 브라보!!!"
이러며 유난을 떠는 게 아니겠어요?!
동수 씨...그런 말을 꼭 그런 표정과 동작으로 해야할까??
물론 그렇다고 애 성적에 신경을 안 쓰느냐, 그건 또 아니면서 말입니다. 다행히 마리아나가 여태 동수 씨의 높지 않은 기준에 못 미치는 성적을 받아온 적은 없어서, 성적으로 애를 나무란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이런 동수 씨의 육아 철학에 대해 너무 애를 몰아부치는 것만 아니면 저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동수 씨가 마리아나에게 하는 행동 중에 제가 한 가지 이해 할 수 없는 부분이 생긴 것입니다!
동수 씨가 아이에게 지.나.치.게. 강조하며 못 하면 혼을 내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다름아닌 바로 '글씨를 예쁘게 쓰는 것'에 관한 부분이었습니다.
물론 그리스 학교 역시 한국만큼이나 학교에서 바르고 예쁜 글씨체를 강조하는 편이라서 성인 그리스인 중에도 글씨를 참 예쁘게 쓰는 어른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갈리그라피καλλιγράφοι (예쁜 글씨를 쓰는 사람, 글씨를 잘 쓰는 사람)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며, 그런 예쁜 글씨를 쓸 줄 아는 사람은 큰 능력을 가진 듯 칭찬을 하는 분위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유아기를 보내며 한글 동화책만 보다가 그리스에 와서 그리스어 글자들을 어떻게 쓰는지를 처음 배운 마리아나가, 초등학교에 들어갔다고 해서 그리스어 글자를 예쁜 글씨체로 잘 쓸 줄 알 리가 없었는데요.
저도 아이가 글씨를 예쁘게 쓰면 좋겠지만, 그리스어 글자를 읽고 쓰며 공부를 잘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용하게 여겨졌던 터라 글씨를 예쁘게 쓰라고 강요하고 싶진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동수 씨는 마리아나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부터는 매일 아이 공책을 열어 글씨 검사를 하는 게 아니겠어요?
"글씨를 좀 예쁘게 쓰라고!!"
심지어 못 쓰면 다시 쓰라고 애가 이미 다 쓴 것을 자기가 막 신경질적으로 지우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좀 심한 것 아닌가 싶었고 하루는 진지하게 동수 씨를 붙잡고 물었습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애 글씨에 집착하고 잘 쓰라고 야단치고 그러는 거야?
저만하면 나쁘지 않는데. 왜에?"
동수 씨의 대답은 뜻밖에도 이랬습니다.
"그건…
내가 글씨를 못 쓰기 때문이야! 흑.
아마 다시 글씨 쓰길 처음부터 배운다면 이렇게 쓰진 않을 것 같아.
근데 지금은 이미 손이 굳어서 예쁘게 쓸 수가 없어"
그랬던 것입니다.
동수 씨는 사실 저도 어떤 철자는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글씨를 많이 날려 쓰는 편이긴 합니다.
그렇다고 저는 그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본인은 그게 굉장히 싫었던 모양입니다.
심지어 그리스 여중생처럼 그리스어 글씨를 쓰는 저를, 동수 씨가 계속 부러워하길래 "뭐야? 소녀감성 글씨체를 좋아하나?" 라고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사실은 자신의 콤플렉스가 있으니 그런 말을 했던 것입니다.
마리아나의 글씨에 집착하는 이유를 듣고 나니, 어쩐지 동수 씨의 행동이 좀 다르게 보였습니다.
동수 씨가 꼭 우리네 엄마 아빠들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한국의 부모들도 대부분 저마다의 교육 철학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자녀에게 교육하려고 하지만, 어느 순간 자신이 못 다한 것을 자식이 이뤄주길 바라고 내가 잘하지 못 했던 것은 자식이라도 잘 하길 바라는 그런 본능적인 마음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으니 말입니다.
저도 부모님으로부터 그런 기대를 받으며 자랐기 때문에 '내 상처나 부족함을 자식에게 투영하지 말자'고 다짐다짐을 하지만, 어떤 땐 아이에게 내가 못 했던 것을 잘 하길 속으로 은근히 바라곤 해서 흠칫 놀라며 "이러지 말아야지" 다시 마음을 다잡게 되곤 하는데요.
그렇기에 동수 씨의 마음이 참 이해가 갔습니다.
그래서 저도 동수 씨를 거들기 시작했습니다. 다 커서 고치는 것도 아니고 어릴 때 예쁜 글씨 쓰기가 뭐 박사학위 따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아닌데, 돕자 싶었습니다.
동수 씨가 안 볼 때 마리아나에게 당부하게 되 것입니다.
"네가 글씨를 예쁘게 쓰면 아빤 정말 좋은가 봐. 그러니 너도 노력해 보자. 응?"
결국 3학년에 된 마리아나의 글씨는, 그럭저럭 나쁘진 않는 글씨체로 자리잡는 중인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딸아이의 공책을 들여다 볼 때마다 동수 씨가 짓는 표정인데요.
딸아이가 시험을 잘 봤을 때보다도 더 기쁘고 뿌듯하게 만개한 웃음을 짓는 것입니다.
"글씨를 잘 썼으니, 뽁뽁이를 5장 줄게! 마리아나!
내가 페인트 사면서 너 줄려고 주인에게 졸라서 덤으로 얻어왔거든!!
하하하하"
그럴 때면 '참... 그리스인인 당신도 한국의 보통 아빠 같구나. 자기가 못 한 걸 자식이 잘 하길 바라고, 잘 하니 그렇게 좋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신나는 금요일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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