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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그리스 문화

내 그리스인 친구를 완전 변하게 한 어느 일 주일

by 꿋꿋한올리브나무 2014. 4. 1.

 

 

 

"일은 잘 하고 온 거야?"

지난 주 출장을 갔던 친구 스테르고스가 오늘 저희 사무실에 들렀고 반가운 마음에 일 얘기부터 묻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인 남편 동수 씨에겐 가장 소중한 친구입니다.

몇 주간 못 만났었기에, 그간의 근황에 대해 서로 물었습니다.

얼굴이 햇볕에 좀 그을린 그는, 타 지역 출장 동안 집밥이 무척 그리워서 오늘은 그의 어머님인 제 이웃의 술라 아주머님이 특별히 만든 생선스프(우리나라 어죽 같은 느낌입니다.)를 먹기 위해 어머님 집에 와서 밥을 먹을 거라고 했습니다.

언제나 마리아나를 특별히 예뻐해서 생일 때마다 용돈을 챙겨주는 친구라, 저는 이번에 마리아나가 성적표를 받은 이야길 했습니다.

처음 저희가 이민을 왔을 때 그는 그리스어 쉬우니까 금새 배울 거라고 많이 격려를 해주었던 만큼 매번 마리아나의 성적표가 나오면 그리스어 성적을 묻곤 했는데, 이번엔 이상하게도 성적을 얘기해주자 이제까지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전까지는 "그럼, 쉬운 그리스어인데 당연히 점수를 잘 받아야지!" 이런 식의 반응이었는데, 이번엔 "다행히도 마리아나가 이번에 그리스어 점수를 잘 받았더라고. 감사한 일이야..." 라고 제가 말을 하자, 그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정말이야?" 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늘 하던 말인 "그리스에 사니까 그리스어를 잘 하는 게 당연하지!" 란 식의 말은 전혀 꺼내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확실히 많이 변했습니다.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처럼 말이지요.

그가 변한 것은 지난 12월 오스트리아에 1주일동안 다녀온 직후부터였습니다.

 

 

몇 번 소개했듯, 그는 동수 씨의 오스트리아 사촌 마사와 양쪽 집안에서 결혼 얘기가 오갈 만큼 좋은 연인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마사는 스테르고스와 사귀는 몇 년의 세월 동안 그리스어를 열심히 배웠고 곧 그리스로 이주할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사실 그녀는 강박증이 심한 아버지 아래서 원치 않는 음악 공부를 하며 심한 우울증을 앓았었다고 했습니다.

그녀 안에는 여리디 여린 심성이 있었고,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그런 여린 심성이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해서, 스테르고스와 마사를 굳이 이어주려는 동수 씨를 몇 번이나 말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혼자 그리스에 휴가를 와서 그녀가 저희 집에 묵고 갔을 때 그녀는 여러 가지 상처들을 쉽게 제게 내 보였는데, 제가 두 사람의 급한 만남을 말린 것은, 이전 남자친구로부터의 상처가 아직 덜 아문 그녀가 자칫 새로운 관계에서 그 상처들로 인해 집착과 불안증을 보일 수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녀에겐 혼자 상처가 좀 아물만한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보였기에, 저는 동수 씨에게 그런 그녀의 '제게 터 놓았던 자세한 얘길' 옮길 순 없었지만 그저 조금만 더 있다가 두 사람을 소개해도 늦지 않을 것 같다고 말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성격 급한 동수 씨는 내막도 알지 못 하니 둘을 밀어부쳤고, 결국 둘은 연인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스테르고스는 흔한 그리스 남자 답지 않게 몇 년을 혼자 지내는 중이었습니다.

그는 비록 오래 전 저와의 첫 만남에서 마초적인 그리스 남성의 강함을 드러내려 했듯 전형적인 그리스 남자이지만(2013/04/27 - 팬티 차림으로 나를 맞이한 외국인 남편 친구들), 본래 성향이 보수적이고 진중한 편이기에 쉽게 사람을 만나지도 쉽게 헤어지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그를 보아왔던 저희 시누가 "스테르고스는 로도스에서 가장 멋진 남자지."라고 말할 정도로 사실 그는 괜찮은 사람입니다. 제가 작년에 수술을 받을 때 동수 씨와 함께 저를 위해 기꺼이 헌혈을 해주었던, 제게도 고마운 친구입니다.

 

 

그런데 그런 괜찮은 남자인 그에게 제가 느끼는 딱 한 가지 불편한 점이 있었는데, 그는 보수적인 만큼 고정관념이 좀 강한 사람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이제껏 살면서 그리스 국내에서는 출장으로 안 가본 곳이 없을 만큼 돌아다녔지만, 단 한번도 해외에 나갈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그리스에 살기 시작한 이후에도 그가 변변히 일을 쉬는 것을 보아온 적이 없으니, 아마도 14년 동안 한 직장에서의 그의 충성심과 성실함이 해외에 나갈 여유를 주지 못 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에 대해서는 짐작만 할 뿐, 진심으로 그 상황에 대해 이해할 수는 없고, 그래서 많은 경험을 하면 할수록 '내가 겪어 보지 않은 남이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구나 깨닫게 되곤 합니다.

 

해외에 나가본 적이 없었고 게다가 고정관념이 강했던 그는, 평소 아주 좋은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민 왔던 초기부터 늘 저에게 이런 말을 했었습니다.

 

"올리브나무! 넌 왜 자꾸 영어를 쓰니? 그리스 말을 쓰라고! 여긴 그리스야!

그렇게 영어를 써 버릇하면 그리스어가 안 늘어!"

 

그의 말이 맞는 말이긴 하지만, 어떤 땐 참 서러운 말이었습니다.

내가 모국어인 한국어를 쓰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그리스어보다 편해서 영어를 사용했던 건데, 그것도 생활을 해나가야 하니 의사소통의 도구로 어쩔 수 없이 쓰는 것을, 그렇게나 무안하게 타박을 주나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저를 볼 때마다 그렇게 입버릇처럼 얘기했고, 그리스어가 문법은 어렵지만 쉬운 언어인데 빨리 더 잘 하도록 배우라고 저를 채근하곤 했습니다. (사실 쉬운 언어는 결코 아닌데 말입니다...)

 

제가 가끔 그리스 음식이나 그릭 커피를 좀 입맛에 덜 맞게 만들면, 한번씩 충고를 하기도 했습니다.

"올리브나무. 이건 아주 쉬운 거야. 너도 금방 배울 수 있을 테니 다음엔 이렇게 만들어 봐." 라고요.

물론 저를 위해서 해준 말이란 것을 알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했기에 뭐라 반박할 거리도 없었지만, 이민 초기엔 부담스러운 말들인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는 살면서 영어를 굳이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었고, 그래서 여자친구인 마사에게도 꿋꿋하게 그리스어만 사용해서 그녀의 그리스어 실력을 일취월장 시켜주었습니다. 심지어 "올리브나무처럼 영어와 섞어서 사용하면 처음에 배우는 게 늦으니 아예 독일어나 영어를 쓸 생각 말고 그리스어만 써봐. 넌 그래도 엄마가 그리스인이니 올리브나무보다 낫잖아."라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랬던 스테르고스가!!!

오스트리아에서의 생활 1주일을 경험한 후에, 완전 다른 사람이 된 것입니다.

 

제가 이제는 그리스인들과의 일상 대화 중에 영어를 섞어 쓰지 않으니 더 이상 영어 쓰지 말라고 제게 잔소리할 일은 없지만, 그래도 한번씩 완벽한 그리스인다운 삶에 대해 저에게 충고 비슷한 것을 하곤 했었던 그가! 오스트리아에 다녀온 이후로는 단 한.번.도. 그런 말을 입밖에 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제가 그 친구가 우리 집에 왔을 때 커피를 만들 때에도, 뜨거운 커피? 찬 커피? 라고 물을 때조차

"아무 것이나 너 편한대로 만들어 줘." 라고 말 하는 게 아니겠어요????

이럴 수가요! 저는 뜨거운 커피를 끓일 때는 커피 3스푼, 설탕1스푼, 크림 1개, 찬 커피를 만들 때는 커피 3스푼, 설탕1스푼, 얼음 잔뜩 이라는 그의 커피 취향에 대해, 제가 실수할까 봐 늘 계산하고 있었는데, 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사연은 이랬습니다.

그는 마사가 그리스로 이주하기 전에, 여자친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에 한번 들르기로 한 것입니다.

고모님이나 고모부님은 이미 자주 본 사이였기 때문에 저희 부부도 그 친구가 거기에 가면 행복하게 잘 지내다 올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예정했던 3주 일정을 다 자르고 정확하게 1주일 만에 항공권을 바꿔서 그리스로 돌아와버린 것입니다.

이유는…

마사와 결별했다고 했습니다.

 

그의 얘기로는, 오스트리아에서의 마사는 그리스에서 만났던 그 마사가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오스트리아에서의 그녀는 정확하게 오스트리아인이었고, 그리스에서의 다정한 그 마사가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갑자기 처음 보는 낯선 여자와 마주한 기분이었다고 했습니다. 이 부분을 두고 그는 그녀와 몇 차례나 대화를 시도했지만, 그녀는 네가 예민한 거란 식으로 그의 얘길 무시했고 결국 그는 이 만남을 지속할 수 없겠다 싶어 그리스로 돌아와 버린 것입니다.

 

신중한 사람이 어쩐 일인가 싶었지만, 나중에 고모님을 통해 내막을 알아보니, 마사가 지난 가을부터 스테르고스와의 관계와 그리스에서의 삶에 대해 좀 회의적이었고 그래서 그가 오스트리아를 방문했을 때 이미 마사의 마음이 떠난 상태였던 것 같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항공권을 바꿔 급하게 그리스로 돌아오려다 보니, 동유럽 국가 한 곳을 우회해야 했는데 영어를 전혀 못 하는 그는 그 곳에서 만 하루를 머무는 동안 밥 한끼를 사 먹지 못 했다고 합니다.

그리스에 도착하자마자 동수 씨가 공항으로 마중 나갔고 집에 돌아오며 내내 말이 없었다고 하는 스테르고스.

 

그는 시간이 지나 동수 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짧지만 해외생활은 사람을 참 겸손하게 만드네... 난 내가 알고 있던 모든 세계가 다 무너진 기분이야. 차라리 여행으로 그곳에 갔다면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생활 속에 들어가 1주일 동안 독일어만 들으며 그들 방식 그들 문화 속에 살면서, 난 내가 과거에 얼마나 잘못 생각하고 살아왔는지 깨달았다. 올리브나무에게도 그 동안 너무 미안했고, 네가 한국에 살다 온 뒤로 왜 그렇게 변했는지도 이제는 이해가 된다."

 

 

역시 지혜로운 사람답게 짧은 시간 단번에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오늘도 저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 변해 아직은 어색하게 그와 대화를 하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비록 그에겐 중요한 인연이 끝이 났지만, 그 인연 덕에 큰 것을 얻어 다행이라고요.

그리고 더불어…

한국에 살 때 한껏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핑크 공주처럼 약간은 공주병 기질이 있었던 유아기의 제 딸아이가, 그리스에서 몇 년을 살다 작년에 한국에 갔을 때 보는 사람마다 "마리아나 공주 병 없어졌네. 어디 간 거에요??? 엉뚱한 것은 여전하지만 어떻게 애가 이렇게 바뀌었대요??" 라고 묻는 질문들에 대해 제가 했던 대답도 떠올랐습니다.

"인종차별이 공주병의 특효약인가 봐요. 분명 얘는 그리스에서 서러운 시간도 보냈지만 그게 도리어 약이 되었을 거라고 저는 믿고 있어요. 그건 제게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리스에서의 삶은 저에게 일말의 교만함도 허락하지 않네요. 내가 한국에서 얼마나 인정받았건 얼마나 대단했건 얼마나 대접받는 위치에 있었건, 그 딴 것은 기억도 안 날 상황이 늘 제 앞에 펼쳐지니까요. 분명 그것은 고생스럽지만, 지금은 저 자신을 위해 실보단 득이라고 생각해요."

 

 

스테르고스와 저희 부부는, 그렇게 지금까지보다 한발 더 서로를 이해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희 부부에게 소중한 친구인 그에게, 또 다른 좋은 인연이 찾아오길 기도해봅니다.

 

 

여러분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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