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4월은 한국의 4월만큼이나 꽃이 만개한 때입니다.
한국과 피는 꽃의 종류는 다르지만, 겨울 동안 많은 강수량으로 푸르렀던 나무와 풀들이 건조한 여름이 되어 초록이 바싹 말라 누런 건초로 변하기 전인 4월은 특히 가는 곳마다 아름답게 꽃을 피웁니다.
(물론 그리스는 일년 내내 꽃을 볼 수 있는 곳도 많습니다. 로도스 역시 겨울엔 좀 종류가 적지만 일년 내내 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즘 그리스에 많이 피어있는 꽃들입니다.
로도스의 몬테스미스 언덕에 피어 있는 꽃들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 호텔들은 4월 중순을 넘어서며 문을 열고 본격적인 여름 관광객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리스 다수 지역에서는 이르면 4월 말이면 한 낮에 바다 수영을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렇게 꽃이 만개한 그리스의 4월에, 유난히 가짜 꽃인 조화(
그리스에 여행으로 왔을 때에도 아테네에서나 로도스에서나, 유난히 조화를 파는 가게가 많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물론 인테리어 소품을 파는 가게에 구색 맞추기로 조화를 팔기도 했지만, 시내 곳곳엔 아예 조화만 파는 가게들이 유난히 많았고 이런 가게들은 4월이 되면 평소와 달리 메시메리에도 문을 닫지 않고 (그리스는 PM2:30-5:00에 문을 닫는 가게가 많습니다. 관련글-2013/09/24 - 낮잠이 게으름의 상징이라고 오해하면 안 되는 그리스 문화) 더 많은 가짜 꽃을 가게 밖에 진열하며 손님을 기다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생화를 파는 꽃가게까지도 4월이면 조화를 앞쪽에 진열했습니다.
대형 마트의 소품 코너에도 4월이면 평소보다 조화의 양이 두 배로 늘어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에 이민 왔던 첫해엔 그런 모습이 더 눈에 들어와 굉장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가게들과 사무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저희 사무실 근처에는 이런 조화만 전문으로 파는 가게 세 곳이 50m 간격으로 있어서 좀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저희 사무실 근처의 조화 파는 가게
가게 이름이 '이리니(여자 이름) 조화' 입니다.
가구나 인테리어 소품 매장이 줄지어 있는 지역은 따로 있는데, 차라리 그런 곳에 조화 가게를 차리지 왜 이런 일반 상가지역에 줄줄이 조화가게를 차렸을까 싶었던 것이지요.
로도스 이케아입니다.
저희 집에서 차로 20분 떨어진 곳에 있는데, 이 거리엔 가구와 소품 매장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그런데 막바지 비가 오던 그 해 4월, 시어머님은 저를 데리고 그 조화가게에 들르셨습니다.
그리고 조화 한 다발과 리스(Στεφάνι Τεχνητά Λουλούδια) 하나를 구입하셨습니다.
'집에 새로 장식을 하시려나?' 라고 짐작했는데, 유난히 원색이 섞인 것들을 고르셔서 '어머님 취향이 색깔이 화려한 것을 좋아하시나?' 싶었고, 차라리 '집 근처 5분 거리에 큰 인테리어 소품가게에 파는 무난한 색의 조화를 사시지 왜 여기서 구입하셨을까?' 궁금했지만 차마 묻지 못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어머님은 제게 어디에 좀 같이 가자고 하셨고, 저는 어머님이 말씀하시는 장소가 어디인지 당시엔 이민 초기라 도무지 그 단어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함께 무작정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도착해보니, 그 곳은 동수 씨의 외할아버지와 친할아버지께서 묻혀계시는 국립 묘지였습니다.
어머님은 두 묘 앞에 들러 준비해간 청소도구로 비석을 닦고 주변 잡초를 뽑고, 더러운 것들을 치우며 정성껏 청소를 하신 뒤, 가방에서 뭘 꺼내시는 데 자세히 보니, 다름 아닌 며칠 전에 저와 함께 가게에서 샀던 그 조화 다발과 리스를 가져오신 거였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두 할아버님의 비석 앞에 잘 놓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집 근처 대형 마트에 따로 마련되어 있는 성묘용 리스 코너입니다.
저는 그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갔습니다.
4월은 그리스의 최대 명절인 빠스하(Πάσχα부활절)가 있는 달이고, 해마다 날짜가 조금씩 바뀌긴 해도 학교는 2주, 직장은 사흘 이상 쉬게 됩니다.
즉, 명절 전후로 그간 일상 생활에 바쁘던 그리스인들은 돌아가신 가족의 묘를 찾아 청소를 하고 조화를 놓고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들을 기억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명절 전후에 벌초를 하며 성묘를 하거나 납골당을 찾는 것과 비슷한 풍습인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에서는 묘 앞에 음식을 차려 놓고 절을 하진 않지만, 묘 앞에서 먼저 간 가족을 그리워하며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점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해마다 명절인 빠스하가 있는 4월엔, 국립묘지나 납골당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조화 가게가 더 성황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해마다 조화를 새로 사서 갖다 두는 이유는, 햇볕과 바람이 강한 지중해성 기후의 그리스라서, 전에 갖다 두었던 조화들이 빛이 바래지고 형태가 망가져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묘지에 가져가는 조화들은 앞에 언급한 대로 집을 꾸미는 조화의 정교함보다는 좀 유치하다 싶게 원색이 많았던 것입니다. 덜 망가지고 오래 예쁜 빛을 띄길 바라는 마음으로 만들어진 것이지요.
이렇게 4월의 그리스 국립 묘지에 가보면 ,눈부시도록 흰 대리석 비석에 예쁘고 눈에 띄는 형형색색의 새 조화들로 가득 차서 그 모습이 아름다울 정도입니다.
그리스 깔파쏘스의 국립 묘지
성묘용 십자가 모양의 조화
이렇게 4월에 조화를 많이 파는 이유를 알고난 뒤 생각해보니, 저희 사무실 근처에 왜 조화 가게들이 줄지어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는데요. 그 도로는 시내를 통과하는 대부분의 버스가 지나는 도로인데 조화 가게들이 있는 그 도로에서 버스를 타면 바로 로도스 국립 묘지까지 갈 수 있는 버스 노선이 많았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 명절 때 그리스에서 일어나는 현상 중 한국과 비슷한 것을 소개하자면, 바로 '명절 연휴보다 미리 고향에 다녀오기' 입니다.
그리스 역시 가족끼리 뭉치고 모이는 문화가 크게 자리잡고 있는 나라이다 보니, 명절이면 의례 부모님을 찾아 뵈어야 한다고 생각들은 하는데요.
고향을 떠나 타지에 살고 있는 경우 원래는 명절 연휴에 고향에 가야 하지만, 섬이 많은 그리스의 빠스하 명절 때는 항공권이나 기차, 버스 등의 가격이 훨씬 비싸고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구하기가 어려운 경우도 많기 때문에 몇 주 전에 미리 다녀오는 경우들도 있는 것입니다.
딸아이 학교 친구들만 해도 4월에 명절 방학이 2주나 있는데도 불구하고, 3월에 할머니 할아버지를 뵈러 부모님의 고향에 미리 다녀온 아이들이 올해에도 6명이나 되었습니다.
미리 수업 결석 조치를 하고 아테네에 다녀 온 아이가 3명, 북부나 다른 섬에 다녀온 아이가 3명인데, 학급 인원이 18명이니 30%의 아이들이 미리 고향에 다녀온 것입니다. 물론 나머지 아이들 중에도 타지에서 온 아이들이 있는데 이 아이들은 연휴 동안에 고향에 갈 티켓을 작년 11월에 미리 사 둔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제가 아테네 등으로 휴가를 못 가 아쉬웠던 또 다른 이유를 생각해보니, 딸아이 반 친한 엄마들이 고향에 부모님을 뵈러 명절 전 미리 다녀왔던 영향도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알리끼 네는 아테네에 1주일, 바실리끼 네는 코스에 1주일 머물다 왔어요.)
명절이라고 미리 티켓을 사고 아이들 수업을 빠지더라도, 고향에 갈 수 있고 부모님을 만나고 올 수 있는 그 엄마들이 좀 부러웠던 모양입니다.
저는 어차피 한국에 다녀 온지 1년도 되지 않아 조만간 다시 갈 수는 없을 테고 그리스 내에 고향도 없으니, 로도스가 고향이라고 생각하며 이번 빠스하 명절에는 어머님 대신 제가 할아버님들 묘를 청소하러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올해는 동수 씨가 꽃을 놓으며, 할아버지 묘의 작은 사진 앞에서 눈이 빨개지도록 울지 않고 할아버님을 추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돌아가신 지 한참 지났는데도 아직도 자신과 이름이 같았던 할아버지를 많이 보고싶어하는 동수 씨입니다.
여러분 따뜻한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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