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산 지 6개월 된 알리끼의 책가방 끈 부분이, 벌써 떨어져서 천이 너덜거리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나와 알리끼가 일 주일에 두 번 방과 후 합창단 연습을 시작하며, 야근이 잦은 알리끼 엄마 마리아를 대신해서 매주 목요일은 제가 아이를 챙겨 집에 데려다 주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아이의 책가방이 눈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분명 작년 9월에, 3학년에 올라오면서 새로 산 책가방이었습니다. 알리끼 엄마가 어디서 책가방을 살까 고민하다가 좋은 브랜드의 책가방이 세일하길래 알리끼 동생 것까지 두 개를 샀다며 보여주었기 때문에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평소 밖에서는 수줍은 마리아나와 달리, 활동적이고 스포츠를 좋아하는 알리끼답게 아마 가방을 급히 던져 놓고 운동장을 뛰어다니다가 그렇게 더 빨리 가방 천이 떨어져버린 모양입니다.
활동적이고 재미있는 것을 좋아해서, 사랑스러운 알리끼.
작년 여름 소풍 때, 시키지도 않았는데 춤을 추는 모습이 귀여워서 얼른 찍어 주었어요.^^
그런데 알리끼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그리스 초등학교 아이들의 책가방은 1년을 버티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정말 내구성이 좋은 소재의 비싼 책가방을 아주 조심스럽게 다룬다면 2년을 쓸 수 있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새 학년에 올라갈 때, 책가방도 매년 새로 사게 됩니다.
마리아나가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저도 이런 점이 잘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한국아이들보다 책가방을 험하게 쓰는 걸까?
가방 질은 다 좋아 보이는데, 왜 가방들이 1년을 못 버티는 걸까?'
마리아나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이 의문은 자연스럽게 풀렸습니다.
이유는 바로 '가방이 벽돌 몇 장은 집어 넣은 것만큼 무겁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방이 이렇게 무거우니, 자연스럽게 가방이 쉽게 닳을 수 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초등학생들, 그것도 저학년부터 이렇게 가방을 무겁게 들고 다녀야 한다는 것이 처음엔 잘 납득이 가질 않았었는데요.
일단 1학년부터 7교시로 운영되는 수업 때문에 7교시에 해당되는 교과서와 문제풀이집(그리스 교과서엔 문제풀이집이 과목마다 세트로 묶여 있어, 교과서를 줄 때 함께 나누어 줍니다.)이 있으니, 그리스어처럼 하루 2교시를 진행하는 수업이 있다고 해도, 7교시에 해당되는 교과서와 문제풀이집과 공책, 필통, 색연필, 사인팬 등등을 다 넣으면 가방이 이렇게 무거워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리아나 학교의 아이들이 아침 조회 때 책가방을 매고 있는 모습입니다.
책가방이 워낙 무거우니, 일찍 온 아이들은 교실에 가방을 두고 내려와 조회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공교육 강화시스템으로 학교 수업이 빡빡하게 돌아가는 그리스 초등학교라면,
왜 아이들이 가방을 미어지게 들고 다녀야 하는데도 사물함이 없을까? 그것이 또한 의문이었습니다.
알아본 바 로도스 시 내의 23개 초등학교뿐만 아니라 로도스 섬의 로도스 시 외곽의 100개가 넘는 초등학교는 물론, 아테네 등의 다른 도시의 초등학교에도, 교과서나 공책을 학교에 두고 다니는 큰 사물함을 갖고 있는 학교는 거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딸아이의 교실에도 자, 풀, 색연필, 사인팬 등의 도구를 두고 다닐 수 작은 사물함은 있지만, 교과서와 공책을 두고 다니는 사물함은 역시 없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걸까? 그리스 공립학교는 사물함을 둘 수 없을 만큼 가난한 걸까?'
이상하게 여겨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 블로그의 한 독자분께서 아테네를 여행 중이실 때, 당시 관광가이드 분께서 그런 그리스 초등학생들의 미어지게 무거운 책가방에 대해 이런 농담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스 아이들의 책가방이 무거운 것은, 그날 뭘 공부해야 할 지 모르기 때문에 다 들고 다녀서 그렇대요~"
아마 가이드께서 여행에 피곤한 관광객들에게 재미를 주려고 그런 농담을 하셨을 거라고 생각되는데요.
설마, 그리스에서도 새 학년이 되자 마자 시간표가 나오는데, 아이나 부모가 그날 무슨 과목을 공부해야 될 지 모를 리가 없겠지요.
사실 그리스 초등학교에 사물함이 없는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아이들에게 매일 과목별로 주어지는 과중한 숙제 때문입니다.
공교육강화에 중점을 두고 있는 그리스 초등학교에서는 그리스어와 수학, 역사만 담임선생님이 가르치고, 나머지 과목들은 모두 각 과목의 담당 선생님들이 가르치게 되어 있는데요.
기본 적으로 그리스어와 수학, 역사에 대한 숙제는 매일 있다고 보면 될 것 같고, 이 숙제가 얼마나 있는지 고려하지 않는 다른 과목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본인이 원하는 숙제를 내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어와 수학, 역사 숙제 외에 영어 숙제는 기본이고 미술, 음악, 컴퓨터 등의 과목에서도 숙제가 있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날 수업이 있었던 대부분의 과목에서 숙제가 있다 보니, 아이들은 숙제를 하기 위해서는 그날 수업의 책과 공책들을 모두 다시 들고 집으로 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물함이 있어 봤자,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그리스 초등학생들을 부모가 건물 안까지 동반 등하교를 하도록 법으로 정하고 있으니, 만약 저학년 아이들의 가방이 많이 무겁다 하더라도 부모들이 대신 들어줄 수 있는 대안이 있다고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끄는 가방 역시 가방 무게가 워낙 무겁다 보니
끌 때는 덜 무거울 수는 있지만, 계단을 오르내릴 때는 어깨에 매는 가방보다 이런 가방이 더 빨리 낡게 됩니다.
최근 이런 그리스 초등학생들의 무거운 책가방에 대해, 그리스 교육계 각처에서도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공교육 강화로 숙제는 날로 늘어나고 그에 따라 가방 무게는 점점 더 무거워지는데, 이는 분명 성장기 아이들의 척추에 무리가 있다라는 의견이 속속들이 제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원문출처- http://liberty-news.gr)
최근 그리스 의회에서는 '그리스 아이들의 책가방 무게' 라는 주제를 놓고 개선책이 없는지 토론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기사에 따르면, 당시 의회에 참석했던 의원들은 그리스 아이들의 해마다 늘어가는 과제물(숙제) 때문에 책가방은 점점 더 무거워지고 있고, 이것은 아이들의 제대로 된 걸음걸이에 문제를 일으키고, 근골격계에도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신체적으로 권장 책가방의 무게는 몸무게의 10%인데, 이를 넘길 경우 척추측만, 어깨통증 등의 문제를 일으켜 성장을 멈출 수 있다고 보고 있어, 이를 개선할 방안에 대해 논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물론 그리스 초등학교들도 어느 시에 자리잡은 학교냐에 따라 이런 숙제의 정도에 차이가 있습니다.
로도스 시는 몇 번 언급했던 대로 교육환경이 좋은 도시라, 아테네나 라리사 등의 다른 대도시에서도 아이들 교육 때문에 부모가 직장을 옮겨 이사 오는 곳입니다. 당연히 부모들의 교육열이 뜨겁고 학교 숙제도 다른 지역에 비해 더 많은 편입니다. (물론 아테네는 수도이니 당연히 아테네 내에서도 교육열이 높은 -소위 학군이 좋은- 지역이 존재하지만, 이런 지역을 제외하고는 아테네 내에는 학원 등이 밀집되어 있지 않은 지역도 있어 아이 교육을 위해 시간을 분배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편이란 것이, 현재 아테네에 살며 초등학생 자녀를 둔 그리스인 친구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같은 로도스 섬이라도 로도스 시 외곽 지역의 다른 초등학교들은 확실히 숙제가 적고 수업 내용이 느슨해서, 그 지역에 사는 다른 학부모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우리 애만 너무 고생을 하나? 싶어 좀 답답한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저희는 사업 때문에 시를 벗어날 수 없어 결국 시내에 살아야 하는 입장인 만큼, 시 외곽의 아이들이 이렇게 좀 더 아이답게 느슨하게 지낼 수 있는 모습은 때론 부러움을 느끼게 만들곤 합니다.
물론 공부를 더 해서 나쁠 것은 없겠다 볼 수도 있지만, 공교육이 강화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 사교육을 지양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반면 사교육처럼 선택권이 있는 교육이 아니기 때문에, 만약 아이가 공부를 제대로 하길 원한다면 학교 공부에 있어서 아이에게는 더 많은 책임이 따르고 부모에게는 더 세세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 아이들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벌써 이 아이가 대학을 갈 아이인지 아닌지 대략 분류가 되 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모두가 대학을 가는 분위기가 아니고 대학을 가지 않아도 생계를 유지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는 국가 분위기 때문에, 공부를 미리 포기한 아이들이나 부모의 경우에도 아주 밝고 행복하다는 것이 저에겐 상당히 낯선 모습이었습니다.
결국 그리스 아이들은 '웬만한 학교에서는 사물함을 써서 2~3년에 한번 책가방을 바꿔도 괜찮은 한국 초등학생들'에 비해, 해마다 새 학년에 올라가는 시즌이 되면 책가방을 사는 열기가 뜨거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의 문구점이나 대형마트에서는 새 학기만 되면 당연히 책가방 종류가 차고 넘칠 수 밖에 없어, 아예 긴 진열대 네 다섯 개를 책가방으로만 채웠다가 새 학기가 끝나면 다시 다른 물건으로 전체를 교체 진열하는 진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google image.gr
그리스에는 The Cartoon Store 카툰스토어, 라는 비교적 고가의 정품 캐릭터 상품을 취급하는
장난감 팬시 용품 프랜차이즈 가게가 있는데요. (아테네 공항에도 있습니다.)
이 가게가 새 학기만 되면, 그 많은 장난감을 다 치우고
가게 전체를 값나가는 캐릭터 책가방 종류로만 가득 채워서 깜짝 놀란 적도 있습니다.
마리아나, 해마다 사는 책가방을 아꼈더니 운동화를 얻었어요.
제 딸 마리아나는 1학년 때는 비싸게 주고 샀던 가방을 6개월도 안 돼 금새 너덜 해지도록 들고 다녔었는데요. 다행히 그 때 본인도 창피했던지 그 경험을 바탕으로 2학년 때엔 좀 더 내구성 있는 가방으로 신중하게 골라 조심하며 사용하더니, 3학년 2학기인 지금까지 1년 반 동안 크게 상하지 않게 사용하는 조심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야 부모입장에서 돈이 굳으니 당연히 고마운 일입니다.
그래도 다른 애들 다 바꾸는데 3학년이 되며 가방을 바꾸지 않는다고 이상해 하며 돈 줄 테니 바꾸라고 재촉하시던 시아버님은 결국 마리아나가 거듭 괜찮다고 아직 쓸만하다고 말하자, 가방대신 그리스 아이들이 책가방만큼이나 자주 바꿔야 하는 새 운동화를 사주셨습니다. (체육 수업이 비가 와도 매일 있기 때문에 운동화가 잘 떨어진답니다.^^;)
자, 결론적으로 그리스 아이들은 무거운 공교육의 무게만큼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이니,
혹시 여러분께서 그리스에 여행 와 가이드님의 농담을 듣게 되시더라도 그리스 초등학생들의 책가방에 대해 오해 없으시기 바랄게요!^^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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