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저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바로 같은 병원에서 지난 토요일, 제 시누이가 입원해 작은 수술을 받았습니다.
한 시간 정도의 간단한 수술이었지만, 그래도 전신 마취를 하고 하는 수술이니만큼 가족들의 걱정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는데요.
그리스에서는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국립종합병원에 비해 병원비가 비싼 사립 종합 병원이니만큼, 시설도 의료진도 좋은 곳이지만 저희 시어머님은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는 내내 많이 초조해 하셨습니다.
어머님과 고모님, 시누이의 친구 둘과 저, 이렇게 네 사람이 수술실 밖에서 기다리며 약 2년 전에 시누이가 다른 수술을 했을 때 어머님의 당황해서 멀쩡히 뒤에 서있는 당신 딸을 두고, 엉뚱한 침대를 쫓아가며 정신줄을 놓으셨던 일을 살짝 상기시켜드렸더니, "어머, 내가 그런 적이 있었다고? 난 기억에 없는데."라고 말씀하셔서 고모님의 폭소를 자아내기도 하셨습니다.
이른 아침 수술이라 적막함이 흐르는 대기실 복도
짧지만 초조했던 기다림 끝에 수술이 무사히 끝났다는 소식을 들었고, 시누이가 마취가 깨고 회복실에서 병실로 옮겨질 때까지 저희는 병실 앞에서 기다리게 되었는데요.
그 때, 고모님께서 4월에 제가 수술했던 때를 회상하시면서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드셨습니다.
"진짜 너의 수술에 비하면, 오늘 기다리며 초조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3시간이면 될 줄 알았던 수술이 5시간이 되면서 우리가 정말 얼마나 초조했는지 넌 모를 거야. 게다가 네 시어머니처럼 이렇게 정신 없이 신경이 곤두서 있던 역할을 그땐 누가 했는지 아니? 니 남편이었어. 아주 그 성격에 수술실 앞에서 얼마나 예민해져서 난리를 피우며 신경질을 내던지, 우리가 걔 때문에 더 피곤했단 말이지."
"그 사람이 그랬어요? 전 몰랐네요."
"어휴. 당연히 너야 몰랐겠지. 아주 나중에 수술이 막 길어지니까, 네 시누이 붙잡고 이 의사가 믿을 만 한 의사가 맞냐, 혹시 잘 수술을 못 하는 게 아니냐, 아주 생사람까지 잡았었다고… 근데, 정작 제일 웃겼던 건 너였어."
"제가요? 제가 왜요?"
"너, 마취 풀리면서 병실로 들어올 때 생각 안나?"
"생각 나는데요? 제가 남편에게 '의사가 러브 미 텐더를 틀어 놓고 수술을 시작했는데 너무 듣기가 좋았어.' 라고 말했었는데요?"
"그 말 밖에 생각 안 나는 거야?"
"제가 무슨 다른 말도 했어요?"
"얘…니가 있지. 우리얼굴을 실눈을 뜨고 죽 둘러보더니 대뜸 했던 말이, "모두, 돌아가세요! 다들! 혼자 있어도 된다고요! 혼자 있고 싶어요! 돌아가세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 가시라고요!" 라고 아주 큰 목소리로 말했었다고."
"저, 정말이에요? 난 기억이 안 나는데요…"
저는 제가 정말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 기억이 나지도 않을 뿐 더러, 5시간을 기다려준 시댁 친척, 가족들에게 돌아가라고 큰 소리로 얘길 했다니 많이 민망해서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거기 옆 병실, 어디 제가 숨을 곳 없을까요...
한국에 살 때, 간혹 주변 지인들이 수면 내시경을 받은 후, "난, 시어머니 욕을 그렇게 중얼거렸대. 간호사가 말해주는데 아 창피해 정말." "난, 그렇게 회사 서류 내용을 외우고 그랬나 봐. 얼마나 일에 대한 스트레스가 많으면 그랬겠어? 아 놔, 이런 증상을 산재보험 신청할 순 없는 건가? " "난 의사에게 아프다며 막말을 퍼부었대. 밖에 있던 남편이 민망해서 아주 미칠 뻔 했대." 등등, 지인들이 이 가수면 상태에서 기억에도 없는 얼마나 이상한 말들을 했었는지 경험담을 들었으면서도, 설마 제가 그렇게 마취 중 진담을 말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모두 돌아가세요!" 라고 외쳤다는 것은 정말 저의 진심이었으니까요.
그렇게 편치 않은 시댁 어른들이 정말 여럿 밖에서 기다리는 것이 미안한 것도 있었고, 수술 후 퉁퉁 부은 흉한 꼴을 보여주는 게 불편한 마음도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곰곰이 그런 말을 무의식 중에 내뱉은 진짜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았더니, 그 안엔 이런 마음이 숨어 있었습니다.
'늘 많은 대가족이 몰려오는 잦은 파티 속에 북적거리며 살다 보니,
좀 조용하게 살고 싶다. 개인 사생활은 좀 보장받고 싶다.'
사실 제가 마취 중 내뱉은 말만으로는 이런 저의 속마음에 대해 가족들이 인지하진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뭔가 들켜버린 듯한 기분이 들어, 저는 제게 그 당시 상황을 알려준 고모님께 그저 살며시 웃어 보일 뿐이었는데요.
그냥 그런 말 해버리고 사생활을 보장 받자 라고 쉽게 생각할 수 만은 없는 것은, 어차피 시부모님과 앞뒤로 살고 있는 한, 이 그리스 가족문화에서 그런 말을 한다고 상황을 피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 멀리 시누이의 이동침대를 밀고 오는 의료진들이 보이기 시작하며, 마지막으로 고모님이 저에게 남긴 말이 묘한 여운을 남겼습니다.
"그렇게 모두 돌아가라고 넌 우리에게 말했지만, 우린 절대 가버리지 않았어. 네가 회복되길 지켜보았지.
그게 의리고, 그게 가족이지."
역시 그리스인다운 가족의 개념이다 싶어 웃음이 났지만, 마취 중 제 속내와 상관없이 늦도록 병실을 지켜준 고모님께 고맙다는 마음이 들었으니까요.
시누이 수술 후에도 오랫동안 함께 병실을 지키던 고모님은 잠시 휴식시간을 갖고 계십니다.
앞에 놓인 커피잔들을 보니 얼마나 여러 가족이 시누이를 응원하러 다녀갔는지 알만 하지요?
역시 그리스 가족애는 참 끈끈하고, 저는 비록 여전히 궁시렁거릴지언정
이제 그들을 몸이 아닌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따뜻한 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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