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덴마크에 계시는 독자님께 답글을 쓰며 딸아이의 오래 전 꿈이 생각났습니다.
딸아이가 한국에 있을 때 이야기입니다.
당시 아주 어렸기 때문에 사실 그런 어린 여자애들이 흔히 그렇듯 디즈니 이야기나 동화책에서 접하는 공주이야길 많이 들었던 딸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엄마, 옛날 얘기 속에 나오는 공주 왕자 말고, 지금은 공주 왕자가 정말 있어?"
이런 질문을 진지하게 해 오는 딸아이에게 저는 설명해주었습니다.
"음, 한국엔 현재 공주 왕자는 없어. 예전엔 있었는데, 일제 시대를 겪으면서 왕조가 사라졌단다."
딸아이는 제 대답에 눈이 동그랗게 되며 다시 물었습니다.
"엄마, 그럼 지금 전 세계에 어느 나라에 공주 왕자가 있는 거야? 있는 나라도 있겠지?"
저는 확실하게 아는 나라라고는 일본이나 영국 밖에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럼 인터넷으로 한번 찾아보자며 딸아이와 검색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뙇!
검색 중, 한국에 '근엄이'(아이가 생긴 게 근엄하다고)로 알려진 '덴마크 왕자'가 검색된 것입니다!
정말 근엄하게 생겼지요? 귀여워요^^
그런데 이 아이를 본 딸아이는 다짜고짜 이 아이가 몇 살이냐고 물었고, 찾아보니 이 아이는 '딸아이와 동갑내기'였는데요.
그날부터였습니다.
딸아이가 덴마크 왕자 근엄이와 결혼을 해, 공주가 되겠다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 말이지요.
저는 정말 어이가 없었지만, 원래도 많이 엉뚱한 아이이기 때문에 이 아이의 공주가 되겠다는 순수한 열망을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민 직전 그리스어를 잘 모르니 영어라도 좀 배우라고 영어유치원을 보냈는데, 그 6개월 동안 유치원에서 가장 꽃미남 존 오빠를 좋아했지만, 그 때에도 근엄이와 결혼하겠다는 마음을 바꾸진 않았는데요.
한국에서의 마지막 때를 보내던 때의, 공주가 되어 예쁜 드레스를 많이 입고 싶었던 딸아이
그러다 그리스에 이민을 오게 되었고, 딸아이는 그리스 할아버지로부터 청천병력 같은 말을 듣게 되는데요.
"공주? 그게 얼마나 피곤한 줄 알아? 넌 왜 그런 꿈을 꾸니? 여긴 유럽이라고. 우린 공주 왕자를 참 많이 보아왔지. 그들은 자기 생활도 없고, 겉만 번지르르 하고 전혀 편안하지 못한 삶을 산다고. 넌 왜 스스로 자유를 버리려고 하니? 덴마크가 같은 유럽이라고 공주 되고 싶다는 생각은 아예 버리렴. 넌 갖고 있는 재주도 많은 애가 왜 공주 같은 불편한 직업을 가지려는 거니? 난 네가 그렇게 고생하는 거 싫다."
그렇게 딸아이는 거대한 실망을 하며 근엄 왕자를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흘러… 초등학교 3학년이 된 딸아이가 며칠 전 "나는 스무 살에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라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나중에 대학은 한국으로 가도 되고, 유럽 다른 어디로 가도 되고 미국으로 가도 되고 다 좋아. 어디로 가든 네 자유이니 기도하면서 네 진로에 대해 신중하게 결정하도록 하자. 아직 먼 일이지만 지금부터 네 자신이 즐겁게 하면서 직업으로 가질 수 있는 일에 대해 너 자신을 관찰해 보면 좋을 것 같아.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네 마음의 변화를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있을 거야. 그런데… 덴마크 왕자는 이제 잊은 거야? 근엄이 아빠도 비교적 평범한 여성이랑 결혼했던데…?"
저는 일부러 딸아이를 떠보는 질문을 했는데요.
딸아이는 이렇게 대답하는군요.
"흥! 공주는 무슨. 됐다고. 엄마. 난 사실 그리스를 멀리 떠나 다른 곳으로 대학을 가는 것도 싫어. 그럼 엄마랑 헤어져야 하잖아. 헤어지는 거 싫단 말이야. 우리 영원히 이웃에서 함께 살면 안 될까? 내가 결혼한 후에도?"
"아이고. 얘야. 나중에 다른 곳에서 공부한다고 떠나서, 바쁘다며 연락도 잘 안 하고 그러지나 말거라. 지금이야 엄마 껌딱지처럼 붙어 있는 게 좋겠지만 언제까지 그럴 지 우린 모르는 거란다."
"그래도 그리스 가족들은 다들 많이 모여 살잖아. 나도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누가 안 된대… 엄마 말은 열린 눈으로 세상을 보라고. 네가 한국에 있을 때 한국이 네 세계의 전부라고 여겼는데 여기 와서 이곳이 한국과 많이 달라 고생했던 것처럼, 이제 여기에 익숙해졌다고 이 곳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란 걸 잊으면 안 된다고. 무슨 말인지 알지?"
"응…. 암튼 공주는 싫어. 난 피곤한 건 싫어. 그리고 덴마크 왕자보다 우리반에 더 잘생긴 애들이 많다고. 게다가 난 지금 여자 친구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머리가 아파. 남자애들에게 관심이 없다고."
그리스에 살며 TV에서 자주 보여주는 영국 왕세자비와 그 일가에 대한 영상들을 보다 보니, 아주 현실적이 되어버린 딸아이입니다.
그래도…근엄이와 결혼해 예쁜 드레스 많이 입는 공주가 되겠다고 순진한 눈망울을 굴리던 그 순진한 딸아이가 조금은 그립네요!
옷 예쁘게 입고 맛있는 것만 먹으면 다 좋았던, 그런게 공주의 삶이라고 생각했던 그 시절의 딸아이입니다.^^
그나저나, 올해 덴마크 나이로 여덟 살인 근엄이의 사진을 보니, 많이 컸네요.^^
역시 우리 애가 자라듯 다른 애들도 자라는군요. 근엄이도 이제 아기 때 모습이 없어, 전세계 이모들이 많이 아쉬워하겠네요.^^
로도스 스타벅스에 이제 크리스마스 시즌 커피가 나왔어요.
여러분, 바빠도 차 한잔 따뜻하게 드시는 즐거운 월요일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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