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 들어 감기가 두 번째입니다. 며칠 째 갖은 처치를 해 보아도 오늘 아침 또 38도로 열이 올랐습니다. 평소 자주 아프진 않는 편인데, 이번 달은 제 에너지를 소진하고도 남을 만큼 좀 버거운 시간들을 보낸 여파가 크구나 싶습니다.
늘 그렇듯 그리스의 연말 연시는 가족들의 모임이 끊이질 않는 때였고, 시부모님을 중심으로 치러지는 그 모임들은 집안 대청소부터 마지막 수십 개의 설거지까지 몸 쉴 틈 없이 이어졌습니다.
새해 연초만 지나면 괜찮겠구나 버티던 찰나, 외시할머님, 그러니까 남편의 외할머님이 심장에 문제가 있어 급히 입원을 하시게 되었고 1주일만에 겨우 안정되어 퇴원을 하셨지만 이전처럼 혼자 지내시는 것은 불안하여서 당분간 저희 집에 지내시게 되었습니다.
바로 뒷집인 딸인 시어머님 댁이 아닌, 저희 집에 머물게 되신 것은...아래층 부엌 벽난로 옆 소파가 소파베드로 펼쳐지는 것이라 좁은 시어머님 댁보다는 거기가 따뜻하고 머무시기에 좋다는 시부모님의 의견대로였지요.
물론 매일 출근을 하는 제가 할머님을 전적으로 돌봐드려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할머님을 돌보기 위해 늘 저희 집에 계시게 된 시어머님과 수시로 할머님을 뵈러 드나드는 친척들 덕에 아무래도 아래층 부엌이나 거실을 이용할 때마다 썩 편한 것은 아닌데다, 지난 주말처럼 시부모님께서 급한 일로 외출을 하셔야 할 경우 자연스럽게 제가 할머님께 요리를 해드리거나 돌봐드려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 것입니다.
이렇듯 주말에도 쉬지 못 했던 저는 이번 주 급기야 또 다시 앓아 눕게 되었습니다.
수요일엔 출근을 하지 못할 만큼 열이 나서 약을 먹고 방에 누워있었는데, 필요한 것 있으면 해주겠다며 눈치 없으신 시어머님은 2층까지 올라와 자꾸만 제 방을 들락거리셨습니다. 그냥 저를 내버려두는 게 도와주시는 건데...
다음날 겨우 출근을 해 힘겹게 하루 일과를 마쳤는데, 그게 무리였던지 오늘 새벽부터 또 열이 펄펄 끓었습니다. 그래도 약을 먹고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이 상태로는 출근을 못 하겠는데 그렇다고 시어머님이 계시는 집에도 편히 못 누워 있겠고,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다 몇 달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랜만에 혼자 커피를 마시러 와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참 좋습니다... 연신 기침이 나와 주변 손님들에게 좀 미안하지만 그래도 참 좋습니다.
맛있는 커피가 있고, 조용하고, 전쟁터 같은 생활에서 전우들(가족들, 직장 사람들)이 아닌 낯선 사람들 속에 잠시 오롯이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휴식이 되는구나 싶습니다... 그 동안 저는 얼마나 정신없이 일을 해왔던 걸까요.
매일 기진맥진한 저 자신을 위해, 조금은 자주 이런 시간을 가져야겠습니다.
그런데, 한 그리스인 친구가 제게 그러더군요.
"아무리 그리스가 가족 중심이라지만 난 너처럼 시댁식구들과 붙어서는 못 살아. 진심 너를 영웅으로 추대해 동상이라도 세워주고 싶어. 정말이라니까. 내 입장에서 너는 히어로 영화에 출연해도 될 만큼 놀라운 일을 하고 있는 거야. (아무래도 그리스는 나이든 친정 어머니나 할머님을 딸과 사위가 모시는 문화이기에 저에 대해 이런 말을 하는 듯 합니다. 그래서 제 상황은 우리나라 문화대로라면 사위가 장모님과 편찮으신 처가 할머님까지 모시고 지내는 것과 비슷해 보이는 듯 했습니다.)
솔직히 일하고 집에 들어오면 쉬어야 하는데, 그렇게 시댁식구들이 들락거리면 집도 쉴 곳이 못 되는 거잖아. 게다가 시할머님까지 당분간 모시고 있어야 한다고?? 아무리 당분간이라지만 왜 시할머님을 거절하지 못 한 건데?? 못 하겠다고 말 하면 아무리 좁더라도 네 시어머님이 당신 집에 엄마를 모시지 않았겠어??"
그에 대한 제 대답은 이랬습니다.
"물론 거절할 수 있었어. 시부모님께 좀 욕 먹더라도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딱 잘라서 말 하면 거절할 수도 있었지. 그리고 누워계시는 시할머님이 내게 버거운 것도 사실이야. 그런데 말이지...
내가 그리스에 오기 직전에 한국에 살 때, 우리 친할머니가 87세셨는데 정말 건강하시던 양반이 한 달 앓더니 갑자기 세상을 뜨시더라고. 앓고 계시는 동안에 멀다는 이유로 찾아가 뵙고 싶다는 마음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장례식장에서 영정으로 할머님을 뵈어야 했었어. 그 때 정말 많이 후회했었거든. 이렇게 돌아가버리시고 나면, 그 땐 아무리 무언가를 해드리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거로구나... 사실 만나더라도 특별한 것을 해드리고 싶었던 건 아냐. 그저, 성인이 된 뒤 사느라 못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할머니와 함께 나누고 싶었는데 그 기회는 영영 사라져버렸어.
참.너도 알겠구나. 너네 외할머님도 작년에 돌아가셨잖아. 연세가 89세 정도셨다고 했던 것 같은데 맞지?"
"응...정말 슬펐어. 난 엄마가 할머님을 늘 돌봐드려서 곁에서 자주 뵈었는데도 막상 돌아가시니까 힘들더라고."
"그러게...그래서. 난 시할머님을 뵈면, 자꾸 우리 할머니 생각이나. 외모는 다르지만, 당연히 그렇지..한국인이 아니시니, 하하... 근데 이상하게 우리 친할머니와 성격이 그렇게 비슷하신 거야. 남 눈치 안 보시고 할말 다하시고. 단순하고 쿨한 모습까지. 물론 내 핏줄의 내 할머님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쩐지 지금 잘 해드리지 않으면 언제 돌아가실지 몰라도 그 때가서 후회하지 싶어. 그래서 시어머님이랑 늘 마주쳐야 하는 불편함이나 내 몸의 고단함은 좀 접어 두기로 한 거야. 날씨가 좀 좋아지면 평소 친하게 지내시는 남동생 내외분 댁으로 아예 이사를 들어가신다고 했으니 그 때까지만 좀 참으며 지내보려고.
할머님이 앉아서 식사를 하실 때 머리를 빗겨드리기도 하는데, 짧은 흰 머리카락에 마리아나의 핑크 리본 핀을 꼽아 드렸더니 싫다 하시면서도 은근히 좋아하시는 거 있지? 하하. 귀여우셔."
이렇게 간만에 전쟁터를 떠나 조용히 글을 쓰다 보니, 제가 또 한번 큰 착각에 빠졌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불과 몇 달 전 제가 크게 깨닫고 결심했던 한 가지가 있었는데 말입니다.
<<나는 정기적으로 쉼이 필요하다. 그리고 때론 위로나 따뜻한 말, 큰 허그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불쌍한 것은 아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들은 모두 내가 선택한 것들이고 그 선택에 의해 매일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인데,
그런 나에 대해 마치 어쩔 수 없어서 무력하게 어려운 상황에 처한 것처럼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는 오류를 범하지 말자. 그건 큰 착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 몇 달 안팎으로 일이 많았고, 주변에서 내게 요구하는 것들이 많았다 보니 몸이 힘들어졌으며, 그 힘든 것들은 감당하지 못 해 이렇게 아프고 보니 스스로가 불쌍하게 여겨졌던 터라 심리적으로 더 가라앉았었구나 싶습니다.
이렇게 쉬면 될 걸. 나를 위해 뭔가 작은 보상들을 해 주면 될 걸. 커피 한 잔에 한 두 시간 조용한 곳에서 글을 쓰다보면 그럼 이렇게 금새 충전되는데...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지난 번 이 사실을 깨닫고 나를 불쌍하게 여기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게 보상을 해주겠다며 떠났던 '반나절 여행' 때 찍은 사진들입니다.
로도스 시에서 80km쯤 떨어진 외곽의 풍경인데, 매일 비가 와 춥고 음산한 도시보다 역시 로도스의 겨울 자연은 푸르고 참 예쁘고 좋았어요.
오랜만에 일하던 도시를 벗어나 그저 혼자 몇 시간 좋은 곳을 드라이브 하고 커피 한잔 사서 마시고 돌아온 게 다인데도 이 반나절 혼자 여행이 얼마나 큰 충전을 주었었는지요.
다행히 최근 저희 사무실에 새 인력이 충원되어서, 이제 조금은 더 자주 제게 보상해주는 시간을 가져야겠구나 결심해봅니다.
마지막으로 마리아나 이야길 잠깐 하자면요.
녀석은 요즘 제가 뭐든지 스스로 하는 법을 자꾸 가르쳐서인지, "살면서 혼자 해야 할 일이 왜 이렇게 많을까!" 라며 예민할 때로 예민해졌습니다.
며칠 전 넌 왜 이렇게 요즘들어 짜증을 내냐 고 물으니,
"내 머리속이 뒤.박.죽.박.이라고!" 라며 보도 듣도 못한 한국어 실력을 자랑하였습니다.
저는 어이가 없어서 "뒤박죽박이 아니라 뒤죽박죽이라고 하는 거거든!" 가르쳐주었는데, 또 금새
"아! 그렇구나! 내가 착각했나봐용!! 헤헤헷~~" 웃는, 아직은 철없이 덩치만 커다래진 마리아나입니다. ^^;;
여러분 행복한 2월 되세요!
다음엔 마리아나 이야기로 또 찾아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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