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여자보다 팬티스타킹을 더 많이 신는
신기한 그리스 할머니들
이민 초기였던 어느 날, 저는 시어머님과 대형 마트에 갔습니다.
시어머님께서는 팔십 대이신 당신의 친정 어머님, 그러니까 제게는 시외할머님께 드릴 선물을 골라야겠다고 하셨습니다.
할머님은 여느 희생적인 그리스인 어머니들처럼, 있는 것 자식들에게 다 내주시고 할아버님이 돌아가신 후로는 혼자 작은 집을 얻어 연금으로 생활하고 계시는데요. 그래서 시어머님은 자주 생필품을 사다 주시기도 하고, 저 역시 마트에서 그리스 커피나 요거트 같은 게 대폭 세일을 할 때는 이 시외할머님 드릴 것을 하나 더 사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시어머님께서 자꾸 스타킹 코너를 기웃거리시며 길이, 색깔, 가격 대 별로 나누어 져 있는 나일론스타킹들을 만지작거리시는 거였습니다.
한 스타킹 광고 -google image
"어머님이 필요하셔서 보시는 거세요?" 라고 묻는 제게, 시어머님은 정말 뜻 밖의 대답을 해 오셨습니다.
"아니, 우리 엄마 드릴 거 보는 거야."
잉? 여든 살이 넘으신 할머니께서 양말스타킹도 아니고, 무릎까지 오는 판타롱스타킹이나 커피 색 팬티스타킹을 신을 일이 얼마나 있으시다고 이걸 보고 계시는 거지??
묻고 싶었지만, 시어머님께서 정말 집중해서 꼼꼼하게 재질과 가격을 비교하고 계시는 중차대한 작업 중이셨기 때문에 묻지 못하고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도 시어머님은 자주 커피 색 팬티스타킹, 살색 팬티스타킹을 몇 개씩 할머님을 위해 사셨고,
생일이나 특별한 날에는 심지어 고탄력 팬티스타킹을 골라 할머님께 선물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시어머님 모습에 깜짝 놀라서, 이 원인에 대해 정말 알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시어머님께 물어볼 수도 있지만, 시어머님은 어릴 때 결혼 하셔서 가까운 터키 외에는 해외에 가볼 기회가 없으셨고 그래서인지 그리스가 세계의 중심이라 여기고 계시기에, 어머님께 뭔가 신기한 이런 그리스 문화에 대해 물을 때마다, 제가 뻔히 다 아는 얘길 물어보는 것처럼 그다지 속 시원한 설명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매니저 씨가 놀리려고 시어머님께 다른 나라에 대해서 엉뚱하게 제멋대로 말해도 그대로 믿으셔서 온 가족을 폭소하게 하실 때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지난 번 중국에서 이상한 지구종말론이 나왔을 때, 매니저 씨가 일부러 놀리느라 이에 대해 상당히 신빙성 있게 설명했고 어머님은 거의 하루를 심각해 하시며 뭘 해야하나 어쩌지? 이러시며 왔다갔다 하셨습니다. 에구 어머님--;)
어떻든 그날부터 저는 주변 할머니들을 탐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동네 할머님들과 오다가다 마주치면, "할머님 스타킹 선물 좋아하세요?" 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열이면 열! 모두 "아이구 그럼 최고지!" 라고 대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대개 칠십 대 이후로는 몸매에 잘 신경을 안 쓰는 그리스 할머님들인지라 대부분 몸이 동글동글 하시고,
옛 세대답게 키가 작으십니다.
그런 그 분들이 팬티 스타킹으로 도대체 뭘 하는 건지, 신는다면 왜 신는 건지. 몸매 보정 목적도 아니고, 동네에 돌아다니실
때는 다들 편안한 잠옷 차림으로도 잘 돌아다니시는데. 도대체 왜!!??
'한국 할머님들처럼 비누 녹지 말라고 스타킹에 넣어 쓰시나? 아니지, 그렇다면 굳이 왜 새 스타킹을 사겠어.
그리고 비누 이용에 고탄력 스타킹이 필요할 일이 없잖아. 혹시 고탄력 스타킹에 비누를 넣으면 비누가 덜 녹는
내가 모르는 무슨 화학적인 비밀이 있는 건가?'
별의 별 생각이 다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름이 지나 좀 쌀쌀해지기 시작한 어느 날, 저의 이 궁금증을 말끔히 해소 해주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날은 시어머님께서 할머님 동네에 큰 바자회가 있어 가신다고 해서 저도 수블라끼 먹으러 따라갔었는데,
바자회 전에, 정교회 안에 잠깐 들어가신 어머님을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님이 나오실 즈음, 정교회 안에서 다른 연로한 할머님들이 단체로 수십 명이 우르르 몰려 나오시는데,
헉! 할머님들. 교복 입으신 거에요? 아니면 유니폼?!
그리스에서는 이렇게 똑같은 복장을 하고 계시는 할머님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답니다.
이 할머님은 좀 긴 치마를 입으셨지만 스타킹 신고 계시는 것 보이시지요?
마치 교복이라도 맞춰 입으신 듯, 전국의 연로한 그리스 할머니들은 이렇게 입고 다니십니다.
그날 그 곳의 모든 할머니들이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검은 치마에 검은 티셔츠나 검은 카디건을 입고 계셨고,
시선이 할머님들의 다리에 머물게 된 저는 또 한번 깜짝 놀랐는데 모든 할머님들이 스타킹을 신고 계셨던 것이지요.
이게 무슨 일인가? 단체로 옷을 맞추셨나? 바자회에서 수블라끼 꼬치를 뜯으면서도 그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는데, 번뜩 떠오르는 다른 그림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한국에 살 때 그리스어를 공부하려고 그리스어 구 교과서와 현대 교과서를 구해서 공부할 때 보았던 교과서 속의 그리스인 할머니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할머님의 모습은 그날 제가 본, 바로 그 할머님과 똑같은 복장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저녁에 집에 돌아오자마자 매니저 씨에게 득달같이 이 사실에 대해 말을 했고
매니저 씨는 깔깔거리며 제게 할머니들의 유니폼 같은 옷차림에 대해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옷차림은 그리스 정교회에서 교회에 오는 여성들에게 전통적으로 권장하는 옷차림이야."
뭐?
"그런데 젊은 여자들은 정교회에 잘 가지도 않지만, 가더라도 그렇게 옷을 입고 가진 않잖아."
"그건 젊을 때는 전통을 따를 생각이 없는 것이지. 그러다 나이가 들어 대개 미망인이 될 정도가 되면,
그제야 미망인임을 알리기라도 하듯이 그렇게들 입고 다니셔.
그러다 보니 미망인이 아닌 할머니들도 그렇게 입는 경우가 많기도 해.
이제는 종교적인 의미를 떠나 그냥 그리스의 할머니들 패션이라고 다들 생각하지."
그렇구나...
아..그제야 저는 치마보다는 스키니진 등의 섹시한 청바지를 입는 것을 좋아하는 그리스의 젊은 여성들보다
훨씬 더 많은 스타킹을 사서 소비하시는 할머님들에 대해 이해가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는 98%의 국민들이 정교회인이고 국교로 정해 거의 전 국민이 정교회 교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국교와 문화가 결합되어, 정교회의 힘은 정부의 힘 이상으로 막강합니다. 이런 할머님들의 복장에 관한 부분 역시
처음엔 강제성이 있게 시행되었다가 세기를 거쳐 자리잡은 하나의 복식 문화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어떻든 그날 이후로 시외할머님께 생필품이 아닌 특별한 선물을 해야 할 때, 저는 꼭 팬티스타킹을, 그것도 고탄력으로
몇 개 구입해 핑크색 천 주머니 같은데 넣어 할머님께 선물로 드린답니다.
제가 한국에서 일할 때 치마 정장을 자주 입었을 때, 손상되기 쉬운 소모품인 스타킹을 자주 새로 사야했던 기억이 있어서
이기도 하고, 돌아 보니 매일 검은색 남색 옷만 입으시던 할머님께서 보통 그리스 할머님들에 대한 사회적 관념 때문에
오랫동안 핑크색 옷은 입지 못하셨을테니, 핑크색 천 주머니에 작은 물건이라도 담아서 검은 가방에 넣어 다니시
면,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을까 싶은 저만의 생각 때문이랍니다.
매번 마다 않고 주머니까지 좋아라 받으시는 것을 보면, 어쩌면 늙으신 할머님이시지만 마음만은 홀쭉한 이십 대처럼
핑크 주머니가 마음에 드시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스타킹 많이 사 드릴테니, 할머님께서 아프지 마시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셨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그리스 할머님 사진들로 이 글을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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