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잠깐만 오늘 더워서 땀을 많이 흘렀더니, 잠깐 가서 블라우스 좀 갈아 입고 올게."
동수 씨와 친구로 지낼 때였는데, 뭘 물어보려고 통화를 하던 중 동수 씨가 영어로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저는 생각했습니다.
'블라우스?! 티셔츠가 아니고??
웬 블라우스?!
프릴 달린 이런 것????'
저는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혹시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서 그냥 넘어갔습니다. 게다가 영상통화를 했던 것도 아니어서 정말 블라우스로 갈아입었는지 확인할 방법도 없었는데요.
그리고 며칠 뒤였습니다.
동수 씨가 지난 번 제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 것에 대해 답변을 해 주려고 전화를 해왔는데요.
알려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토요일인데 뭘 하며 보낼 거냐고 묻길래, 난 오늘도 일 해야 한다고 말을 했더니 동수 씨는 정말 오랜만에 쇼핑을 좀 할 거야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뭘 살 게 있나 보네?" 라고 물어보았는데, 글쎄 동수 씨는 이렇게 대답하는 게 아니겠어요?
"응. 새 블라우스 좀 사려고."
또, 또 블라우스를!!!
전화를 끊고 한 참~~~을 고민했습니다.
혹시 현대 그리스인들 중에도 중세시대 삼총사 복장 같은 블라우스를 입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 걸까? 아니면...동수 씨가 평소 달타냥 같은 코스프레를 좋아하는 건가?
라고 말이지요.
삼총사 Three Musketeers (www.kenludwig.com)
하지만 차마 이렇게 직접 물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엔 그렇게 개인적인 옷 취향을 물어볼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었으니까요.
그렇게 제 의구심은 그냥 묻어 두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동수 씨가 한국에서 살게 되었을 때,
저는 동수 씨가 영어로 "마이 블라우스 my blouse!" 라고 말하며 옷을 짐 속에서 찾아 내는 것을
드.디.어. 눈으로 목격하게 되었는데요.
잉? 그런데 그것은 그냥 보통 티셔츠였습니다!
아니, 왜 티셔츠를 블라우스라고 부를까? 이상하네...싶었고, 도저히 궁금한 것을 참을 수 없어 동수 씨에게 물어보게 되었는데요.
동수 씨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하하하하하…내가 실수 한 거야. 실수!
티셔트(티셔츠)를 그리스어로 블루자μπλούζα 라고 부르거든.
이 단어는 프랑스어에서 온 단어인데, 영어의 블라우스blouse와 발음이 비슷하지.
하지만 현대 그리스어의 블루자μπλούζα는 그냥 영어의 티셔트T shirt라는 의미야.
블루자가 티셔트인줄 알면서도 블루자μπλούζα와 블라우스blouse가 발음이 비슷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렇게 블라우스라고 영어로 말을 할 때가 있더라고. 미안. 미안."
아하…그러니까 동수 씨가 진짜 블라우스를 입었던 게 아니라, 그리스어 블루자μπλούζα 가 영어 블라우스blouse와 발음이 비슷해서 동수 씨가 잘못 사용하는 바람에 생긴 오해였던 거였습니다.
저는 얼른 인터넷을 검색해보았는데, 정말 그리스어로 블루자μπλούζα 를 검색하자 이런 결과가 나왔습니다.
영어로 블라우스blouse를 검색하면 이런 결과가 나왔습니다.
두산백과 블라우스[ blouse ]
블라우스의 어원은 ‘늘어진 느낌의 불룩한 모양’ 또는 ‘헐렁한 모양을 만든다’라는 뜻이고 프랑스어로는 블루즈(blouse) 또는 슈미지에(chemisier)라고 하여 어깨에서 허리선 또는 엉덩이선까지의 여성 ·아동용 동의류(胴衣類)의 총칭이다. 따라서 천으로 만든 블라우스 외에 스웨터와 작업용 스목도 포함이 된다. 블라우스는 원래 여성용 원피스의 동의(胴衣)에서 변화한 것과 남자용 와이셔츠에서 변화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앞의 것에는 블라우스의 단을 스커트 안으로 넣어 입는 터킹 블라우스 또는 언더 블라우스와 스커트 위로 내놓고 착용하는 오버 블라우스가 있다. 뒤의 것은 남자용 셔츠 웨이스트 블라우스에서 발전하여 온 셔츠 블라우스이며, 슈트 아래에 착용해야 하는 것으로서 정식 옷차림으로는 이 블라우스 위에 상의를 걸쳐야 한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테일러 슈트가 여성복에 도입되면서 스포티한 옷차림의 경우는 상의 대용으로 셔츠만을 입을 수 있게 되었다. (중략) 출처블라우스 [blouse] (두산백과) |
그리고, 그리스어로 남자 와이셔츠는 부까미소πουκάμισο 라고 하고, 위에 소개한 블라우스는 기네까 브라디나 블루자 Γυναίκα βραδυνά μπλούζα(여성 드레스 셔츠) 라고 부른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동수 씨는 내일 세미나 때문에 아테네 1박2일 출장을 앞두고 있어서, 오늘 하루 종일 정신 없이 바빴는데요.
동수 씨가 얼마나 정신이 없었던지, 요리를 하려고 집에 잠시 들어온 저에게 전화를 해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올리브나무! 올리브나무! 올 때 유니폼 블라우스 하나 챙겨서 나와 줘.
오늘 날씨가 너무 더워서 아침에 입고 나왔던 게 땀에 젖었어. 갈아입어야 할 것 같아!"
다른 말은 다 그리스어로 해 놓고, 얼마나 정신이 없었으면 블루자μπλούζα 라는 그리스어 대신 블라우스blouse 라고 영어로, 그것도 뜻도 안 맞는 영어로 말을 또 했을까 싶었는데요.
그냥 "알았어." 라고 대답은 했지만, 끊고 나서 티셔츠를 챙기면서 예전에 처음으로 이 단어를 듣고 그날 저녁 희고 프릴이 가슴팍에 잔뜩 달린 블라우스를 입은 동수 씨를 상상하면서 심각하게 그의 옷 취향에 대해 고민했던 날이 생각이 나서 혼자 큭큭거리고 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엄마? 왜 웃어요?" 라고 묻는 딸아이에게도 이 이야길 해주니,
영어 학원에서 블루자μπλούζα (그리스어)=티셔트T shirt(영어) 라고 이미 배운 마리아나는
배를 붙잡고 의자에 뒹굴면서 이렇게 말 했습니다.
"엄마! 엄마! 아빠가 말 실수한 건 웃기지 않는데, 사람은 누구나 실수 하잖아요.
근데 아빠가 블라우스 입은 모습을 상상하니까 너무 웃겨서 참을 수가 없어요! 아하하하!"
"그치? 상상만 해도 너무 웃기지? 하하하하.."
덕분에 저희 모녀는 동수 씨가 늠름한 모습으로 프릴 달린 블라우스 입은 모습을 상상하며, 오늘 아주 대차게 웃었습니다.^^
여러분, 신나는 주말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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