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어’에도 ‘피 줄이 당긴다’는 표현이 있다니!
어제 포스팅 끝에서 잠깐 언급한 힘 세고 배가 푸근한 제 그리스인 남편에겐 네 명의 고모님이 계십니다.
그 중 둘 째 고모님은 어린 나이에 오스트리아 남자인 고모부님과 크루즈에서 만나 고모부님의 간절한 구애 끝에 결혼에 골인, 삼십 년이 넘게 오스트리아 비엔나 근교에 살고 계십니다.
이 고모님에겐 딸 하나 아들 하나가 있고, 이 두 남매는 어릴 때부터 몇 년에 한번씩 엄마의 친정인 그리스로 여름 휴가를 왔었던 것입니다.
고모님의 딸 Martha마사는 어릴 땐 부모님과, 커서는 혼자 혹은 친구와 자주 그리스를 찾았습니다. 그리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겨울이 길고 경직된 분위기의 오스트리아 보다는 자유로워 보이는 엄마의 나라 그리스는 그녀에게 늘 쉼이 되어주었습니다.
<2011년 겨울 비엔나 시청 앞(왼쪽사진이 시청),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오스트리아 가족들과 제 가족입니다.>
제가 마사를 처음 만난 것은 제 작년 여름입니다.
여름 휴가를 혼자 온 그녀는 우리 집에 머물면서, 홀로 오후에 오토바이를 빌려 타고 해변에 지중해의 햇볕을 만끽하고 수영을 하고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런 그녀는 늘, 그리스에 살고 싶다고 넋두리를 했었고, 당시 어색하기만 한 우리는 영어와 그리스어 독일어를 섞어가면서 그런 저런 어색한 대화를 이어나갔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가족 모두는 한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게 되는데, 이 대단한 The Big Fat Greek wedding(그리스 결혼식이 지나치게 화려하고 길고 돈을 많이 써야 한다는 데에서 온 명칭인데, 이 제목의 영화도 있습니다. 이에 대한 포스팅은 다음 기회에)에서 마사는 제 남편, 그러니까 사촌 오빠의 절친과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줄기차게 두 세 달에 한 번 그리스를 들락거리며 장거리연애를 해 왔고, 올 4월이면 드디어 이 곳으로 이사와 남자친구랑 같이 살게 됩니다.
그런 그녀가 남자친구인 Στέργος 스떼르고스를 생각하는 마음은 대단해서, 나도 장거리 연애를 하면서 저랬을까 싶을 정도로 기가 찰 때가 많습니다.
- 오, 올리브! 나는 정말 스떼르고스를 너무 사랑해. 너는 내 맘을 이해하지.
- 그래. 그래. 그래.
(제 이름은 따로 있지만, 꿋꿋한올리브나무에서 따온 올리브로 저를 지칭하겠습니다.^^)
저는 한편으론 그녀의 유난스러움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한편으론 짐작할 수 있는 부분도 있어Κατάλαβα. (이해해.)라는 말 밖에는 달리 할말이 없습니다.
지난 크리스마스 전에, 딸아이와 혼자 사시는 시 할머님을 찾아 뵈었는데, 그리스 식 전통커피Eλληνικό καφέ와 잘 구워진 크리스마스 쿠키 멜로마까로나Μελομακάρονα를 내 주셨습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곧 휴가를 내어 다니러 오게 될 마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시 할머님께는 오스트리아 고모가 딸이고, 마사는 손녀딸인 셈이지요.
- Η Μάρθα τον αγαπάει Στέργος πάρα πολύ; 마사가 스떼르고스를 많이 사랑한대지? - Ναι. 네. - Το αίμα κρατάει αυτή. 그 아이가 피 줄이 당기기 때문이야.
*Kρατάει는 Κρατάω(Κρατώ)[끄라따오/끄라또]의 3인칭 동사 현재형으로, 유지하다, 갖고 있다, 잡다 등의 의미로 사용되는 동사입니다. 영어의 Keep, hold 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네가 갖고 있어. (Keep it.)»란 뜻의 «Kρατά το.» 는 그리스어 일반 회화에서 자주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Kρατά는 Κρατάω의 명령형 입니다.
*Το αίμα는 피 라는 뜻이고 αυτή 그녀가 라는 주어인데, 그리스어 일반 회화에서는 원칙적으로 앞에 와야 하는 주어가 문장의 뒤에 오기도 합니다. 한국어에서 «그거 할게 내가.» 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직역하면 ‘그녀가 (그리스인)피를 갖고 있다’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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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피 피 피 피요?
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래. 피 줄이 당기는 거라고. 그리스인 피가 몸에 반은 흐르고 있으니 그리스가 좋을 수 밖에 없고, 그리스 남자에게 끌릴 수 밖에 없는 거지. 그리스에선 그걸 피가 당긴다(τραβάει )고 말한단다.
*할머니는 다시 Τραβάει 라는 단어를 써서 앞에 사용한 Kρατάει가 당긴다는 의미로 사용했음을 설명했습니다.
*Τραβάει는 Τραβάω(Τραβώ)[뜨라바v오/뜨라보v]의 3인칭 동사 현재형으로 당기다, 끌다 등의 의미로 사용되는 동사입니다. 영어의 pull, drag, draw에 해당되는 단어입니다. 예를 들면 ‘그가 고양이의 꼬리를 잡아당긴다.’ 라는 표현은 Αυτός τραβάει την ουρά της γάτας. 라고 사용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나이가 많은 할머니께서 이 문장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이 문장이 보편적으로 젊은 사람들까지 두루두루 사용하는 문장은 아니라고 봅니다. Κρατάει란 동사를 Τραβάει의 의미로 사용한 것도 보편적인 표현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부모 자식 간에 사용되는 표현인 ‘피 줄이 당긴다’는 표현을 젊은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경우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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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든, 저는 그리스가 한국만큼이나 가족문화가 강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표현까지도 사용할 줄은 미처 몰랐었기에 할머님 말씀에 상당히 놀랐습니다. 한국에도 그 비슷한 표현이 있다는 말을 해 드리고 싶었으나, 곧 이어진 할머니의 신세한탄과 폭풍눈물 덕에 그 말 까진 하진 못했습니다.
피 줄이 당겨서인지, 사랑에 눈이 멀어서인지 평생 살아온 오스트리아를 두고 그리스로 이사 올 마사.
그녀가 부디 스떼르고스랑 무사히 결혼에 골인해서 그리스의 숨겨져 있는 ‘어마어마한 가족 문화’를(저는 이 때문에 많이 놀래왔고, 많이 기 막혀 해왔기 때문입니다.) 잘 헤쳐나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그리스어 표현 재미 있으셨나요?
피 줄과 상관 없더라도, 마사처럼 사랑에 눈이 멀어 온 세상이 그 사람 밖에 없는 것처럼
여겨졌던 적이 있으신가요?
여러분의 댓 글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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