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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속의 한국

몇 년 만에 한국에서 심야영화 보려다 낭패를 겪었어요!

by 꿋꿋한올리브나무 2013. 8. 23.

 

지난 칠월 한국에 들어갔을 때 일입니다.

이민 후 첫 한국행이었고 가족은 물론, 한국사람들 속에 섞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설렜던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도착 후 며칠이 지난 날 밤, 하루 내내 돌아다녔음에도 불구하고 한국보다 여섯 시간이 늦은 그리스와의 시차 때문에 잠이 통 오질 않았습니다.

부모님과 딸아이는 모두 잠이 든 열한 시 삼십 분쯤이었습니다.

저는 인터넷을 잠시 뒤져 정보를 찾은 후, 결심했습니다.

 

"그래! 심야영화를 보는 거야! 그리스에서는 더 이상 영화관 가고 싶지 않다고!

한국에 있는 동안 언제 또 기회가 올지 몰라!"

 소풍

 

 

자고 있는 식구들이 깰까 봐 아주 조심스럽게 집을 빠져 나온 저는, 비가 추적추적 오는 강변북로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특별히 음향시설을 좋아했던 영화관이 있는 삼성동으로 향했지요.

 

"아! 이 얼마 만에 한국 밤 거리를 운전해 달려본단 말인가!!"

하트3

 

 

한국어만 말하는 심야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비오는 한국 거리를 달리는 기분은 정말 좋았습니다.

잠시 후, 삼성동에 도착한 저는 부랴부랴 영화관이 있는 쇼핑몰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았고, 주차장 차단기 앞에서 주차권을 뽑으려고 잠시 차를 멈췄는데, 어랏? 주차권 나오는 기계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입구에 앉아 있던 주차정산요원은 "자동으로 차 번호를 인식하니 나올 때 정산하시면 됩니다.~" 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아! 몇 년 만에 한국에 오니 주차권이 없어진 주차장이 있구나!'

 

하긴 제가 사는 그리스 로도스의 디아고라스 공항 주차장의 경우도 이 년 전쯤부터 주차권 없이 차 번호를 자동인식 하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는데, 복잡한 한국의 도심 주차장들이 이렇게 바뀌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구나, 싶었습니다. 

 

삼성동의 C몰에 주차를 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잠실 L월드와 맞먹게 주차구역이 넓어, 쇼핑몰 내에 내가 원하는 목적지가 어디냐에 따라 표지판을 보고 잘 찾아가지 않으면 완전히 엉뚱한 곳에 주차하게 되어 목적지까지 많이 걸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영화관을 찾으려다 수족관 쪽으로 들어간다든가) 

 

저는 '영화관'이라고 쓰여진 글씨를 따라 몇 바퀴를 뱅글뱅글 돌아서, 겨우 영화관으로 통하는 입구 근처에 차를 주차할 수 이었습니다.

 

'몇 년 만에 한국에 와서 이렇게 복잡한 곳에 주차를 하는데 이 정도면 아주 잘 찾은 거야!

역시 나의 공간감각은 죽지 않았어!!!'

샤방

 

안 그래도 영화 볼 생각에 살짝 흥분된 마음이라 평소에 인색한 셀프 칭찬까지 하며 차에서 내려 열심히 팔랑거리며 영화관 쪽으로 들어갔습니다

 

 

늦은 시간이라 한적했지만 밤새 영화 상영을 하는 이곳을 한국에 살 때도 일 끝나고 가끔 들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기분 좋게 티켓을 사러 내려갔습니다.

 

 

원하는 영화를 말하고 신용카드도 할인카드도 포인트카드도 없다고 대답하고 현금으로 영화 표를 사려는데, 갑자기 번뜩! 든 생각이 있었습니다.

 

'주차권! 주차권이 없는데 어떻게 영화 본 후 주차 할인을 받지??????????'

생각중

한국에 온지 며칠 안 되었을 때라 몇 년 만에 가족이 아닌 한국 사람을 만나 말 하는 게 아직 문어체로 어눌한 시점이었지만 그래도 저는 물어야 했습니다.

 

"주차권이 없는데 어떻게 주차 할인을 받는 것인가요?" 

 

"아, 고객님의 차량 번호 네 자리를 알려주시면 저희가 전산으로 입력해 자동 할인을 해드립니다.

그러면 주차장으로 나가시는 문 앞에 있는 정산 기계에 차량 번호를 입력하시고

할인된 금액으로 정산하시면 되십니다."

헉

"저, 저는 차 번호를 기억하지 못하는데, 어쩌지요???"

 

그랬습니다. 한국에 있는 동안 엄마 차를 빌려 쓰기로 했었기에 운전해 나왔는데, 제가 그리스로 이민 가기 전에 초록색 번호판을 달고 있던 그 차는 몇 년 사이 흰색 번호판으로 바뀌었고 저는 그 차의 새 차량 번호를 기억할 필요를 못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화관 직원은 "영화관 입구에서 가까운데 주차하셨어요? 저희가 밤새 여기서 근무하니 영화를 일단 보신 후에 차에 가서 번호를 확인하시고 다시 돌아오셔서 말씀해 주시면 할인 해드리겠습니다~" 라고 친절하게 말해 주었습니다.

 

저는 일단 시간이 임박했기에 상영관으로 들어가, 혼자 웃고 놀라고 커피도 마셔가며 신나게 영화를 봤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부랴부랴 뛰어나와 주차장으로 가려는데, 아니!  영화 상영관에 들어가는 입구가 나오는 출구가 달라서 주차장으로 가는 방향을 잃은 것입니다! 그래도 씩씩하게 새벽 세 시가 다 된 시간에 청소하는 분께 물어 물어 주차장 입구를 찾으려는데, 어디에 주차를 했느냐는 아저씨의 질문에 저는 그만 멘붕이 오고야 만 것입니다.

 

헉

"헉! 내가....어디에 주차를 했더라??? 몇 열 몇 번에???????!!!!!!!"

 

그랬던 것입니다. 저는 제가 어디에 주차를 했는지 기억해 두지 않는 것입니다.

원래 이민 전 한국에 살 때는 늘 서울 안 복잡한 곳을 돌아다니고 주차하는 것이 일상이어서, 주차권을 뽑으면 그 뒷면에 작게 지금 주차한 층, 열, 번호를 팬으로 써 놓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지하 3층 K 35"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그런데 몇 년 만에 한국에 왔기에, 그랬던 과거의 습관을 잊기도 했지만, 주차권까지 안 뽑았으니 더더욱 까맣게 잊고 혼자 칠렐레 좋다고 스스로 칭찬까지 하며 영화관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저는 일단 아무 쪽이나 주차장 입구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어 자동를 사방으로 팔을 뻗어 삑삑 눌러가며 반응하는 차가 있는지 찾으며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누구이고, 여긴 또 어디인가..."

축하2

 

그렇게 삼십 분을 헤매고...드디어 차를 찾았습니다...

엉엉

 

지친 얼굴로 새벽 네 시가 다 된 시간에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와서 영화관 카운터에 턱 팔을 기대며 직원에게 말을 했습니다.

"제 차는 XXXX 입니다..."

고개를 숙여 컴퓨터를 보던 남자 직원은 제 얼굴을 보더니 흠칫 놀란 표정이었고 빠르게 전산을 입력해 주차할인을 해 주었고, 저는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서서 다시 주차 정산기를 찾아 주차장으로 향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해보니 그 직원이 저를 얼마나 이상하게 생각했을까 싶었는데요.

그게, 밤 늦게 어떤 여자가 일행도 없이 혼자 영화를 보러 왔는데, 말투도 책 읽는 것 같고, 자기 자동차 번호도 모른다고 하고, 그 흔한 한국 신용카드도 할인카드 적립카드 아무 것도 없다하며 영화를 보더니, 몇 시간 후에 나타나 완전 피폐한 모습으로 영화관 카운터에 거의 기대다시피 해서 헥헥거리며 차 번호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으니 얼마나 이상했을까요.

새벽 네 시라 사람도 몇 명 없었는데 영화관 조명이 밝아 다행이지 싶습니다.

주차비 더 나올까봐 노심초사 사방으로 팔을 뻗어 차키를 삑삑거리며 뛰어다녔더니 곱게 빗고 나온 긴 머리는 아주 산발이 되어 있었거든요.

 

 

 

여러분 즐거운 하루 되세요!

좋은하루

 

* 영화 감시자들은 정말 깔끔한 수사물을 좋아하는 제 취향에 딱 맞는 재미있는 영화였습니다.

* 역시나 이날 이후 몹시 바빠져 저는 다시 한국의 영화관에 가지 못하고 그리스로 돌아왔습니다.

* 이날 이후 어느 큰 건물에 주차를 하더라도 꼭 주차층, 열, 번호를 휴대폰에 입력해 두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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