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아침, 타향살이하는 못난 딸이 아버지께 쓰는 편지.
아버지.
이 편지를 보내지 못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냥 전화로 멋적게 "아휴, 밥 잘 챙겨 드세요." 라고
뚝뚝하게 말 할수 밖에 없을 거라는 거 알면서도
말로는 차마 낯간지러워서 하지 못할 말들을
그냥 뱉어봅니다.
한국은 설날이지요.
기분이 왜 이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는 설 하고 아무 관계도 없는 날이었고, 일상 해야할 일들로 바쁜 하루였는데도
자꾸만 틈틈히 아버지 생각이 났어요.
딸아이가 며칠전에
할아버지 생신이 다가온다며 카드를 그리고 만들면서 묻더군요.
"할아버지가 몇 살이 되신거야?? 케이크 그림에 숫자 초도 그려 넣고 싶은데."
몇 살이시라고 겨우 계산해서 말해주면서
세상에...우리 아버지 나이가 벌써 그렇게 되셨나,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일찍 결혼 하셔서 첫 딸로 저를 보셔서
항상 제게는 친구들 아버지보다 젊은 아버지셨었는데
가슴이 철렁했었습니다.
아버지.
저를 장남이라고 부르셨고
장남처럼 키우셨었지요.
아들 없는 집, 장녀라고 유난히 엄하고 강하게 키우셨었더랬지요.
그래서 서로 사랑하면서도 사랑한다고 표현한 적도 없고
늘 뚝뚝한 투의 대화만 주고 받는 사이었지요. 우리는.
제 딸아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아버지께서 그 아이를 물고 빨고 이뻐라 하시는 걸 보면서
아...우리 아버지도 저렇게 사랑을 표현할 줄 아시는 분이셨구나,
처음으로 알았답니다.
아버지, 기억하세요?
그리스로 오기 전 마지막으로 가족여행을 갔을 때
그 때도 날씨가 지금 같았는데
그 때, 우리 참 즐거웠었지요?
그런데 저는 왜 자꾸만 인천공항에서 눈물을 훔치며 그 마른 어깨를 들썩이며
평소와 달리 흐느낌 조차 감추지 못하셨던 아버지 얼굴만 오래도록 떠오르는 걸까요.
그 사이 그리스에도 다녀가셨고, 미국 동생 결혼식 때도 뵈었었는데
그런 즐거웠던 기억들은 희미하기만 하고
자꾸만 아버지의 흐느끼던 얼굴과
조금만 염색이 늦어져도 금새 희끗해져 버리는 머리카락들만 떠오르는 걸까요.
오래전 큰 병마와 싸우시느라 병원에 링거를 줄줄이 꼽꼬 누워 계시던
그런 지나간 일들만 떠오르는 걸까요.
아버지, 기억하세요?
저 다섯 살 때, 제가 보채서 한 달에 한 번 겨우 쉬시는 날
저를 자전거 뒤 짐 싣는 곳에 태우고 가시다가
제 오른 발이 바퀴 뒤에 쓸려 병원에서 치료 받았던 일이요.
피를 많이 흘려서 붕대를 칭칭 동여매고
병원에서 나오면서 시장에 들러
제가 신고 싶어했던 운동화를 사주셨던 일이요.
그리고 자전거 가게에 들러
앞 좌석에 다는 어린이 보호용 의자를 이리 보고 저리 보고
그렇게 몇 십분을 살펴보시고도
그 돈이 우리에겐 너무 큰 돈이어서
차마 못 사고 돌아나오며
제게 미안하다고 말씀하셨던 일이요.
두고두고 제 발의 흉터를 보시며
미안하다고 하셨던 일이요.
아버지.
저는 얼마전 딸아이 자전거를 밀어주다가
그 일이 문득 떠올랐어요.
아버지 맘이 어땠을까.
왜 그 오래전 일이
이렇게 또렿하게 기억나서
이제 발의 흉터도 희미해졌는데
아버지의 그 미안해하던 얼굴때문에
내 마음이 이렇게 아픈걸까요.
왜 부모가 되고서야
아버지의 아팠었을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걸까요.
돌아보면 저는 좋은 딸도 아니었고
부모님께 유난히 묵뚝뚝하게 굴었던
어떨 땐 두 분께 정떨어지는 딸이었을텐데
그런 저를 여전히 챙기시고
여전히 걱정하시고
그런 모습들을 떠올릴 때면 죄송하고
죄송하다고 제대로 말 못했던 시간들이 또 죄송하고
그런 제가 너무 싫고
나는 왜 그러고 살았었나 싶고
속에서 뭉텅뭉텅 삼켜지지 않는 눈물 덩어리만 올라옵니다.
시누이가 놀러오면,
시부모님께서 차려진 온 갖 음식 그릇을 시누이 앞으로 밀어주며
너는 밥은 먹고 다니냐...이렇게 물어볼 때마다
눈물이 핑그르르 돌곤 합니다.
시누이가 부러워서가 아니라
나도 한국에 있을 때 부모님이 그러셨었는데
그 때는 왜 고맙다고 말 하지 못했을까
고마운 줄도 몰랐었을까
그런 후회때문에
애써 눈물을 삼킨 적도 많습니다.
아버지.
이렇게 보낼 수 있을지 알 수도 없는 편지지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버지, 죄송했어요.
저는
걱정을... 많이 시키는 딸이었어요.
한번도... 다정한 적이 없었던 딸이었어요.
저 때문에 속상해서 울기도 하셨었지요.
죄송해요. 아버지.
그리고 그런 지나간 긴 세월들이,
타향에 나와 살다보니
한 장면씩, 오래되고 바랜 스냅사진처럼
이따금 불현듯 떠올라
저를 많이, 이제야 부끄럽게 합니다.
늦게...철이 나서 죄송합니다. 아버지.
아버지.
올 해 한국은 유난히 춥다지요.
눈도 많이 왔다지요.
자식들 다 외국으로 보냈다고 적적하다고
대충 식사하지 마시고
뜨뜻한 국물하고 좋은 음식 드시며
편하게 보내셨으면 좋겠어요.
저도 잘 있고요.
딸아이랑 남편이랑 다른 가족들도 모두 잘 지내요.
아버지 건강, 또 건강하세요.
옷 깃 잘 여미고, 몸 좀 무겁게 여겨지시더라도 많이 껴입고 다니시구요.
우리...길지 않은 시간 안에
다시 만나요. 아버지.
아버지 사랑해요.
그리스에서
아버지의 못난이 큰 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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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러셨군요. 몰랐어요.
ㅠㅠ
얼른 나으세요
잉. 속상해요.
저도 아팠었는데 이제 좀 살만해요.
ㅠㅠ.
먼 곳에 있으니 더 생각나고 그리우시겠어요;ㅁ;
그 때는 몰라도 시간이 지나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어릴 때는 부모님이 해주시는 걸 당연하게만 생각했는데
돌이켜 보면 하나 하나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잘해드려야지 늘 생각만 하고...
올리브나무님 글을 읽고 느끼는 점이 많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가족들 모두 건강하세요~
그러게요. 아스타로트님.
왜 이렇게 철이 늦게 들었나 몰라요.
감사해요. 아스타로트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설이에게도 안부 전해 주시고요~
획색머리 오빠님에게도.ㅋㅋㅋ.
갑자기 아스타로트님 아버님의 대구방위대 생각이 나요....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마음이 짠해지고 눈물까지 주루룩 흘러내립니다.
우리가 부모님을 생각할땐, 정말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보다는
늘 짠했던 기억이 먼저 떠오르면서 그리워지지요.
특히 외국에 사니, 보고싶을때 볼수 없고 마음에 묻어두고 지내야 해서
더더욱 애틋함이 가슴을 채우는 것 같아요.
이런 명절이면 더더욱 가족들이 그리워지지요.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그래도 가족이 있으니, 모든것 아름답게 승회시켜 즐겁고 행복한 명절 맞이하세요.
꿋꿋^^하게요~
늘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 따스하심이 글에 다 묻어나있어요^^
감사해요~~~~~~~
샘이깊은물님.
그래도 한국에 비하면 저와 가까이 사셔서
늘 굉장히 가까이 사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래도 비행기 타고 가야하는 곳인데..^^)
저도 눈물을 훔치며 편지를 썼는데
밤 새 뒤척이며 잠을 잘 이루질 못했었어요.
그래서...오늘 아침엔
간만에 그리스는 비가 안 오는 좋은 날씨어서
창문이란 창문은 다 열고
대 청소를 하고
겨울 이불 빨래도 하고
딸아이 맛있는 거 만들어 주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아진 것 같아요.
이래저래 바쁘실텐데,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해요~^^
추억과 기억이라는 것은 항상 자기에게 다가오는 강도에 따라 그것이 조절이 되는 듯 합니다.
출산의 고통보다 출산의 기쁨이 더 기억에 남는 것 처럼...
우리의 인생에 대한 기억도 사진처럼 박혀들어가는 영상들이...
내 마음에 어떻게 우려나는가, 정말 그렇게 순위가 바뀌어지고 마음도 더 선명하게 남는 듯 해요...
아버지와 헤어질 때 인천 공항에서의 그 장면은 정말 올리브님 마음 속에서 더 선명하게 남아있네요...
그렇죠, 아쉽고 안타깝고 그립고 또 정다운 그러나 가슴 쓰라린 그런 마음들...
편지에 녹녹히 남아나는 것이 저도 부모님께 전화를 드려야겠다는 마음으로 재촉하게 하네요...
이 명절에 편지는 못쓸 망정 전화는 올려드려야죠...
같이 공감하고 그리고 무척이나 고마워요.
저도 고마와요. 산들이님~
;
오늘 아버지하고 화상전화로 긴 통화를 했어요.
물론 이 편지에 쓴 그런 말들을 하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아버지께서 요즘에 어떻게 지내시는지
그런 얘기들을 시간가는지 모르고 나눴어요.
아쉽지 않을 만큼 사는 얘기를 듣고 또 하고 나니
비록 속 얘기를 다 털어 놓진 못했지만
그래도 전화 끊고 참 좋더라구요.
직접 세배는 못 하지만
그래도 딸아이랑 세해 복 많이 받으시라고 말씀드렸요^^
산들이님도 주말이라서 모두 함꼐 북적북적
손가는 일들이 많아도, 또 즐겁기도 하고 그러실 것 같아요.
좋은 주말 되세요~^^
올리브나무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아요. 저도 아버지 성격을 닮아 무뚝뚝한 편이라 평소에는 아버지랑 친하게 지내는 편이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몇 년전에 혼자 한국에 나가서 머물 때 평소 내가 아버지한테 서운하게 해드렸구나 하는 생각에 후회가 되더라구요. 그래서 한국에 있을 때 한번 아버지한테 전화를 해서 답지 않게 살가운 말 몇 마디 했는데 아버지가 생전 처음보는 딸 모습에 놀라셨는지 대답도 잘 못하시고 어색한 웃음만 수화기 너머로 흘리시더라구요. 그 때는 내가 평소에 얼마나 무뚝뚝하게 굴었으면 그러실까 싶어서 죄송했었죠. 그런데 또 다시 미국에 돌아와서 같이 살게 되니까 여전해요. 아..하하하하하 ^^;;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것보다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데 아휴~ 저는 갈 길이 먼 것 같아요. 그래서 올리브나무님 글 보니까 더 뭉클하네요.
신이시여~ 제발 제게 오글거리는 말을 할 수 있는 용기와 주변머리를 주소서!!
그러게요~~~ 남편이나 아이에겐 애정표현을 많이 하는 데, 부모님께는 그게 어색한가 몰라요... 이러니까 자식키워봐야 소용없다, 뭐 이런 말들이 있는거겠지요?^^
이방인님도 아버님과 떨어져 계실 때 그런 걸 더 느끼셨군요..
우리....아버님들 살아계실 때 잘 하기로 해요.흑흑.ㅎㅎㅎㅎ
편지 안보내셨으면 얼릉 손편지 쓰셔서 보네세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