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계속의 한국

해외생활 몇 년간 한국TV로만 접한 한국어의 엄청난 부작용

by 꿋꿋한올리브나무 2013. 8. 8.

 

제가 한국인이 전혀 없는 지역에 살고 있다는 것은, 이제 저의 블로그에 자주 들르시는 분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일 것 같습니다.

그러길 몇 년, 한국어를 들을 기회라고는 한국 드라마나 한국 예능 프로그램을 볼 때뿐이고, 한국어를 사용할 기회는 딸아이와 일상대화 몇 마디를 하거나 간혹 한국의 가족이나 지인들과 통화할 일이 있을 때나 한국어를 가르칠 때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적은 양의 한국어 사용인지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게 된 것은 이번에 한국에 들어가서였는데요.

입이 굳어 버린 초반 며칠은 정말 내가 국어책을 읽는 것인가 싶을 만큼 어색한 한국어를 구사한다는 충격적인 사실과 마주해야 했습니다.

(관련글 : 2013/07/13 - [세계속의 한국] - 한국 A/S센터 직원과 해외 이민자인 나의 좀 이상한 인사법)

 

그런데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 폭풍 수다를 떨며 굳은 입이 풀린 후에도, 제 한국어 사용의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해외생활 몇 년간, 사람과의 대화가 아닌 한국 드라마와 예능으로만 접했던 한국어가 빚은 부작용을 경험한 사건이 생기고 만 것입니다.

 

한국에서 보낸 시간의 절반은 한국에 아직 두고 온 제 일을 챙기는데 소요될 수 밖에 없었는데요.

어느 날 저녁, 아주 중요한 미팅이 있어서 그 자리에 참석하려고 공들여 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살피며 중요한 미팅에서 실수하지 않으려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그 자리에 참석을 했습니다.

(행여 그리스에서 하녀처럼 단체 손님 대접 하느라 손마디 모양이 변해 버렸고, 고양이들에게 계단에 철푸덕 주저 앉아 발가락 깨물리며 한국어로 중얼중얼 넋두리를 하는 제 모습이 중요한 자리에서 드러날까봐 더 신경쓴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떻든 저를 일에 있어서는 프로로 기억하고 있을테니 말이지요. 그간 원격으로 일을 해 오는 과정에서는 제 외모를 드러낼 일이 거의 없었으니까요.)

이미 두 번 다른 자리에서 만나 뵈었던 중요한 분을 그 미팅에서 뵙게 되었는데, 이분은 제가 십 년 넘게 일의 방향성을 배우도록 도와주셨던 제게는 스승과 같은 분이셨고 현재까지도 그분을 따라갈 사람이 없을 만큼 사업적 감각과 체계를 갖고 일을 하고 계신 분이시기에, 엄청난 부를 자수성가해서 일구었다는 면이 아니더라도 날카로운 사업 감각만으로도 저를 늘 좋은 의미의 긴장을 하게 만드는 분이십니다.

그런 어려운 분과 제대로 미팅을 한 후, 또 다른 분을 소개받는 자리가 갑자기 만들어졌기 때문에 저는 더욱 긴장할 수 밖에 없었는데요.

그럭저럭 조심스럽게 대화를 잘 마무리 하나 싶어 다행이라 여기며 살짝 긴장의 끈을 놓고 있을 때였습니다.

때마침 그분은 제게 일 관련 새로운 어플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오랫동안 제가 수기로 혹은 컴퓨터 프로그램에 자세하게 입력하는 형태로 해왔던 일을, 그 어플 하나로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는 것에 저는 그만 지나치게 감동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분은 어플을 제 폰에 깔아 주고 시행해서 보여주시며 질문을 던지셨는데요.

"이 어플 때문에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일을 편하게 할 수 있겠지요?"

 

예전의 저였다면, 분명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네. 정말 대단한 어플이 개발되었네요. 사람들에게 보급해서 잘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겠어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미팅을 위해 액세서리, 가방, 네일 색깔, 머리 스타일까지 고심했던 만큼 중요한 자리라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너무 좋은 어플에 흥분하여 그만, 큰 소리로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대에~~~~~~~~박!"

 

헉

말을 뱉는 순간, 아차 했지만 이미 말은 제 입을 떠난 후였습니다...

느낌표0.5초 정도 정적이 흘렀고,

그분은 제 대답에 흠칫 놀라셨지만 애써 진정하시며 제 어이없는 대답을 그냥 무시하셨습니다...

 

상황에 맞지 않는 제 말투에, 제 친구이자 동료는 멀찍이 서서 이 상황을 지켜보다가 풉, 하고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는데요.

엉엉

차라리 국어책을 읽듯이 말 하는 게 나았을 수도 있었을텐데, 친구끼리도 아니고, 가족끼리도 아니고 그 중요한 미팅에서, 그것도 완전 큰 목소리로 "대에~~~박!" 이라고 말하다니...

 

그건 정말 한국어를 드라마로 배우는 외국인들이나 하는 실수인데,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이 튀어나와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인들과 전화로라도 좀 더 많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해서 그리스로 돌아왔답니다.

그리고 한국어는 모국어이니 얼마나 입에 거미줄을 치듯 말을 안 해도, 글로는 많이 사용하니 언제든 다시 잘 구사할 수 있을 거라는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한자성어나 중요한 단어, 정갈하고 아름다운 한국어 표현들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한 노력이 요구되는 때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드라마나 예능 프로를 보는 것도 좀 줄여야겠다 싶었습니다.

저의 언어세계를 더이상 연예인들이 지배하게 할 순 없으니까요.

ㅎㅎㅎ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좋은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