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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과 독백

저는 오늘 딸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by 꿋꿋한올리브나무 2013. 5. 31.

저는 오늘 딸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딸아이는 어제부터 숙제를 붙들고 씨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국과 일 관계로 전화를 길게 하느라 도무지 도와줄 짬이 나질 않았지요.

딸아이는 숙제를 들고 뒷집 시부모님 댁에 갔지만 손님이 한 가득, 역시 도와주실 수가 없었습니다.

웬일로 아빠가 일찍 들어와서 숙제를 도와 주나 했는데, 일 때문에 다시 나가봐야 했습니다.


제가 일을 좀 끝내고 숙제를 봐줄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을 때,

딸아이는 설움에 복 받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고 있었지요.

도대체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숙제가 너무 많고 힘들다고 서럽게 울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웬만하면 엄살이다 하고 넘어갈텐데,

숙제를 보니 정말 엄살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스 초등학교는 숙제가 참 많습니다.

공교육에 상당히 공을 들이는 셈이지요.

처음 그리스에 이민오기 전, 그리스 공립과 사립 초등학교 두 군데를 다 알아 보았는데,

주변 그리스인들과 심지어는 주한 그리스 대사관의 그리스인 직원들까지도, 그리스는 공립학교 교육이 좋다라고

입을 모아 이야기 하길래,

왜 그렇지? 하면서도 이민 후 입학 시기가 되었을 때 공립학교로 입학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정말 학교 시설면에서는 가난한 공립 초등학교가 사립학교를 따를 수가 없지만, 내용면에서는 만족할 수

밖에 없을 만큼 교육 내용이 알차고 교과서가 짜임새있었는데요.

단 하나의 문제 숙제가 너무 많아서 아이들이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저희 딸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의 위치가 시내 한 가운데의 학군이 좋은 곳이어서 더 그렇다고 합니다.

저희는 가게가 학교와 가까와 그 쪽으로 배정받았을 뿐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는 세 시간을 숙제해도 끝나지 않을 양을 내 주어, 아이가 울면서 숙제를 한 적이 한 두 번이

니었는데요.

당시 저는 담임이 미친 게 아닐까, 이런 생각까지 했었습니다.--; 일 예로 1학년 당시 국어(그리스어) 한 과목

숙제만 살펴 보아도 매일 새 단어 서른 개를 외워 받아쓰기를 하고, 공책에 여러 번 써오기를 해야 하고, 문장 읽기

와 쓰기도 책 한 페이지 분량이었는데, 그리스어는 워낙 어려운 언어이다보니 진도를 빨리 나가야 많은 문법과

단어를 배울 수 있기 때문에 1학년 2학기가 되면 우리나라 초등학교 고학년 교과서만큼이나 빽빽한 문장 읽기를

할 수 밖에 없어서 그것을 매일 쓰고 외우는 것은 아이들에게 상당한 고문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2학년이 되니 숙제 양이 좀 줄어드나 싶더니, 수학과 문법이 더 어려워 져서 아이가 머리 아파하기 시작했는데요.

아이가 울었던 어제의 숙제를 살펴보면, 초등학교 2학년 아이들이 '형용사' '명사' '부사' '동사' 라는 문법적으로

단어에 대해 개념을 이미 다 배운 상태라, 책 두 페이지의 모든 문장에서 이 품사들을 찾아서 나누어 공책에 쓰고

외워야 하는 숙제 였습니다.


딸아이가 숙제해야 했던 그리스어 교과서의 일부분


사실 그런 품사를 지칭하는 단어 자체가 이미 성인이 된 그리스인들에게도 어려운 느낌이 들 수 있는데, 그것을

초등학교 2학년 아이들이 나누어 쓰고 외우고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는 진도라는 생각이 들었고, 게다가 이 숙제는

누구의 도움 없이는 도저히 할 수도 없는 수준과 양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성격이 조심스럽고 꼼꼼한 딸아이는 제가 시키지 않아 아침 등교길에 차 뒷좌석에 앉아서 받아 쓰기를

위해 공책을 다시 들여다 보며 틀릴까봐 전전긍긍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숙제는 딸아이에게 스트레스를 많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딸아이가 숙제를 들고 통곡을 하며 우는데, 일단 일이 바빠서 빨리 못 도와줘서 미안하다며 사과부터

한 저는 딸아이를 끌어안고 잘 달래주었습니다. 어려운 이민 생활에 빠른 그리스어 습득으로 초등학교 입학 후

이곳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에게 뒤지지 않고 잘 해온 아이입니다. 말은 다 안 했지만 시시때때로 당하는 모르는

아이들로부터의 인종차별 발언도 견디기 어려웠을텐데, 이제껏 묵묵히 이렇게 해 온 아이가 참 안쓰럽고 대견스럽

게 여겨졌습니다.


저는 아이 등을 쓸어주면서

"괜찮아. 숙제 엄마가 도와줄게. 이거 못 해도 되는 거야.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네 짝 알리끼는 수학 숙제도 자주 잊어 버린다면서. 근데 걔는 아무렇지도 않아 한다며.

숙제를 성실히 하면 좋지만 못 할 수도 있는 것이고, 그게 인생에서 꼭 중요한 건 아니야."

라며 아이를 달랬습니다.

단짝 친구 알리끼처럼 강심장인 아이들은 숙제를 설사 못 하게 되더라도 엄마가 뭐라고만 안 하면, 전혀 스트레스

받지 않는데, 딸아이는 타고난 성이 그러해서 더 스트레스를 받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그렇게 숙제를 도와줬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받아쓰기를 해야할 부분부터 숙제까지 본인이 다 완벽하게 잘 했다는

느낌이 없었는지, 아이는 또 서럽게 울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하루의 일 때문에 이런 게 아니구나, 쌓인 게 있었구나... 싶었습니다.

평소에 꾸준함성실함이 중요하다는에 대해서 누누 가르치는 편이지만 오늘은 학교를 보내는 게 아니다

싶었습니다.


"우리, 오늘 집에서 쉴까? 엄마도 일하러 안 나갈테니까 같이 맛있는 거 먹고 뒹굴거리고 놀까?"

데이트레스토랑

라고 넌지시 말을 건넸습니다.

아이는 환하게 편 얼굴로 "엄마. 정말 그래도 되는거야?" 라며 신나 했는데요.


그런 딸아이는 하루 종일 좋아하는 점토 만들기, 동화책읽기, 훌라후프 돌리기, TV 만화 보기를 하면서 신나게 하루

를 보냈습니다.


딸아이가 하루 내내 만들고 그린 물건 들입니다. 햄버거는 아빠 것이라는군요^^

   


 

로도스에 대해서도 만들었네요. 이건 이모에게 선물할 거라고 하네요.

 

제게도 선물을 주었어요.



그리고 이제 내일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할 말이 너무 많다면 말간 얼굴을 하고 있네요.^^

샤방오키


저는 초, 중, 고. 십이 년을 다니는 동안 단 하루도 결석한 적이 없었는데요. 성실이 인생 최대의 덕목인 부모님

덕분?이었지요.

그런 삶이 제게 성실을 가르쳐주긴 했지만, 다리 깁스를 하고도 열이 펄펄 끓어도 학교를 가야 했던 그 생활이,

그리고 그 생활의 후유증이, 제게 아직도 성격적인 강박증과 완벽주의 추구하는 부작용으로 남아서 저를 괴롭힐

때가 있는데요.


딸아이가 공부를 잘 하는 것도 좋고, 돈을 잘 벌고 사회에서 한 몫 하는 어른이 되는 것도 좋겠지만

어떤 일을 앞으로 하고 살더라도, 저는 이 아이가 우선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공부를 좀 못 할 지라도, 인생에서의 크고 작은 행복함을 먼저 배워서, 삶에 대해 시시콜콜 불평하기보다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좋은 성품의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아침 일곱 시부터 다시 등교 전쟁이 시작되겠지만, 오늘 학교를 안 가고 쉰 이 하루가 딸아이에게 꿀 같이

단 하루였길 바라게 됩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좋은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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