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으로 단 하루만 '순간이동' 할 수 있다면,
꼭 가고 싶은 곳 Best 4
그리스에 온 후로 몇 년 동안 아직 한국에 한번도 다녀오지 못했습니다.
처음엔 딸아이가 한국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많이 그리워해서, 도리어 그리스에 대해 익히고 적응할 시간이 필요해서 일부러 가지 않았었고, 다행히 아이가 그리스어를 빨리 익히게 되어 학교에 정상 입학하고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한 후로는, 미국의 동생 결혼식을 다녀오거나 집안 모임으로 가까운 오스트리아를 다녀오면서 매니저 씨가 휴가를 낼 수가 없어 한국 행은 더더욱 요원해졌습니다.
한국에는 꽃이 피었다, 봄이 오고 있다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저는 한국으로 순간이동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요즘 고국에 대한 생각들로 가득한 상태입니다.
아마도, 올 여름에 딸아이가 방학을 하면 한국에 한 번 갈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여름이 아닌 이 봄에, 한국의 꽃 샘 추위든, 아지랑이 피는 오후든, 부분부분 개나리와 철쭉이 피어 있는 올림픽대로든
한국의 봄을 느끼고 싶답니다.
그래서 모든 제약 사항과 환경을 다 무시하고, 복잡한 세 번의 비행기도, 딸아이의 학교도, 매니저 씨의 휴가도, 짐 가방도 생각하지 않고
저 혼자, 눈을 감았다가 뜸과 동시에 지금 당장 한국으로 단 하루만이라도 '순간이동'할 수 있다면, 나는 어디를 가고 싶은 걸까 눈 앞에 그려보았습니다.
(모든 상상은 몇 년 전의 한국을 토대로 하고 있으니 혹시 지금 달라진 환경이 있더라도 이해하고 읽어주세요^^)
우선 딸아이를 남편에게 부탁하고, 고국으로 오랜만에 가는데 옷도 멋있게 차려 입고 메이크업도 공들여 하고, 여분의 돈과 운전면허증, 여권, 카메라를 작은 가방에 챙겨 넣었습니다.
그렇게 그리스 시간으로 저녁 열 시, 한국시간으로 이른 새벽 다섯 시, 가볍게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아봅니다.
자 순간이동 시작합니다! 텔레포트!
1. 파주 출판단지
부모님 댁으로 순간이동 한 저는 꼭두새벽부터 놀란 부모님을 진정시키고, 그 분들이 끔찍이 여기는 손녀는 학교를 가야해서 데려오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일단 사과한 후 잠시 부모 자식간의 정을 확인하고 그간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일단 회포를 풀었습니다. 엄마가 있던 반찬에 차려준 식탁엔 급히 끓인 보글거리는 된장찌개와 엄마 표 김치가 저를 기다리고 있네요. 그렇게 먹고 싶었던 엄마의 아침밥을 열심히 맛있게 먹고, 자동차를 빌려 아침 9시 서울 동쪽에 있는 부모님의 집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집 앞에 미리 월차를 내고 나를 기다린 친구를 차에 태웁니다. 길치인 그녀보다 몇 년 외국에 살았지만 제가 더 길을 잘 찾을 것임에 틀림없으므로 운전대는 제가 잡았습니다. (최근에 그리스까지 전화 해서 길을 물어봤으니까요--; 못 말리는 내 친구.)
출근 길 전쟁이 한판 지나간 강변북로는 차가 조금씩 줄었지만 여전히 시속50km를 넘길 수 없게 서행 중이군요.
그래도 저는 행복합니다. W 호텔도 보이고, 테크노마트가 보이네요. 계속 운전을 합니다. 아직은 좀 춥지만 기분이 참 좋습니다. 라디오에서 DJ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한국말만 하는군요. 정말 좋네요.
한남대교가 보이고, 동작대교도 스쳐갑니다. 마포대교 진입로도 지나칩니다. 친구가 그간 있었던 일들에 대해 내내 수다를 떱니다.
자유로에 들어섰습니다. 이제 파주 출판단지 표지판을 보고 오른쪽으로 진입했습니다.
<출처 - 출판도시 문화재단, 여기로 가시면 파주 출판단지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있어요 http://www.pajubookcity.org/>
아, 출판단지로 들어왔네요. 건물들이 낮고 가지런한 게 여전히 좋습니다. 여기저기 나무에 꽃이 피어 있는 게 보이네요.
새로 생긴 북카페들이 많이 눈에 띕니다. 차를 주차장에 주차하고 친구와 좀 걷습니다. 여기 저기 북카페들을 구경하며, 딸아이를 위해 어린이 동화책 대폭 할인하는 출판사 할인 장터에서 몇 권의 한글 동화책들을 저렴한 가격에 고릅니다.
많이 걸었더니 배가 고프네요. 차를 세워둔 근처 자주 가던 카페겸 식당이 있는데(cafe Comeon), 매운 낙지볶음 스파게티를 먹습니다. 그리스에서 여러 번 흉내 내 보았지만, 이 한국적인 소스 맛을 낼 수 없더군요. 재료가 달라서 그런게 아닌가 싶습니다. 같이 나오는 밥까지 소스에 비벼서 뚝딱 먹었습니다.
통 유리 너머로 밖을 보니 햇살에 날씨가 그리 춥게 느껴지지 않는군요.
<카페컴온 파주점 031-955-3666, 경기도 파주시 문발동 530-1>
2. 가로수길
가양대교를 건넙니다. 한강 표면이 햇볕에 반짝이네요. 한강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강임에 틀림없습니다. 유럽에서 음악가들의 클래식 음악 속에 등장하는 강들을 여럿 보았지만, 운치 있고 예술적 느낌은 있어도, 한강처럼 이렇게 쿨하고 멋지진 않았습니다.
이제 올림픽 대로를 탑니다. 친구가 동선을 왜 이렇게 잡았냐고 묻지만, "그냥 봄의 한강변 대로들을 천천히 달리고 싶었어", 라고 대답합니다. 그런 내 대답에 친구는 돌직구를 날립니다.
"원래 한국에 살 때, 올림픽대로랑 강변북로 매일 다니면서 차 막혀서 미춰 버리겠다고, 변기 달린 승용차라도 개발해 내라고 미친 소리 했던 게 누구더라?"
나는 대답합니다.
"시끄러."
오른 쪽으로 개나리가 많이 피었네요. 아아 너무 예쁘네요.
12시부터 2시까지 하는 라디오 프로그램들을 여기 저기 채널 돌려가며 들어봅니다. 89.1 91.9 95.9 107.7 다 완전 재미있습니다. 선곡도 너무 좋습니다.
처음엔 막히던 도로가 영등포를 지나면서부터 뻥 뚤리네요. 좀 달리자 압구정으로 들어서는 표지판이 보이네요. 진입합니다. 현대백화점 쪽 으로 우회전해서 조금 더 가서, 좌회전으로 붙어 가로수 길 쪽으로 들어가려고 신호를 기다리며 왼쪽을 쳐다보니, 평일 낮인데도 주차된 차들이 많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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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수길 앞쪽의 타르트 가게도 들르고 싶지만 뒷골목으로 들어가 유로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작고 조용한 빈티지풍 카페 (MOMO COt)에 갑니다. 온통 고양이 관련 인테리어라 한국에 살 때 신기해하며 가끔 이 곳에 앉아 일을 하곤 했었습니다.
<가로수길 모모콧 02-517-3517,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535-17>
오후가 되니 햇볕이 따뜻해서, 카페 밖에 놓인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십니다. 친구가 알아서 샷을 추가해 주문을 해왔군요. 오래된 친구는 나를 잘 압니다. 흰 커피잔에 커피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는 걸 보고 있자니 기분이 참 좋습니다.
친구는 왜 사당동에 있는 커피를 핸드드립 해주는 제가 자주 가던 카페(사당동 카페 Hobby)에 가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거긴 정말 커피는 끝내주는데 와플도 맛있고.. 그런데 내겐 그 곳에서 만났던 지인들과 안 좋은 추억이 너무 많아." 라며 웃어봅니다.
친구와 가로수 길을 구석구석 걸어봅니다. 새로 생긴 카페와 옷 가게가 정말 많습니다. 그렇지만 한국만의 봄 냄새는 똑같이 느껴집니다.
좋은 추억이 많은 장소는 다시 와도 좋구나 싶습니다.
3. 삼청동
동호대교를 건너서 약수동을 지나 시내로 들어섭니다. 오랜만에 들어온 서울 한 가운데는 여전히 복잡합니다. 우회전을 해 동대문 쪽으로 향합니다. 건물들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동대문이 정말 반갑습니다. 동대문 앞 신호에 서서 앞을 보니 아버지께서 오래 입원해 계시던 이대 병원이 보이네요. 읔, 병원냄새가 코 끝에 느껴지는 것 같아 신호 바뀌자마자 서둘러 직진해 그 곳을 빠져나옵니다. 좋아하는 대학로가 보입니다.
혜화동을 걷고 연극을 보고 단편영화를 보던 시간들이 한꺼번에 떠 오릅니다. 넓은 건널목에 서서 왼쪽을 보니 반가운 카페 50년 전통의 학림이 보입니다. 비오는 날 맛있는 코코아에 LP의 치직거리는 소리가 섞인 클래식 음악을 듣고 있자면 스트레스 완전 날아가버리는 오래된 카페 학림.
들르고 싶지만 오늘은 비도 안 오고, 차 세울 곳도 없고 시간도 없어 그냥 로터리에서 좌회전합니다.
안국동을 지나 삼청동으로 들어왔습니다.
차를 공영주차장에 세우고, 친구와 또 걷습니다. "오늘 서울 일주를 하는구나. 아이구 다리야." 불평하는 친구에게 "날이면 날마다 오는 서울일주가 아니잖아. 친구야. 그냥 좀 봐줘. " 라며 웃음 섞인 애교를 부려봅니다.
오래된 집들이 있는 뒷골목으로 들어갑니다. 아기자기한 카페들과 식당들이 보입니다. 곰탕에 손만두 라도 먹고 가고 싶지만 아직 배가 안 고프네요. 작은 박물관들, 수공예 액세서리 가게들도 보입니다. 구경하다 보니 정신이 없습니다. 전통문양의 수공예 귀걸이와 목걸이 몇 개를 삽니다. 미우나 고우나 가족이라고 시댁식구들 생각이 나서 특별히 포장도 부탁합니다.
<한국에 있을 때, 찍었던 삼청동 사진들>
<한국에 있을 때, 찍었던 삼청동 사진들>
한국 전통 짙은 청색 기와가 참 아름답습니다. 그리스에서 내내 보던 주황색 기와들과는 참 다른 느낌이 듭니다. 제 손은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네요. 이 사진들로 그리스에서 또 한참을 좋아하며 들여다 볼 것입니다.
갑자기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합니다. 어? 어느새 저만치 동네 아래도 해가 기우는 게 보입니다.
친구야, 이제 다른 곳으로 가야겠다.
4. 홍대거리
차가 막힙니다. 그렇죠. 퇴근시간에 물렸군요. 경복궁 앞에서 연대방향으로 꼼짝도 안 합니다. 괜찮습니다. 오랜만에 본 한국 경찰들도 반갑고, 그 와중에 추월하는 차에 대고 빵빵대는 소리도 괜찮습니다. 수 많은 네온사인들이 번쩍이네요. 차가 앞으로 슬슬 이동하는군요. 재빨리 왼쪽으로 세종문화회관 그림자만 훑어 봅니다. 터널을 지나고, 연대 입구가 보이네요. 차 후미에서 동시에 뿜어내는 빨간 브레이크 등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이상하지요. 로도스에서도, 아테네에서도, 오스트리아에서도, 미국에서도 비슷비슷해 보이는 자동차 브레이크 등의 행렬을 보았었는데, 왜 한국은 다른 느낌이 들까요. 그냥 고국의 무언가 이니, 타국 생활한 나만 그렇게 특별하게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며 홍대거리 쪽으로 들어섭니다.
<홍대거리 지도. 출처-google image>
아! 조폭 떡볶이가 보이네요. 점포 형 가게가 되기 전부터, 포장마차로 사람들이 겹겹이 둘러싸서 차례를 기다릴 때부터, 저는 이 집 단골이었습니다.
<홍대 조폭 떡볶이 02-337-9933, 서울 마포구 서교동 407-21>
맵고 맛있고, 뭐라 말할 수 없는 맛! 분명 비밀 소스가 있을 텐데, 굳이 알고 싶진 않습니다. 떡볶이에 김말이 튀김을 잔뜩 넣어서 친구와 열심히 먹습니다. 어묵 국물이! 광고 카피처럼 끝내주네요!
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터질 것 같습니다. 그래도 친구랑 깔깔거리며 웃어봅니다.
노래를 좋아하는 친구가 수 노래방에 가자고 하네요. 사람이 많아서 통 유리 달린 방이 없을 줄 알았는데 딱 하나 남았네요.
<홍대 럭셔리 수 노래방 02-322-3111, 서울 마포구 서교동 367-39>
이게 얼마 만에 불러보는 한국 노래인가요! 길 쪽에서 우리를 보든지 말든지 신나게 노래를 부릅니다.
친구야. 마이크 줄 끊어지겠다. 적당히 춤 춰라.
노래방에서 나와 홍대 골목을 여기저기 걷습니다. 이상한 포르투갈 교수 아저씨 영어 통역해주다가 잠깐 같이 차 마셨던 스타벅스도 보입니다. 아저씨는 홍대거리가 정말 신기하다고 했었습니다.
싼 옷과 구두도 구경하고, 가방들도 구경합니다. 친구들과 쇼핑하러 와서 정작 몇 개 사지도 않았는데 기분이 좋아졌었던 오래 전 일들도 기억이 납니다.
이제 집에 가야겠다. 친구야.
가로등이 켜진 강변북로를 타고 부모님 집 쪽으로 향하는데, 오늘 하루가 참 길었던 느낌이 듭니다. 일상에서 많이 벗어나서 그런가 봅니다.
코엑스에서 같이 영화라도 보고 가자는 친구에게, "미안해.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거야" 라고 말하며 계속 운전을 합니다.
친구는 멀리서 온 제가 하자는 대로 오늘 잘 맞춰줍니다.
부모님 집 앞에서 친구와 포옹을 합니다. "너도 일상이 바쁠 텐데, 나를 위해 이렇게 온전히 하루를 내 주어서 너무 고마워. "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친구를 얼른 차에 타라고 등을 떠밀어 봅니다.
부모님이 많이 기다리셨던 눈치입니다. 맛있는 거 많이 먹었냐고 물어보시네요. 부모님과 한참을 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피곤한 아버지께서 먼저 주무시고, 엄마에게도 이제 그만 가보겠다고 말합니다. 시간이 새벽 다섯 시입니다.
엄마와 등을 두드리는 아쉬움의 포옹을 하고 올 때와 달리 현관으로 나옵니다. 눈 앞에서 사라지는 건, 너무 아쉬울 것 같습니다.
엄마가 따라나올 까봐 얼른 등 뒤로 현관문을 닫고, 아파트를 빠져 나옵니다. 분명 베란다에서 내다볼 것 같아 빠르게 걸어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옵니다. 캄캄한 도로 앞에 차가 듬성듬성 지나갑니다. 가로등 앞에서 눈을 감고, 오늘 감사했다고 짧게 기도합니다.
그리고 다시 그리스로 순간이동을 합니다. 텔레포트!
저는 지금 거실, 그리스 우리 집에 앉아 있습니다.
딸아이가 자려고 누웠다가 일어나 눈을 비비며 엄마~하고 내려오네요.
돌아왔습니다.
한국에 계신 여러분, 제가 가고 싶은 곳들이 너무 소박한가요?
그냥 엄마가 해주는 밥, 차밀리는 도로, 추억의 카페, 장소들이 전부라서
뭔가 거창한 걸 기대하셨다가 혹시 실망하셨나요?
그런데 여러분에겐 이렇게 쉽게 갈 수 있는 곳들이
제게는 이렇게 상상을 동원해서 다녀와야만 갈 수 있는
비행기 세번 타는 먼 곳이 되었네요.
그냥 오늘 우리 주어진 것이 많이 감사하는 하루가 되기로해요~
좋은 하루 되세요!
* 비록 상상이지만 단 하루이기 때문에 서울 중심으로 다녀왔답니다.^^ 아마 실제로 비행기를 세 번 타고 무거운 짐 가방 몇 개를 들고 아이 챙겨가며 인천공항으로 들어가 몇 주 머물게 된다면 다른 지역 도시와 산들, 미술관, 공연...갈 곳이 정말 많겠지요? 그리고 이렇게 하루 만에 서울을 돌지도 않겠지요. 더 먹고 싶은 것도 많이 먹고, 많은 친구를 만나고, 친구들이 모두 바쁘면 빈 교회에 앉아 하루 종일 피아노치며 노는 호사도 누리겠지요. 상상이 아닌 진짜 고국 방문기, 꼭 쓰고 싶네요.
* 매니저 씨에게 똑 같은 미션을 주니, 정말 간단한 대답을 하는군요. 1. 불타는짬뽕집 2. 할매감자탕집 3. 오모리찌게집 4. 롯데월드.
식당 세 군데에 놀이공원 하나. 참 단순해서 좋겠어요.--;
* 말만 Best4이지 서울을 뱅뱅 돌았군요.^^ 이해하세요. 제가 많이 그리워서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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