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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그리스 문화

그리스 위기, 현명한 보통 그리스인들의 대처

by 꿋꿋한올리브나무 2015. 7. 12.

 

 

 

그리스 위기에 대해 국제 뉴스에서 보도하는 내용들이 워낙 다급하고 자극적인 것들이다보니 한국에 있는 지인들로부터 받는 전화의 대부분은 걱정과 우려가 가득합니다. 물론 뉴스의 보도처럼 현재 그리스의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다급한 긴장상태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메르스 문제가 심각하다고 해서 전 국민이 두문불출하며 직장을 포기하고 집에만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처럼, 그리스에서도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모두가 뉴스에 귀를 기울이며 생활하고 있지만 여전히 출근을 하고 가족을 돌보며 생업에 최선을 다 고 있습니다.

특히 국제 뉴스에서 보도하는 것처럼 ATM에서 돈을 인출하지 못 해 바닥에 주저 앉아 망연자실한 노인들이나 식료품이 없어 쩔쩔매는 사람들 같은 극단적인 상황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현명한 보통의 그리스인들이 이 위기를 대처하는 모습은 이렇습니다.

 

그리스 금융 위기, 현재가 시작점이 아니다.

제가 그리스에 이민 온 시기는 공교롭게도 그리스 금융 위기가 한참 시작되었던 시점이었습니다. 당시 이민을 준비하던 저에게 주변 그리스인들이 누누이 부탁해던 말이 있는데, "한국에서 이민 생활을 위해 돈을 갖고 들어온다면 절대 그리스 은행에 오래 맡겨 두지 말아라. 지금 그리스 상황이 어떻게 될 지 모르니 은행에 큰 돈을 맡기는 것은 위험하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5년 전 이야기입니다.

이렇듯 현재까지 이미 5년 넘게 시시각각 상황이 급변하는 금융 위기를 겪어온 그리스인들이라, 현명한 사람들이라면 단 돈 몇 백 유로(몇 십 만원)라도 여유자금이 생겼을 때 그리스 은행이 아닌 개인금고를 이용하거나 국제은행을 이용하는 경우가 늘게 되었습니다. 가족의 미래의 안전을 위한 준비인 것입니다. 이런 일반인의 개인금고 사용 비율은 최근 1~2년 사이에 더 높아져서 좀도둑들이 개인금고를 노리고 빈집을 터는 경우 역시 늘었지만, 이 때문에 그리스 내에는 이중 삼중 잠금장치가 있는 개인금고 사용량이 더욱 늘었습니다. (이는 금고를 다루는 그리스 전국의 기술자들과 해마다 아테네 세미나에 모여 정보를 나누는 제 동료들 덕에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월급통장에 있는 현금을 사용할 때도 빚의 부담이 있는 신용카드보다 체크카드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최대한 가계부담을 줄이기 위함이고 한국처럼 그리스에서도 체크카드만으로도 장보기나 인터넷 쇼핑 등에 전혀 불편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식으로 5년 넘게 현명하게 대처해온 그리스인들이라면, 최근 2주간의 심각한 그리스 위기로 은행에서 현금을 하루 60유로(최근 50유로로 조정되기도 했습니다.)밖에 인출하지 못 한다고 해서 생필품을 살 수 없다든가 생계에 문제가 있는 경우는 없는 것입니다. 마트에서 체크카드로 장을 볼 수 있고 주유소에서도 체크카드를 사용하거나 금고에 보관에 두었던 여분의 현금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또한 연금으로 생활하는 노인들의 경우도 120유로로 인출금이 제한되어 있지만, 역시 이 노인들에게 젊은 자녀나 가족이 있다면 노인들 역시 체크카드를 사용하는 방법을 이미 인지하고 있어, 생계에 문제가 있진 않는 것입니다. 물론 상점이나 마트 등에서 기존에 비해 갑자기 카드 사용자가 늘어나서 결재를 기다리는 시간이 좀 더 길어진 불편함이 있지만 상품의 구매가 불가능 한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리스인들, 디폴트 위기라고 할 일을 못 하진 않는다.

물론 이번 디폴트 위기 첫째 날이었던 지난 6월 29일 월요일은 군중 불안 심리로 주유소에 기름이 동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는데, 덕분에 장사를 잘 한 주유소들은 수거한 이익금으로 다시 기름을 가득 채워 두었고 하루 이틀 지나며 이런 분위기는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앞으로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 소비는 억제 되어 시장경제가 위축되고 현금이 잘 유통되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게다가 하필 사태가 심각해진 지난 주가 월말 월초라 은행이 문을 닫아 많은 이들이 월급을 제때 받지 못 하기도 했습니다. 소규모 회사의 경우 인터넷 뱅킹으로 그때 그때 월급이 이체되곤 하는데, 당시 대다수 은행의 인터넷 뱅킹이 마비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하루 이틀이 지나자 정상적으로 작동될 수 있었고 대부분의 회사들은 월급을 제대로 지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대부분 은행에서 처리해주던 공과금이나 세금 납부 등의 일들을 현재 그리스 우체국에서 임시로 처리해주고 있어 우체국이 만원사례를 이룬다는 불편함은 있지만 업무를 처리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이 IMF를 위기를 겪었을 때 시작시점보다 긴축이 심화되었던 1~2년 후에 국민들의 긴축에 대한 대처능력이 더 나아진 것처럼, 한국인구의 1/3밖에 안되는 인구수에 1/n 로 떨어진 부채 상환 부담을 고스란히 5년을 겪어온 그리스인들도 현재 위기 상황에 가계 경제를 평소보다 좀 더 긴축하며 이 상황을 담담히 이겨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라 상황히 어떻든 성실하게 일을 해나가고 있는 사람이라 이미 날짜 잡아 준비해온 결혼식을 위기상황이라고 취소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할 일을 각자의 자리에서 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가 트로이카 채권단 (유로그룹, 유럽중앙은행, IMF) 과의 협상에서 난항을 겪고 있는 이유

 7월 5일 있었던 채권단의 긴축 제안에 대한 그리스 국민투표에서 반대표가 크게 우세했던 이유도 5년 넘게 이런 긴축을 견디던 그리스 국민들이 더 이상의 긴축을 감당할 능력이 없기 때문인데, 이미 그리스인들은 높아질 때까지 높아진 세금(높아진 부가세와 개인 세금 등), 반토막 난 임금(공무원의 경우 더 큰 임금 삭감이 있었습니다.) 등으로 허리띠를 졸라멜 때까지 졸라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상황을 정확히 모르는 이들은 그리스가 빚을 졌으면 갚아야지 무슨 똥배짱이냔 식으로 말을 하곤 하지만, 사실은 오래 전 정부의 부정부패로 인한 부채를 현 시대 국민들이 힘겹게 갚아나가는 이 상황은 마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진 빚을 자녀들이 갚아 나가는 형태로 그것도 월급을 차압 당하고 억지로 세금을 더 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나 다름 없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5년 넘게 힘들어서 지친 국민들에게 연금까지 삭감하고 세금을 더 올리라고 말을 하는 것은 그냥 먹고 살길 포기하란 말과 다를 바가 없는 조건인 것입니다.

게다가 연금 삭감에 대해 그리스 국민들이 더 민감한 이유는, 연금을 거저 받은 게 아니라 젊을 때부터 40년가까이 성실히 납부한 연금에 대해 은퇴 후에 혜택을 받는 것인데, 그것을 삭감하라는 것은 지금껏 노후를 준비하며 성실히 일을 해온 의미를 세퇴시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실제 그리스인들의 매월 연금 납입 금액은 (금융위기 이후로 현재까지 납입 비율에 지속적인 변화가 있어 연령별, 근무년차별로 정확한 수치를 다 소개할 순 없지만) 상당히 높습니다현재 그리스의 20대가 월급 대비 의료보험과 국민연금을 월 납입하는 비율은 대략 총 월급의 30% 정도이고 30대가 되면 40%, 50대가 되면 50% 이상으로 올라, 연금 수령시기가 가까운 50대 후반이 되면 60%가 훨씬 넘어가게 됩니다. 예를 들어 현재 90만원을 월급으로 실수령하는 20대 청년이 있다면 의료보험과 국민연금을 월 30만원 이상을 원천징수된 상태로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월 납입 금액은 똑같은데 노후에 받는 연금액만 삭감된다면 누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특히 연금을 수십년 이상 이미 납입한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만약 그리스가 지난 5년간 임금이 줄어들지 않았고 이렇게까지 실업률이 높아지지 않았다면, 이번 연금 삭감이나 세금 비율을 더 높이는 제안을 어느 정도 찬성할 수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미 5년간 겨우 생계를 유지할 만큼 줄어든 임금으로 부가세 때문에 더 높아질 물가(현재 그리스는 부가가치세 VAT를 최대 23%를 적용 중인데, 채권단은 VAT를 덜 내는 의료 분야 등의 비율이나 적게 내는 산업이 활발하지 못한 지방 도서산간 지역의 VAT를 높이라는 조건을 내걸고 있습니다.)나 세금, 연금 삭감 등을 감당할 능력이 국민들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만약 채권단에서 협상없이 원래의 제안을 계속 주장한다면, 2030년 이상까지 그리스인들은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진 빚을 자녀들이 아닌 손자 증손자까지 갚아나가야 하는 긴축의 장기전'으로 돌입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 자녀에게까지 국가의 빚을 대물림해 개인이나 국가에 미래가 없어진다는 이야기인것입니다.

즉 돈을 갚더라도 숨쉬며 갚을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해야 국민들도 감당을 할 수 있는데 채권단 측, 특히 최대 채권국인 독일이나 프랑스 측에서 무조건 자신들의 제안을 이행하란 식으로 압력을 넣으니, 그리스 국민들도 반기를 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꿋꿋한올리브나무

 

 

  

그럼 현재 위기로 가장 심각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은 누구

언제나 그렇듯 위기 상황에 대처할 수 없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가장 약자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지난 5년간 가계 긴축으로 개인금고는 커녕 단돈 100유로(13만원)의 여윳돈도 주머니에 넣어둘 수 없을 만큼 재정이 어려웠던 사람들, 돌보는 자녀나 지인 없어 연금을 ATM은 커녕 은행에서 현금으로 찾아 쓰는 방법밖에 모르는 독거 노인들(ATM 앞에서 망연자실 앉아 있던 국제뉴스 속의 노인처럼), 위기 상황에 긴축을 위해 퇴사 시키기 쉬운 회사의 말단 직원들이나 임시직들, 지난 5년간 경제 위기 여파를 고스란히 맞은 대졸 청년 실업자 등이 그렇습니다.

이런 그리스인들 이웃을 바라보는, 그나마 위기를 준비했던 그리스인들 역시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이고, 언제 내 가족의 일이 될 지 몰라 전전긍긍하면서 긴장을 늦추지 못 하고 매일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를 응원해 주세요.

OECD 유럽국가 중 하루 노동시간 1위의 국가인 그리스. 그리스인들은 위기상황에도 열심히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 위기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그리스 자연을 만끽하러 관광객들은 여전히 해변을 찾고 있고 (관광객들이 사용하는 ATM에는 현금 인출 제한이 없습니다. 국제현금카드 등은 그리스은행에서 현금을 인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로도스나 크레타 등 그리스 남부 관광지역들은 여전히 호텔이 꽉 차 있어 관련 업종 종사자들은 여느 해 여름처럼 단 하루의 휴일도 없이 여름 7개월을 고된 노동 속에 있습니다. 

아테네 역시 시내 중심가는 정치, 경제적 문제로 집회 때문에 시끄럽지만 일반 노동자들은 가족과 생계를 위해 열심히 자신들의 할 일을 해 나가고 있습니다. 제가 2주 전 일 때문에 아테네를 찾았을 때에 돌아본 거래처 사업장들도 위기 상황이지만 묵묵히 자신의 업무를 해 나가고 있었고 시내의 상점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그리스의 위기가 한국이나 세계 경제에도 영향을 미치는 만큼, 그리스 상황을 잘 모르고 오해나 편견으로 그리스인들을 폄하하는 말들을 하기보다 응원이 필요한 때입니다. 뉴스나 신문에서 취재경쟁으로 자극적인 기사만 내보내고 있다고 해서 그 최악의 모습이 현재 그리스와 그리스인들 전체의 모습은 아닌만큼 - 이는 마치 북한에서 서해안에 대포를 쏘는 국제뉴스만 내내 보던 일부 외국인들이 한국은 위험해서 갈 수 없는 나라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 묵묵하게 자신의 자리에서 노력해왔고 현재 상황을 열심히 대처하고 있는 그리스인들에 대해, 빚도 안 갚으려 드는 게으른 채무자 취급하며 폄하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TV에서 어느 때보다 그리스에 대해 자세한 소개를 하는 다큐멘터리 등이 반갑고(저 역시 최근 방송 번역 작업에 몇 번 참여해서 내용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세계 문화를 소개하는 비정상회담 같은 프로그램에서 그리스인 대표가 토론에 참여하게 된 것 역시 대표인 안드레아스 씨를 저희 가족 모두가 응원할만큼 반가운 일입니다. 

여러분, 묵묵히 성실히 일하며 이 위기를 이겨나가고 있는 그리스인들을 응원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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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한국에서 청년 때에 IMF를 겪고 공교롭게도 그리스에서도 금융 위기를 5년간 겪으며 일을 하고 있는 한국인 이민자가 현재의 상황을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니, 그리스나 글쓴이에 대한 문맥 없는 악성 댓글은 지양해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필자는 현재 임신 7개월의 직장맘이라 악플을 읽고 대꾸할 에너지가 없어 앞뒤 없는 악플은 모두 삭제할 예정임을 밝힙니다.  

* 최근 그리스 상황이나 관광 등 여러 질문이 잦았었는데, 꼭 답변을 원하시는 경우 이메일 주소를 남겨주시면 개인적으로 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일이 댓글로 답을 드리지 못한 점,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써주시는 댓글은 모두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